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세중립국(永世中立國)을 유지하면서 전쟁의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영세중립국이란 다른 국가 간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의무를 가진 국가를 말한다. 대신 다른 국가들도 영세중립국을 침공하지 않는다. 영세중립국은 영세중립국을 희망하는 국가와 다른 나라들의 조약을 통해서 성립한다.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1815년부터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스위스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유럽을 개편하는 작업에서 독립을 확인받음과 동시에 영세중립국으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게 된다.

스위스의 영세중립국 지위는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갔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유지됐다. 당시 네덜란드와 벨기에도 중립을 선언했지만 결국 독일의 침공을 받고 국토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약에만 유지하는 중립국 지위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스위스는 어떻게 2차 세계대전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사실 스위스는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를 잇는 지점에 놓여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가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위스의 화폐인 스위스프랑이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스위스가 2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스위스프랑, 기축통화 역할

기축통화란 국제 간의 거래에 사용되는 통화를 말한다. 수많은 국가들이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통용 가능한 화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화폐 본연의 기능인 교환의 매개수단, 가치의 저장수단, 가치의 측정단위 등의 역할을 무역과 국제금융에서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교환의 매개수단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사용되는 지급결제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치의 저장수단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화폐 형태로 재산적 가치를 저장하여 현재로부터 미래로 구매력을 이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치의 측정단위란, 가격이나 가치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단위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기능을 특정 국가 내부에서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거래 속에서 담당하는 통화가 기축통화이며, 제2차 세계대전 주요 국가 통화의 화폐적 안정성이 위협받던 그 시절 스위스프랑이 바로 기축통화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전쟁 수행을 위해 철광석, 석탄, 석유, 고무 등의 자원들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했다. 독일 본토와 점령지에서 확보한 자원으로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러한 자원들을 전쟁과 관련없는 지역인 제3국으로부터 조달받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석유는 중동 지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결제 통화 고민에 빠진 독일

하지만 문제는 결제방법이었다. 독일에 석유를 판매하는 중동 지역 국가들은 독일 화폐는 물론이고 당시 기축통화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미국이나 영국 화폐로 결제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았다. 이들 국가는 당시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결과에 따라 이들 국가가 발행한 화폐는 언제든지 휴지조각으로 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가치의 저장수단으로써의 기능이 위협받고 있던 이들 화폐는 교환의 매개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독일은 고민에 빠졌고, 그 과정에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영세중립국인 스위스가 발행하는 화폐로 결제하는 방법이었다. 독일은 스위스에 금괴를 팔고, 이를 스위스프랑으로 바꿔 자신들이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결제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독일 입장에선 스위스프랑의 화폐적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스위스를 침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침공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스위스가 제2차 세계대전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던 가장 큰 원인은 자국의 화폐가 전쟁 참여국들의 결제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당시 기축통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스위스를 침공하지 못한 이유는 이 밖에도 몇 가지가 있다. 독일 침공 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는 알프스의 모든 통로를 파괴하겠다고 선언, 침공 시 실질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간 물자 및 병력 수송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는 점이라든가 알프스의 험한 지형을 이용한 장기간의 게릴라 전을 진행하겠다고 위협했던 점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자신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자국의 안위를 보장받은 스위스인의 경제관도 한몫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축통화 지위 흔들리는 달러화

[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스위스가 2차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은 세계 기축통화로써 달러화의 위상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의 늪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데다 달러화의 가치는 계속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화 역시 최근 전개되고 있는 유로존 내부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회원국 간의 경제상황이 상이하여 기축통화가 가져야 할 가장 커다란 요건인 통화의 안정성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 엔화는 장기 침체와 낙후된 일본 금융시장으로 인해서 기축통화로서 기능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앞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스위스가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자국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최근 전개되고 있는 중국이 최근 자국 화폐인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라든가, 세계 각국이 전개하고 있는 기축통화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aijen@kdi.re.kr


< 경제 용어 풀이 >

▨ 기축 통화

국제시장에서 거래 또는 결재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통화를 의미하며, key currency라고 한다. 특정국가가 발행한 화폐가 기축통화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통화가치가 안정적이며, 고도로 발달한 외환시장과 금융·자본시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현재 미국 달러, 유럽연합(EU) 유로, 일본 엔 등이 기축통화로 사용되고 있다.

▨ 화폐의 기능

① 교환의 매개수단: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사용되는 지급결제의 수단이다.

② 가치의 저장수단:현재로부터 미래로 구매력을 이전하는 수단이다.

③ 가치의 측정단위:가격이나 가치를 측정하고 기록하는 공통된 단위로서의 기능을 한다.

④ 장래지불의 표준:경제거래와 결제시점이 다른 경우 화폐는 장래지불의 표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