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스토리] 세기의 라이벌 (46)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로버트 카파

'결정적 순간' 브레송
초현실주의 화가 지망생, 전 세계 돌며 사진촬영…연출없는 의외성을 선호

'더 가까이' 카파
유대인 출신으로 갖은 핍박, 전쟁의 참혹성 세상에 알려…베트남서 지뢰 폭발로 사망
일상 포착한 브레송 vs 전쟁터 누빈 카파…사진에 '영혼'을 담다
1800년대 말 등장한 사진은 처음에는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카메라 크기가 줄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진은 서서히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잡게 된다. ‘사진을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과 ‘전쟁의 참상 등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치열하게 진행된다.

이 같은 움직임의 최전선에 있었던 인물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다. 이 둘의 삶과 사진은 대조적이었다. 사진가들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고 새로운 사진문화를 탄생시킨 동료이기도 했다.

사진으로 美를 추구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 샹틀루 지방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섬유회사를 경영했다. 맏아들인 브레송이 가업을 이어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파리에서 2년 동안 회화공부를 했고 초현실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브레송은 그러나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꼈다. 현실에서 도망치듯 그는 1931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행 배에 올라탔다. 닥치는 대로 일했고 오스트리아 사냥꾼을 만나 사냥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다.

그가 사진기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사냥을 하지 않을 때는 중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가 찍은 사진들은 ‘기록사진’이라기보다 독창적인 기하학적 구도를 강조하는 ‘초현실주의 예술’에 가까웠다. 그는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다 풍토병에 걸려 죽을 뻔했고 1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브레송은 마르세유에서 소형 라이카 카메라 한 대를 구입한 뒤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932년 파리에서 브레송이 찍은 ‘생 라자르역 뒤’는 그의 대표작이다.

<비가 그치고 나서 바닥에는 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한 중년 남성이 그 위를 묵직한 발걸음으로 뛰어넘고 있다. 수면에는 이 남성의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반영된다. 뒤편으로 보이는 조그만 포스터에는 여자 무용수가 남자를 비웃듯 가벼운 발놀림으로 점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는 단두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전쟁에 참여한 브레송은 1940년 6월22일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하이델베르크 인근 수용소에서 3년간 육체노동을 했다. 1943년 2월 수용소를 빠져나왔다. 그는 1944년 파리 해방의 순간을 생생하게 필름에 담아내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1947년 이후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며 동양사람들의 생활과 풍토 등을 서구에 알리기도 했다. 간디의 마지막 모습을 찍기도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러시아(당시 소비에트연방)와 쿠바를 방문해 철의 장막 뒤편에 감춰진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1955년 루브르박물관에서 사진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다양한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했다. 여느 사진가와 달리 ‘뜻밖의 상황’에 집중하고 ‘의외성’을 선호했다. 1965년 처칠의 장례식장에서 그가 찍은 사진은 세인트폴성당으로 들어오는 장례행렬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찾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소년의 모습이었다. 브레송은 1974년 사진계를 떠났다. 그림과 디자인에 몰두하며 이후 은둔자로 살았다. 2004년 8월2일 향년 96세로 타계했다. 그의 묘비에는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그 순간을 영원히 포착하는 단두대”라고 써 있다.

불후의 명작 ‘병사의 죽음’

로버트 카파의 본명은 안드레이 프리드만이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1913년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삶은 청소년 시절부터 순탄치 않았다. 17세였을 당시 헝가리는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카파가 공산당원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1931년 독일 베를린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카파는 기자를 꿈꿨다. 베를린대에서 공부하며 언론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데포트통신사에서 암실 조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1932년 11월27일이다. 카파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강연하는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기자들이 중형 카메라를 쓰고 있어 집회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카파는 소형 카메라를 숨겨 연단 가까이 접근했다. 카파의 사진은 슈피겔지(紙)의 한 면을 가득 채웠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통 자리에 오르자 카파는 파리로 쫓기듯 이주했다. 그 당시 파리는 파시즘을 피해 도망온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피신처였다. 그는 로버트 카파라는 새 이름을 만들고 미국 사진기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로 만들어준 사진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찍은 ‘병사의 죽음’이다.

<한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오던 순간 적군의 총알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다. 충격으로 오른팔은 뒤로 젖혀졌고 손에 쥔 총을 놓치기 일보 직전이다. 병사의 뒤로는 넓디넓은 하늘이 펼쳐져 있고 땅에는 풀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총을 든 채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민병대 병사 페레티코 갈시아의 죽음을 포착한 이 사진은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함께 스페인 내전을 다룬 명작으로 손꼽힌다.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카파는 이후 중국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등 전쟁터를 계속 돌아다녔다.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순간들을 포착해 전 세계에 알렸다. 노르망디상륙작전이 벌어진 1944년 6월6일 오마하해변에서 카파는 “나는 도박꾼이다. 노르망디해변을 향하는 첫 파도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는 말과 함께 1차 상륙선에 올라탔다.

카파는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라이프지에 사진이 실렸을 때 사람들은 흔들린 초점 탓에 작전 당시의 긴박함과 전쟁의 현장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사진 설명도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였다. 실상은 사진 설명과는 달랐다. 카파는 사진을 선명하게 찍었으나 암실의 조수가 흥분한 탓에 필름 건조 과정에서 사진을 망쳤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촬영지는 베트남이었다. 1954년 5월 인도차이나 전쟁을 촬영하기 위해 찾았던 베트남의 한 농촌 지역에서 대인 지뢰를 밟았다. 향년 41세였다. 카파를 미국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자는 제안이 유족들에게 전달됐다. 그의 어머니는 “카파는 전쟁에 반대했다. 군인들 사이에 묻히게 해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반대했다.

‘결정적 순간’ vs ‘더 가까이’

브레송의 사진은 ‘결정적 순간’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1952년 출간된 그의 사진집 영문 제목(The Decisive Moment)이기도 한 이 단어는 ‘특정한 상황이나 인물의 핵심을 직관적 능력으로 포착한 순간’을 뜻한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인위적 연출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가 유진 스미스가 일본 미나마타마을에서 중금속에 몸이 마비된 아이의 사진을 찍을 때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도록 연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차라리 사진을 포기하는 편이 더 낫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사진을 찍은 뒤 ‘트리밍(사진의 일부를 잘라내는 행위)’조차도 하지 않았다.

카파의 사진은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6·25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을 돌아다니며 전쟁의 폭력성과 비극을 극적으로 묘사했다.

브레송과 카파는 사진가 단체인 매그넘을 만들었다. 사진가들의 독립권과 지식재산권을 강화하는 활동을 했고 각종 매체에 사진을 제공하는 통신사 역할도 했다.

브레송은 평생 독일의 라이카 카메라만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반면 카파는 초창기 시절에는 라이카 카메라를 즐겨 썼지만 콘탁스를 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망디로 향하던 카파의 품속에 있던 것도 2대의 ‘콘탁스2’ 카메라였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