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 스토리 세기의 라이벌 (49)
민간항공 점유율 50% 보잉, 22세 목재재벌 보잉이 설립
세계대전 계기로 급성장…제트여객기에 과감히 투자
전투기 한우물 록히드마틴, 앨런·맬컴 형제가 세워
라이트닝 전투기로 명성…방위산업 절대강자로 거듭나
1903년 12월17일 오전 10시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호크 해안.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던 오빌과 윌버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라이트 플라이어호’는 첫 비행에서 12초 동안 36m를 나는 데 성공했다. 민간항공 점유율 50% 보잉, 22세 목재재벌 보잉이 설립
세계대전 계기로 급성장…제트여객기에 과감히 투자
전투기 한우물 록히드마틴, 앨런·맬컴 형제가 세워
라이트닝 전투기로 명성…방위산업 절대강자로 거듭나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 이후 항공기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백명을 실은 제트 여객기가 5대양 6대주를 수없이 넘나들고 있다. 전투기는 1944년 독일에서 제트엔진을 첫 장착한 ‘1세대’ 메서슈미트Me262 개발에 이어 초음속 비행 능력을 갖춘 2세대, 고성능 다목적 레이더와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갖춘 3세대, 중거리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는 4세대, 스텔스(은폐) 기능을 갖춘 5세대로 발전해갔다.
세계 항공기산업 발전을 주도한 회사는 보잉과 록히드마틴이다. ‘인류의 첫 비행’에 매료된 사람들이 항공기 제작에 뛰어들었다.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 항공산업과 미국 군수산업의 두 축을 만들어냈다.
◆1916년 탄생한 두 회사
보잉의 전신은 1916년 7월 윌리엄 보잉이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 세운 ‘태평양항공기제작회사’다. 보잉은 독일인 출신 미국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시애틀에서 목재회사를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보잉은 1909년 미국에서 열린 첫 에어쇼에서 ‘하늘을 나는 물건’을 본 이후 생에 전환기를 맞는다.
보잉은 당시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던 라이트 형제를 찾아가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낙담하지 않고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생 등 인재를 영입해 비행기 동체와 날개를 직접 만들었다. 당시에는 활주로로 사용할 만한 포장도로가 없어 시애틀 인근의 호수를 활주로 대용으로 사용하고 바퀴 대신 수중 이착륙용 플로트를 부착해 호수 위에서 시험비행을 거듭했다.
록히드마틴의 뿌리는 앨런 록히드와 맬컴 록히드 형제다. 이들은 글라이더 비행 장면을 본 뒤 항공기에 사로잡혀 정비사 일을 시작으로 비행법을 배웠다. 앨런은 1912년 동생 맬컴과 함께 4000달러를 빌려 알코하이드로항공기 회사를 세웠다. 1913년 첫 비행기인 G모델을 만들었지만 돈을 버는 데 실패하고 비행기마저 채권자들에게 빼앗겼다.
2년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긁어모은 돈으로 비행기를 되찾은 형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 투자자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 형제는 보잉의 전신인 태평양항공기제작회사가 세워진 해인 1916년 록히드항공기제조회사를 만들었다.
◆전쟁과 궤를 같이한 성장
두 회사는 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보잉은 태평양항공기제작회사를 설립한 지 1년 뒤인 1917년 회사명을 자신의 이름을 딴 보잉에어라인으로 바꿨다. 설립 초기 주문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사재로 연명하던 이 회사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본격 참여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전투용 항공기가 필요했던 미국 정부는 당시 보잉사가 ‘모델C’로 불린 수상비행기를 개발한 사실을 알고 50대를 주문했다. 이 주문 한 건으로 28명에 불과하던 보잉의 직원 수는 1년 만에 377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주문이 끊겼다. 수상보트와 침대까지 제작하며 버티던 이 회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바빠졌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서 1만2731대의 전투용 항공기가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 6981대를 보잉이 제작했다. ‘하늘의 요새’ 시리즈인 B17, B19, B29 전략폭격기를 이 기간에 생산했다.
록히드항공기제조회사는 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해군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몇 년 후에는 회사 문을 닫기에 이른다. 앨런은 1926년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 록히드항공기회사를 설립하고 재기를 꿈꿨으나 1929년 디트로이트 항공사에 매각해야 했다. 세계 경제 공황으로 디트로이트 항공사 역시 망했다. 로버트 그로스 등이 1932년 록히드항공사를 사들여 1934년 록히드사로 개명했다.
록히드가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전설적인 항공기 개발자로 알려진 켈리 존슨이 참여한 P-38 라이트닝 전투기를 생산하면서다. 미국은 P-38을 주력 전투기로 채택했고 곧 벌어진 2차 세계대전 때 대규모 주문에 들어갔다. 록히드는 미국을 대표하는 공군기 제조회사로 떠올랐다.
◆민간 항공기 vs 군수산업
군용기 제작을 주로 해오던 보잉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500만달러를 투입해 제트여객기 개발에 들어간다. 이 과감한 투자는 보잉이 에어버스와 함께 세계 민간 항공기 시장을 양분하는 회사로 성장한 발판이었다.
1958년 보잉이 개발한 707 모델을 시작으로 제트여객기 시대가 열렸다. 보잉은 중대형 점보기 시장을 30년이 넘도록 장악한 베스트셀러 B747과 757,767,777 모델 등을 통해 현재 세계 민간 항공기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보잉은 1990년대 중반 경쟁사 에어버스에 선두를 내주기도 했지만 1997년 맥도널더글러스를 합병, 세계 최대 항공사에 올랐다. 우주방위 사업체인 록웰과 휴즈도 인수해 상업용뿐 아니라 군사용,우주항공용 비행기를 아우르는 거대 항공우주 업체로 위상을 높였다.
록히드마틴은 전체 매출이 보잉에 밀리지만 방위산업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 매출을 자랑하는 절대강자다. 2차 세계대전 후 L-1011 트리스타 점보 제트기 등을 통해 민항기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협력업체 파산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 군용기 사업에 집중했다. 주요 사업부문은 우주항공, 정보통신, 전자, 항공역학, 에너지 및 시스템 통합 등으로 구성돼 있다. F-16 전투기와 C-130 수송기 외에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트라이던트 미사일, 통신위성 등을 생산하고 있다.
록히드마틴은 18개 회사가 인수와 합병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졌다. 1990년대 초반 냉전 종식에 따른 방위산업 시장 축소 위기를 생산 혁신과 인수·합병으로 극복했다. 1991년 제너럴다이내믹스의 항공부문을 인수한 뒤 글렌 L 마틴사의 후예인 마틴 마리에타와 1995년 합병해 지금의 록히드마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록히드마틴은 이후에도 1996년 로랄사를 추가로 인수했다.
◆한국 차세대 전투기 대결
두 회사는 1990년대 미국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인 F-22를 함께 개발하는 등 협력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태생적으로 치열하게 경쟁해왔다. 전투기 사업은 규모가 수조원대인 경우가 많아 사활을 건 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1970년대 후반에는 전투기 납품을 위해 일본 정계에 거액의 뇌물을 준 록히드 스캔들까지 일어났다.
보잉과 록히드마틴은 2001년 미국 국방부의 첨단 차세대 전투기(JSF) 사업을 둘러싸고 혈전을 벌였다. ‘세기의 대결’로 알려진 이 사업은 2000억달러 규모로 미국 국방사상 최대 사업이었다. 록히드마틴과 보잉은 각각 X35와 X32 기종을 내세워 시제 모형기를 개발하고 시험비행을 마쳤다. 이 사업은 록히드마틴에 낙찰돼 보잉은 패배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록히드마틴은 수억달러의 신규 투자와 수천명의 신규 인력 채용에 나서는 등 지속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도 두 회사의 주요 경쟁 무대였다. 보잉(옛 맥도널더글러스)은 FX 1차 사업(40대)과 FX 2차 사업(20대)을 수주해 총 60대의 F-15K를 한국에 판매했다. 1, 2차 총 사업비는 7조7000억원에 이르렀다.
보잉과 록히드마틴은 한국 공군의 차기 전투기(FX) 3차 사업을 놓고도 경쟁하고 있다. FX 3차 사업은 스텔스 등 첨단 기능을 갖춘 5세대 전투기 60대를 2016년까지 도입하는 사업이다. 사업 규모는 8조원대로 단일 사업으로는 창군 이래 최대다. 록히드마틴은 F-35, 보잉은 F-15SE 기종을 각각 앞세워 “핵심 기술을 한국에 이전하겠다”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F-15SE는 현재 한국 공군 전투기(F-15K)와의 호환성과 무장 능력 측면에서 우위에 있는 반면 F-35는 스텔스 기능이 탁월하다는 평가다.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라는 게 정부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다. 방사청은 7~9월 현지 시험평가를 거쳐 10월께 기종을 선정할 예정이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