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글 논술 첨삭노트] 배경지식이 필요한 독해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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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본격적인 상위권 대학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독해유형’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걸 유형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긴 합니다. 특정하게 요구되는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저 ‘읽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할까요? 연세대와 같이 독특한 유형을 유지할 수도 있으나, 그 외 대학들은 어찌했든 ‘제대로 읽었느냐’를 중점에 놓고 갑니다. 가령 이화여대의 유형만 연습하면 경희대, 중앙대나 고려대를 모두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원리 때문이지요. 우선, 말씀드릴 결론은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배경지식이 정말 필요하나요?”

어찌보면 논술지문은 언어비문학지문과 유사하기 때문에 언어만 잘하면 논술도 잘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지요.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인정하는 바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식 시험과 주관식 시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니까요. 제시된 답 중에서 고르는 일은 주어진 의미를 파악하고 다시 재생산해서 글을 써야 하는 일에 비하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주어진 보기 중에서 가장 적당하거나, 적당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 일과,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장이나 단어의 뜻을 ‘아는 척’ 원고지에 써야 하는 일은 도저히 같을 수 없지요.

소위 명문대라 불리우는 학교들의 제시문들이 고등학생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렵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특히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형이상학적 주제를 가진 제시문들은 학생들에게 큰 어려움이지요. 전 그래서 학생들에게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좋다고 항상 이야기합니다. 갑자기 ‘옛날 논술’처럼 배경지식을 이야기하다니 좀 우습기도 하겠지만, 어차피 독해만으로 뜻을 100% 이해하기에 제시문은 너무 어렵습니다.

이것은 정교하게 짜여진 커리큘럼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만, 문제를 푸는 것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즉, 일반적인 사실로부터 좀 더 전문적인 사실로 지식을 확장해 나갈 수 있도록 문제의 순서를 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죄수의 딜레마’나 ‘게임 이론’에 관련된 문제를 먼저 풀기보다는 ‘국부론’에 관련된 문제를 풀어서 기초를 확실히 쌓는 것이 좋지요. 기출문제는 이런 식으로 단계를 이루어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참고] <국부론>의 내용을 토대로 출제될 수 있는 내용들

①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이기적인 행동 → 인간본성 및 윤리 주제)

②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이 곧 전체의 이익이 된다. (경제주제 문제 c.f 죄수의 딜레마나 공유지의 비극과 대립되는 내용으로 출제)

③ 그러므로, 국가는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 (경제 및 사회 주제 : 개인과 국가 혹은 개인과 집단의 문제)



무작정 아무 문제나 푼다고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문제를 푸는 것도 순서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배경지식을 난이도별로 조성할 수 있도록 시도돼야 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배울 때는 이렇게 단계별로 접근하는 것이 좋지요. 단지 배경지식뿐만 아니라 유형도, 난이도도, 분량도 그렇습니다.

어차피 고등학생이라면 전문적인 개념이나 어휘를 보고 난감해하기란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모두 낯설기 그지 없습니다. 하지만 한번 틀리더라도 해설을 통해 내용을 이해하고 나면, 그 개념이나 어휘를 기억할 수 있지요. 그리고 다음에 그와 관련된 주제나 문제가 나오면 ‘미리 이해한 부분’을 이용해 좀 더 쉽게 독해를 할 수 있지요. 배경지식이란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아예 없는 학생도 없습니다. 다만 배경지식만을 위해 따로 시간을 투자하진 말라는 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문제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쌓아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고3에게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 다음의 제시문을 한번 보시죠.

▨ 구체적인 배경지식의 활용 예시

구체적인 인류의 역사라는 의미에서 ①보편사 같은 것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②역사주의자는 역사의 사실들을 선택하고 정리하는 자가 바로 우리들 자신이라고 함을 깨닫지 못하고, ‘역사 그 자체’라든가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그 고유한 법칙으로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장래와 우리의 관점까지도 규정한다고 믿는다. 역사주의자는 역사적 해석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와 결단으로부터 나오는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역사적 해석을 바라는 우리의 요망 가운데는 심오한 직관이 있다고 믿는다. 역사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다. 비록 역사는 ③목적을 가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목적들을 역사 위에 부과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역사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역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자, 유명한 책이긴 하지만 이걸 진짜로 읽어본 고등학생이 많지는 않을 겁니다. 이 책은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책이니까요. 문제는 이제 논술 시험 제시문에 나온다는 사실. 어찌했든, 내용이 무엇인지 대략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대개의 제시문이 그렇듯, 맨 앞과 맨 뒤에 중요한 내용이 담길 가능성이 높고, 이 글 역시 그러니까요. 저기 보이는 설의법(設疑法)은 진리를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더군다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역사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선어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략적으로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만, 이걸 요약하기 위해서는 저 중간 내용들을 외연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분량이 차니까요. 하지만 역사주의자나 보편사와 같은 단어들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지, 나와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뚜렷이 구별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것이 편하지요. 저걸 생각하다가 시간을 날릴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이런 류의 제시문을 자주 내는 서강대의 경우, 저런 단어를 그대로 카피해도 괜찮긴 합니다. 그 정도는 인정해주는 편이죠. 어차피 너무 어려운 제시문이니까요.

우선 ①‘보편사’라는 말부터 살펴보죠. 보편(universality)이란 영어단어에도 보이듯, 우주 어디에나 공통되도록 있는 성질 뭐 요런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이해해놓을 필요는 없지요. 이건 그냥 ‘객관적/절대적/일반적’이란 단어로 대치해서 읽으면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에 대한 반대어도 익혀놓아야지요. 그래야 비교하기 문제에서 쉽게 눈치를 챌 수 있으니까요. 반대어는 ‘개별적/상대적/주관적’ 뭐 이런 것입니다. 이런 개념들이 머릿속에 콕콕 있어야 쉽게 내용을 구분지어 놓을 수 있지요.

② ‘역사주의자’란 다소 애매한 단어이긴 합니다. 가령 “모든 문화는 역사성(historicality·歷史性)을 지닌다”는 표현은 문화인류학 책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지만, 구체적인 뜻이 잘 잡히지는 않습니다. 칼 포퍼는 역사주의자로 헤겔(G Hegel)이나 마르크스(K Marx)를 찍어놓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내용이 없으니 우리가 알아서 이해해야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주의자란, 우리의 역사가 역사적으로 흐른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지요. 저 위에 말씀드린 ‘역사성’은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구성된 시간의 성질’이란 뜻입니다. 고로 합쳐서 읽으면 ‘역사주의자’란 ‘역사란 일정한 흐름을 갖고, 과거의 일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며 유기적으로 흘러가는구나!’하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앗, 유기적(organic)이란 말은 또 뭐냐고요? 영어단어에서 보이듯, 전체(생물체 전체)와 개별적인 요소(생물체의 부분)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지요. 쉽게 이야기해서 ‘서로 상호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③‘목적을 가지다’란 표현은 ‘목적론’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걸 보고,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나면 당신은 논술공부를 좀 한 것이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정한 목적을 가진다는 사고방식인 ‘목적론’을 역사에도 투영시키게 되면 이렇게 해석이 되죠. ‘우리의 역사도 일정한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흘러간다’.

[생글 논술 첨삭노트] 배경지식이 필요한 독해 유형
이런 내용은 출제본부의 해설서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따로 공부하기 어려운 내용이기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이 필요한 것이지요. 위의 문제의 단어들을 이해했다면, 이제 저런 류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 출제가 되는지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저런 역사성, 보편성은 모두 ‘인간의 의지보다 우선한 조건’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쉽게 풀어서 대립식으로 보여드리자면 <환경결정론 VS 자유의지론>이 되는 것이지요. 저 제시문을 보고, “오호라, 이제 그럼 인간의 의지는 그래봤자 외부적 조건에 묶여 있다는 제시문이 하나 나오겠네”라고 생각하면, 정답입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꿰뚫어 본 것이죠. 아마 당신은 다른 학생들보다 머리 하나는 위에 있을 겁니다.

이용준 S·논술 선임 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