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이제 개학입니다. 이제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었고, 다음주면 3월 모의고사입니다. 지금까지 준비한 공부 결과를 테스트하고 현재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잘 준비하시고 시험 잘 봤으면 합니다.
새 학년을 맞이하여 오랜 침묵을 깨고 많은 대학들이 올해 수시 입시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크게 변화한 것은 없지만 특징이라고 한다면 수능최저등급을 요구하지 않는 대학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작년의 경우 인하대 수시 1차와 가톨릭대, 성신여대와 같이 논술 전형에서 수능최저등급을 요구하지 않는 대학들이 꽤 있었으나 올해는 수능최저등급을 요구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등급만을 요구하던 것이 올해부터는 백분위까지 반영하고 있는 것 역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변화한 이유는 쉬운 수능 때문입니다. 이번 2013학년도 수능 언어영역의 경우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다 보니 1등급 커트라인이 98점이 된 문제가 생겼지요. 2점짜리 1문제를 틀리면 1등급, 3점짜리 1문제를 틀리면 2등급이 된 것입니다. 똑같이 한 문제를 틀리더라도 등급이 구분되는 것이지요. 최악의 경우 이것 때문에 수능최저학력기준을 맞추지 못해 불합격 처리된 학생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분위나 표준점수를 살펴본다면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학 입장이나 수험생 입장에서는 백분위나 표준점수까지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대학들이 등급만이 아닌 백분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양대의 경우 등급이나 백분위라는 기준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답니다.
물론 확실한 입시안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겠지만, 확실한 것은 정시에 올인하는 것도 수시에 올인하는 것도 모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긴 호흡을 가지고 수능과 수시 모두 착실하게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만약 논술전형으로 대학을 가고 싶은 학생들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반드시 논술 공부를 하기 바랍니다. 논술 공부는 제대로 수업 듣고, 제대로 글 쓰고, 제대로 첨삭받아야 한다는 것 잘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번 호에는 고려대 2008학년도 수시 논술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학생 글의 평가기준은 대학에서 제시한 평가기준을 바탕으로 제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작성한 것이며, 평가 점수는 제 개인적인 판단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원하고 싶은 대학의 최신 기출 문제를 작성하여 페이지 하단에 있는 제 메일로 보내주시면 그중에서 한 주에 한 명 혹은 두 명의 학생의 글을 채점, 첨삭해 드리고 관련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물리적인 여건상 많은 학생들의 글을 첨삭해드릴 수 없는 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 2008학년도 고려대학교 수시 논술
가 최근에 은행업, 보험업, 관광업 및 레저 산업과 같은 서비스 분야의 직업이 증가함에 따라 ‘감정노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수도 현저히 늘고 있다. 그런데 감정노동은 특정한 범주의 직업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공적·사적 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가정과 직장에서 어느 정도 우리의 감정을 만들어내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동반한 쇼핑은 아이들 때문에 심하게 부대끼는 부모들에게 종종 감정노동을 단련할 기회가 된다. 부모들은 계산대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에게 고함을 지르기보다는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아동이나 노인, 장애인 및 병자를 돌보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역시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규범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을 포함한 사회관계 속에서 노동을 한다. 그들은 사회가 일반적으로 그 직업에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얼굴 표정과 육체적 표현을 만들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관리한다.
감정노동 종사자들의 임무는 고객들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업무 속에서 그들은 고객들에게 짜증을 내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표면 연기는 이 딜레마에 대처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나 표면 연기가 위선적이며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방법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노련한 직업인들은 표면 연기 대신 내면 연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간호사들은 무례하고 공격적인 환자를 다룰 때 그 환자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내려고 애쓰고, 화를 내기보다는 스스로 미안한 감정을 가지려 한다. 그러나 그런 대처 방식도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진정한 자기감정으로부터 유리되는 현상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 직업이 몸에 가하는 스트레스는 특정한 감정과 육체적 상태를 요구하는 업무 때문에 더욱 심화된다. 자신의 행위가 자아 개념과 모순된다고 인식될 때 스트레스 수준은 높아진다.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면서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욕구에 우선적으로 부응해야 할 때 몸은 견딜 수 있는 이상으로 가해지는 긴장에 대해 무의식적인 저항을 드러낼 수 있다. 감정노동 종사자들에게 기대하는 감정노동의 양이 증가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위험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나 사무원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金收支心經(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장좌불립)’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문제> 제시문 (가)의 논지를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제시문 (나)를 해설하시오. (700 ± 70자)
▧ 위 문제의 학생 답안
제시문 가는 현대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감정노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비스 사회가 발전되면서 규범적이고 윤리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감정노동은 발생한다. 상대방이 편안함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런 것들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발생시킬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자아가 원하는 행위와 우선시되는 행동이 충돌하여 억지로 우선시되는 행위를 한다면 스트레스의 증가와 무의식적으로 저항이 나타나게 된다. 직장이나 일생생활에서 감정노동이 계속된다면 위험하다.
제시문 가를 바탕으로 나를 해석하자면 제시문 나는 사무원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감정노동을 보여주고 있다. 의자 고행, 고행업무, 염불이라는 시어들은 직장인의 고된 감정노동을 보여준다. 심지어 수화기 버튼 대신에 계산기를 누른다는 시어는 감정노동을 오랫동안 해와서 무의식 중에도 반복적으로 한다는 비극적 상황을 보여준다. 정신적으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우선시되는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굽실굽실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회사원도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감정노동을 한다. 서비스 종사자가 아닌 직장인도 감정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이 계속되어 육체적 고통과 스트레스가 심해져 육체적으로는 감정노동이 습관이 되고 정신적으로는 두려워하는 위험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 평가기준 및 점수 ▧ 해설 및 예시답안
- 습관적으로 제시문을 요약해서는 안 된다.
제가 스마트한 논술의 법칙에서 제일 많이 하고 있는 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제시문 요약만 해서는 안 된다”입니다.
저는 지겹지만 처음 듣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테니 말이니 다시 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먼저 문제부터 보겠습니다. “제시문 가의 논지를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제시문 나를 해설하시오.” 아마도 학생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먼저 제시문 가를 요약하자. 그래야 분량도 채우고 시간 안에 답안도 작성할 테니, 그리고 제시문 나의 시도 정리하자. 분량이 700자나 되니 부담되니까. 그리고 가와 나를 연결해서 간단하게 설명하면 될 거야.”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래의 표를 보지요. 차이를 알겠습니까? 많은 학생들은 모든 문서에서 기본적으로 제시문을 요약하려 합니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지요. 2000자 내외의 글을 120분 동안에 쓰는 것은 부담입니다. 논술을 10년 동안 가르친 저도 만약 연필을 가지고 글을 쓰라고 한다면 부담을 느낄 듯합니다. 그러니 학생들은 더욱 그렇겠지요. 그러니 학생들은 분량부터 채우고 싶어합니다. 지정된 분량을 채우지 못하면 큰 감점이거나 0점을 받을 테니 말이지요. 그러면 분량을 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제시문을 요약해 놓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생들은 제시문 각각을 문제가 요구하는 순서에 맞게 요약해 둡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질문의 의도에 따라 답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문제 출제자는 어떤 의도로 이 문제를 낸 것일까요? 그것은 “학생들은 감정노동의 정의와 위험성을 모르니 이것을 제시문으로 준 뒤 현대 우리 사회에서 많은 직장인들이 감정노동을 겪고 힘들어하고 있음을 파악하여 그 의미를 찾아보고 싶다”일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제시문 가와 나의 요약이 아니라 제시문 가의 감정노동의 정의와 위험성을 제시문 나에 ‘적용·분석’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제시문만 단순 요약, 나열하는 것은 출제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출제자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위의 학생 역시 마찬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제시문 가를 요약하고 제시문 나를 요약한 후 설명하지요. 그것도 단순하게.
- 쉽게 찾아낸 답은 정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위의 학생은 다음과 같이 답을 쓰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제시문 가는 감정노동의 정의와 문제가 있다. 그런데 제시문 나는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고요.
제시문 나는 사무원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감정노동을 보여주고 있다.
의자 고행, 고행업무, 염불이라는 시어들은 직장인의 고된 감정노동을 보여준다.
수화기 버튼 대신에 계산기를 누른다는 시어는 감정노동을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굽실굽실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회사원도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감정노동을 한다.
감정노동이 계속돼 고된 육체적 고통과 스트레스가 심해져
위험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래의 답안을 보면, 대부분 글의 내용은 제시문 가에서 말한 대로 사무원은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틀린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름 시어를 구석구석 찾아서 설명하려 노력한 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시문 가와 나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제시문 가와 나 모두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누가 봐도 제시문 나의 회사원은 감정노동 중인 것이지요.
문제는 제시문 나의 시의 어떤 부분이 제시문 가의 감정노동에 대한 서술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달라는 것이지요. 학생의 답안과 제 예시답안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을 잘 쓰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지난주의 반복입니다. 답은 쉽습니다. 체계적이고 잘 정리된 논술 수업을 들을 것. 그리고 많은 글을 써 볼 것.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글을 반드시 첨삭 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부터라도 논술 공부 시작하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 강사 예시답안
제시문 가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자신의 원하는 것이 아닌 고객의 요구하는 바를 맞추어야만 하는 감정노동이 서비스직뿐만 아니라 공적이고 사적인 영역 모두에 확장되어 현대인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와 위험을 안겨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인들은 고객들의 불만을 최소화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고객들에게 맞추어야 하는 서비스 노동자와 같이 모든 사회생활에서 타자에게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사회가 요구한 대로 맞추게 되어 스스로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문제가 잘 드러난 것이 제시문 나의 사무원이다. 그는 16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노동해야 하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회사와 상사의 요구에 맞추는 것으로 생각하여 상사에게 굽실거리고 심지어는 이러한 노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또한, 그는 과도한 업무가 전화기 버튼을 제대로 누르지 못하는 등의 일상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는 점 역시 회사와 상사에게 자신의 감정과 사고를 맞추려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이 결국 자신의 얼굴과 몸, 그리고 감정과 사고까지도 황폐하게 하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발생하고 있음에도 제시문 2의 표현대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는 내면 연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강현정 S · 논술 선임 연구원 basekanggu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