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 버거킹
[세기의 라이벌] 난생 처음 버거 먹는다면… 와퍼 vs 빅맥 뭐가 맛있을까
[세기의 라이벌] 난생 처음 버거 먹는다면… 와퍼 vs 빅맥 뭐가 맛있을까
“난생 처음 버거를 먹은 사람들은 와퍼와 빅맥 중 무엇을 더 좋아할까?” 2008년 버거킹은 버거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와퍼와 빅맥에 대한 시식 테스트를 진행했다. 브랜드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채 태국 몽족,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루마니아 트랜실바니아 지역 농부 등에게 두 버거의 맛에 대한 평가를 부탁한 것이다. 자사의 대표적인 메뉴 와퍼와 경쟁사이자 업계 1위인 맥도날드의 대표 메뉴 빅맥을 놓고 ‘세계에서 가장 공정한 맛의 테스트’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결과는 와퍼의 승리였다. ‘와퍼 버진(처녀)’이란 주제의 이 광고 캠페인은 맥도날드와 버거킹 간 마케팅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다. 불과 1년 간격으로 문을 연 맥도날드와 버거킹 사이의 ‘버거 전쟁’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서막에는 창업자 레이먼드 앨버트 크록과 제임스 휘트먼 맥라모어가 자리하고 있다.

노장의 안목 vs 청년의 패기

맥도날드 사업을 시작하기 전 크록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세계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그는 15살의 나이를 숨기고 적십자 구급차의 운전기사로 취직했다. 실습 과정이 끝나기도 전에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그 후 종이컵 판매원, 피아니스트, 재즈 뮤지션 등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고향인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의 라디오 방송국 WGES에서 라디오 DJ를 맡기도 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모리스와 리처드 맥도날드 형제를 만나게 된 건 1954년이다. 그는 당시 밀크셰이크 믹서기 판매원으로 일하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맥도날드 형제는 캘리포니아주 샌베르나르디노에 위치한 ‘맥도날드(Mcdonald’s)’를 운영 중이었다. 맥도날드는 햄버거, 치즈버거, 감자튀김, 밀크셰이크, 소다 음료 등을 판매하는 전형적인 드라이브인 레스토랑(차를 탄 채 메뉴를 주문할 수 있는 식당)이었다. 맥도날드는 단박에 크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편하고 효율적인 시스템, 청결한 분위기, 무엇보다 값싸면서도 맛 좋은 버거…. 크록은 “이곳에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판단했고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다. 그의 나이 52세. 크록은 그렇게 맥도날드의 ‘늦깎이’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이에 비해 버거킹 창업주 맥라모어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공황의 충격파가 몰려왔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밀턴 맥라모어는 졸지에 전 재산을 잃고 칠면조 농장일을 시작했다. 어머니 마리안 플로이드 휘트먼은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한 맥라모어는 졸업 후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했다. 그러던 중 햄버거 프랜차이즈 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됐다. 맥도날드 형제의 가게에서도 사업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1954년 그는 코넬대에서 함께 수학한 데이비드 R 에저턴과 함께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문을 연 햄버거 가게 ‘인스타버거킹’ 사들였다. 인스타버거킹은 한 번에 패티(버거에 들어가는 고기) 12장을 구울 수 있는 ‘인스타 브로일러’를 사용한 식당으로 1953년 키스 J 크레이머와 매슈 번스가 설립한 프랜차이즈 기업이었다. 따라서 맥라모어는 결과적으로 이 기업의 마이애미 가맹점을 인수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각고의 연구 끝에 인스타 브로일러보다 패티의 육즙을 더 유지할 수 있는 가스 그릴을 고안하자마자 ‘버거킹’이라는 이름의 법인을 설립, 독립하게 된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추진력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와 함께 법인을 설립하고 6년째 되는 해 형제로부터 270만달러를 주고 경영권을 인수했다. 1961년 크록이 단독 경영권을 확보한 뒤로 맥도날드는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2년 만에 매장 수는 30개에서 500여개로 늘어났다. 1965년에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주식은 1주당 22.5달러의 평가를 받았다. 상장 첫 날 주가가 30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상장 2년 뒤에는 캐나다에 해외 1호점을 냈다. 1968년에는 전 세계 시장에 1000호점을 개설했다. 불과 5년 만에 매장 수를 2배나 늘린 것이다.

한편 마이애미 사업권만 갖고 있었던 맥라모어는 본사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것을 틈타 1959년 전국 사업권을 인수했다. 본사인 인스타버거킹은 1955년까지 40여개 매장을 내는 데 머물고 있었다. 전국 사업권을 얻은 뒤 곧장 가맹사업을 시작한 그는 버거킹 경영권을 식품업체 필스버리에 넘긴 1967년까지 250여개 매장을 개설했다. 10년도 안 돼 6배가 넘는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1963년에는 맥도날드보다 4년 앞서 해외에 진출했다. 버거킹의 첫 해외 매장은 푸에르토리코에 들어섰다. 두 창업자의 사업 전략은 많이 달랐다. 크록은 본사가 먼저 매장을 운영한 뒤 가맹점주에게 매장을 장기 임대하는 형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가맹점주에게 안정적인 사업을 보장하면서 가맹비, 재료 유통비뿐 아니라 임대료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반면 맥라모어는 당시 지역 단위로 사업권을 판매하는 방식을 취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맥도날드와 버거킹의 가맹점 비율은 각각 75%와 90%에 이른다.

빅맥과 와퍼의 아버지들

맥도날드와 버거킹의 또 다른 이름인 빅맥과 와퍼도 크록과 맥라모어의 ‘작품’이다. 빅맥은 1967년 펜실베니아주에서 시범적으로 판매된 뒤 이듬해 전국적으로 출시됐다. 당시 가격은 개당 45센트였다. 빅맥의 가장 큰 특징은 샌드위치처럼 버거 사이에 ‘클럽’이라고 부르는 빵을 한 장 넣고 패티 두 장을 사용한 것. 클럽은 맛을 더할 뿐 아니라 재료들을 고정시켜 흘러내리는 걸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빅맥은 출시된 지 1년 만에 50억개가 팔렸다. 현재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분기마다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빅맥 가격을 기준으로 각국의 통화가치를 평가하는 ‘빅맥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와퍼는 빅맥보다 10여년 일찍 세상에 나왔다. 빅맥의 패티(45.4g)보다 2배 이상 두터운 쿼터파운드 쇠고기 패티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첫 출시 가격은 37센트. 와퍼는 소비자의 입맛에 따라 업그레이드됐다. 와퍼가 처음 선보인 지 20여년이 흐른 1980년대에는 처음 출시됐을 때보다 3분의 1가량 용량이 늘었다. 경쟁사 맥도날드는 와퍼를 겨냥해 ‘맥디엘티’ ‘맥린디럭스’ ‘빅앤테이스티’ 등 쿼터파운드 패티를 사용한 버거를 내놨다.

상반되는 행보

맥도날드와 버거킹을 성공의 반열에 올린 뒤에도 두 사람의 행보는 달랐다. 크록은 197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까지 20여년간 맥도날드와 함께 했다. 1983년 미국 월간지 에스콰이어는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했고,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했다”며 그를 20세기 미국인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50인 가운데 한 명에 선정하기도 했다. 반면 맥라모어는 1967년 식품업체 필스버리에 경영권을 넘겼다. 1970년까지 CEO로 활동한 뒤 6년 동안 버거킹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다. 그 뒤 버거킹은 주류업체 디아지오 등에 인수됐다. 현재는 미국 뉴욕 소재 사모펀드 3G캐피탈 매니지먼트가 사업권을 갖고 있다. 2004년 모건 스펄록이 하루 세끼 맥도날드 버거만 먹으면서 변해가는 자신의 몸을 관찰한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사이즈미’를 제작하는 등 버거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당 1달러에도 못 미쳤던 버거 전문 식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크록과 맥라모어의 저력은 ‘글로벌 전문기업’이 많지 않은 한국에 또 다른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전 세계를 ‘맥도날드랜드’로 만든 행운의 사업가 크록은 이렇게 말한다. “행운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당신이 땀을 한 방울이라도 더 흘릴수록 더 많은 행운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조미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