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85>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1923년 독일의 어느 도시. 이른 아침 눈을 뜬 한 주부가 식사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향한다. 난로에 불을 지피려는 그녀의 손에는 장작이 아닌 돈다발이 쥐어져 있다. 돈에 불을 붙여 난로를 켠 그녀는 태연히 음식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대단한 부자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돈으로 불을 지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집안의 세간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살림살이는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고, 좁은 부엌은 집이 크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돈을 불쏘시개로 쓰는 이유를 묻자 대답이 기가 막힌다. 장작 값이 하루에도 수차례 오르는 데다 구하기도 어려워 돈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 편하고 싸게 먹힌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값이 올랐기에 장작 대신 돈에 불을 붙여 음식을 만드는 것일까? 1923년 독일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1888년 독일의 황제로 즉위한 빌헬름 2세는 베를린, 비잔티움, 바그다그를 잇는 철도의 부설과 해당 지역 개발을 목표로 하는 ‘3B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이라는 점에서 기존 열강들과 마찰을 빚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고, 오스트리아가 사건의 배후로 알려진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동맹이었던 독일은 열강들과의 충돌로 입은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등에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전쟁에 참전하기에 이른다. 독일은 10개월 만에 끝난 ‘보불전쟁’의 전례에 비추어 전쟁이 빠른 시간 안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막대한 전쟁비용을 증세가 아닌 국채 발행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런 조치의 이면에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독일 정부의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패전국의 영토나 지하자원 등 전쟁에서 승리해 얻게 될 전리품과 배상금을 통해 전쟁비용을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 일으킨 독일의 오산


전쟁 초기, 전세는 독일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벨기에를 함락한 독일은 프랑스로 진격했고 연합군은 독일군을 막을 힘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1914년 9월 마른전투를 계기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하루 수십킬로미터에 이르는 이동거리는 독일군을 지치게 했고 보급도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연합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독일은 후퇴를 선택해야 했다. 조기 종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서 독일 경제에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전세가 교착상태에 빠져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정부 지출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전쟁 발발 전 독일의 한 해 예산은 23억마르크였지만, 마른전투 직후인 1914년 10월 한 달간의 지출만 12억마르크에 육박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1917년 10월 지출은 약 40억마르크에 달했고,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8년 10월에는 약 48억마르크가 전쟁을 위해 지출되었다. 독일 정부가 채권과 어음을 남발하면서 마르크화의 가치도 눈에 띄게 하락했다. 독일이 전쟁에 뛰어든 1914년 7월, 달러당 4.2마르크였던 환율은 1919년 1월 8.9마르크까지 상승했다.

더욱 큰 문제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나타났다. 미국 선박에 대한 공격을 계기로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독일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여기에 독일 내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고 수병들의 반란이 ‘11월 혁명’으로 확산되면서 독일 황제가 망명하기에 이른다.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가 1918년 11월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끝이 보이지 않던 전쟁도 막을 내린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제1차 세계대전 역시 참전국 모두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고 많은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전쟁의 참상은 유럽 전역에서 나타났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패전국인 독일에 씌워졌다. 연합군과 독일은 1919년 6월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교전 당사국들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체결한 강화조약으로, 조약에는 독일 영토의 처분, 군사력 제한 등과 함께 독일이 승전국에 지불해야 하는 1320억마르크의 전쟁배상금이 포함되었다.

#화폐 기능 잃은 마르크화

하지만 전쟁을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한 독일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종전 후 독일 정부의 재정은 엄청난 적자상태에 놓여 있었고, 갚아야 할 부채도 1500억마르크에 달했다. 그 외에도 파괴된 사회 기반과 생산시설의 복구,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자국민에 대한 보상 등 돈 들어갈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세금도 충분히 징수할 수 없었던 독일 정부는 하루 종일 윤전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필요한 만큼의 돈을 인쇄소에서 찍어내기로 한 것이다. 모든 자원이 전쟁에 동원돼 상품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중에 돈이 풀리자 물가는 상승하고 화폐 가치는 하락했다. 사람들은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되도록 빨리 소비하려고 하였고 물가 상승은 가속화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심리는 더욱 더 높아져 갔다. 물가가 더 오르기 전에 소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 화폐 유통량이 늘고, 이것이 다시 소비를 부추겨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인플레이션이 가장 극심했던 1923년의 물가 수준은 10년 전에 비해 무려 10억배에 달했다. 마르크화의 가치도 폭락해 1923년 11월 당시, 1달러는 4조2000억마르크에 거래되었다. 마르크화가 화폐의 기능을 상실한 종이 쪼가리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거리는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수레에 돈을 가득 싣고 다니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주부들은 지폐를 벽지나 땔감으로 사용했다. 아이들도 장난감 대신 돈다발로 블록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다.

#초인플레이션이 남긴 상처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85>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은 독일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다. 가격을 수시로 조정해야 하는 상인과 기업은 예기치 못한 여러 비용에 직면했고, 월급이 물가만큼 오르지 않은 서민들의 삶은 궁핍해져 갔다. 평생 모은 돈을 은행에 저축한 사람들은 전 재산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경제개혁과 외자 유입을 통해 초인플레이션은 오래지 않아 진정되었지만, 그로 인해 생겨난 독일인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연합국과 독일 정부, 대기업과 자산가(유대인)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는 사이 정치권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했다. 그중 한 명은 뛰어난 언변으로 독일인들을 사로잡았고 이후 총리를 거쳐 총통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자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다. 비록 초인플레이션이 히틀러의 집권에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집권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원식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


경제 용어 풀이

▨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물가가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기하급수적인 증가세를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초인플레이션은 주로 재화와 서비스가 희소해 가격이 상승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화폐 발행을 남발할 때 발생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나타난 초인플레이션이 대표적이며 헝가리 짐바브웨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도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