한 문장의 교양 (5)
[한 문장의 교양] (5) 르네 지라르 "오직 소설가들만이 욕망의 모방적 성격을 드러내준다"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존 레넌이 부른 ‘이매진(Imagine)’이라는 곡의 일부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소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 당신이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 욕심을 부릴 일도, 배고플 이유도 없는 / 한 형제처럼 / 모든 사람이 /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 봐요.”

누군가의 탐욕과 다른 누군가의 배고픔, 그 바탕에 깔린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가수가 본 아픈 현실입니다. 함께 나누며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는 호소도 잊지 않습니다. 이 노래에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이 이렇게 포개져 있습니다.

예술은 우리를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현실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가를 추방해야 한다. 지난주에 살펴본 ‘시인추방론’(플라톤)의 주된 논리입니다.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요? 예술은 분명 현실을 담고 있죠. 현실과 무관한 시, 삶과 동떨어진 노래에 우리는 감동하지 못합니다. 예술이 현실을 단순히 모방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은 못 보고 지나치기 쉬운 진실을 알려주곤 합니다. 좋은 예술작품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진실을 보게 해주고, 자신과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 결과 자신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죠. 현실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예술, 그런 예술은 하나의 작은 혁명과도 같습니다. 존 레넌의 저 노래처럼요.

예술이 진리와 거리가 멀다는 비판은 그래서 온당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전해주는 위대한 예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만나볼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심지어 예술만이 진리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현실이 아니라 소설 속에 있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라는 책에 들어 있는 그의 유명한 주장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볼까요?

“낭만적인 허영심 많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이 사물의 본성 속에 이미 있다고 언제나 확신하고 싶어하거나, 마찬가지 이야기가 되겠지만, 자신의 욕망이 평온한 주체성에서 우러나온 것, 즉 거의 신에 가까운 자아의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대상을 보고서 욕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욕망이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따라서 사실상 타인으로부터 욕망을 취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 이 도그마들은 현대인이 열렬히 애착을 지니고 있는 욕망의 자율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환상을 옹호하고 있다. (…) 낭만주의 작가들이나 신낭만주의 작가들과 달리, 스탕달이나 플로베르나 세르반테스 같은 작가들은 그들의 위대한 소설작품 속에서 욕망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르네 지라르,『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중에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풀어 쓰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할 때,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할 때, 그 식욕과 소유욕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라고요. 즉, 스스로를 욕망의 주인으로 여깁니다. 지라르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욕망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날씬한 모델이 선전하는 건강음료를 마시고 싶어하는 여성을 생각해보죠. 그녀가 원하는 건 건강음료라고, 욕망의 대상은 다름아닌 음료수라고 말하는 게 상식적이겠죠. 하지만 지라르라면 다르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녀가 실제로 욕망하는 것은 건강음료가 아니라 그 모델이라고요. 그 여성은 건강음료를 통해 날씬한 모델과 같아지고 싶은 것이지 건강음료 자체를 욕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료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건 날씬한 모델입니다.
[한 문장의 교양] (5) 르네 지라르 "오직 소설가들만이 욕망의 모방적 성격을 드러내준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이 ‘주체-욕망매개자-대상’이라는 삼각형 구조를 갖는다는 게 지라르의 주장입니다. 우린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욕망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다른 누군가가 욕망하는 것을 따라서 욕망하고 있습니다(모든 욕망이 다 이런 모방욕망적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지라르는 욕망과 욕구를 구분합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에 대해 느끼는 것은 욕구에 해당합니다. 반면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온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느끼는 것은 욕망에 가깝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방욕망이라는 진실이 일상적으로는 감춰져 있다는 데 있습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주체가 자발적으로 욕망한다는 ‘낭만적 거짓’입니다. 인간이 진실을 발견하는 건 오히려 소설을 통해서입니다. 지라르는 이를 ‘소설적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지금 플라톤과는 전혀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오로지 예술(소설)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우리는 낭만적이라는 용어를 중재자의 존재를 결코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존재를 반영시키는 작품들에 사용할 것이고, 중재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품들에는 소설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중에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지라르는 이와 같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소설을 분석합니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등의 작품이 진실을 보여주는 위대한 소설들입니다. 이 작품들에서 등장 인물은 항상 욕망을 타인으로부터 빌려옵니다. 예를 들어『돈키호테』를 읽으며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돈키호테를 미치광이 취급하곤 합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단순한 광인이 아닙니다. 극중 돈키호테는 전설의 기사 아마디스를 추종하고 있습니다. 즉, 아마디스를 욕망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기사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돈키호테를 지배하고, 그는 아마디스의 행동을 충실하게 모방합니다. 전설 속 인물을 흉내내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의 우스꽝스러운 기행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모방욕망이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 밑바탕에는 타인을 향한 질투와 경쟁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통찰, 이것이 지라르가 위대한 소설들을 통해 발견한 삶의 진실입니다. 타인과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욕망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한 우리 안의 갈등과 싸움, 끝없는 경쟁의식의 원인을 우린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곤 끝없는 갈등과 싸움 속에 살아가겠죠.

플라톤이 비난한 대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데 급급한 소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습니다. 우린 때로 인간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작품들을 만나곤 합니다.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주는 소설, 우리를 진리로 더 가까이 이끄는 예술. 지라르는 그런 예술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 수가 적을지는 모르지만요. 문득 저는 누구를 모방하고 어떤 것을 욕망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해줄 좋은 소설이나 하나 찾아봐야겠군요.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