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48) 한국 최초의 경제학자 정약용
흔히 경제학은 서양에서만 전개되어 발달되어 온 학문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정약용이 있기에 그러한 견해는 틀렸다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애덤 스미스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제학적 관점을 가지고 국가와 인간의 경제활동을 바라보았다. 사실 다산 정약용이 살아온 시대적 환경이 애덤 스미스의 시대적 환경보다 시장 경제 메커니즘이 더 명확히 들어나지 못한 환경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산이 보여준 통찰력에 더욱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애덤 스미스보다 39년 늦은 1762년에 태어났다. 당시 조선의 시대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후 물질적 정신적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 특히 양란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은 남과 북에 존재하는 미개한 오랑캐에게 유학의 경전을 이해하고 있는 문명국이 패배한 치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중국에서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일련의 사건이 전개되면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있었으며, 청나라를 통해서 유입되는 천주교를 비롯한 각종 서양의 학문과 과학기술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명분에 사로잡힌 조선 지식층

하지만 조선의 지식인층은 이러한 새로운 환경적 변화를 수용하고 이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전개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신들의 세계관을 유지하고 고수하기 위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일면 존명배청(存明俳淸)이라 하여 청나라를 치고 명나라는 돕는다는 명분론을 앞세워 북벌을 기획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지식인층이 어떠한 세계관을 갖길 희망했는지를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직시한 층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다. 정약용은 명분이 아닌 실질적인 대안을 찾으려 시도하고 그러한 대안을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이라는 두 가지 학문관으로 정리하게 된다. 경세치용학은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농업분야에 대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식으로 토지제도를 어떻게 개혁하는 것이 좋은지를 제시하였으며, 이용후생학은 상공업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견을 제시해 주었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두 번의 외침을 바탕으로 조선을 부국강병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식자층이 보였던 대응 방식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실질적인 대안으로 백성들의 노동 방식과 생산 방식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재화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위해서 분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사농공상이 뒤섞여서 구별이 없는데, 다만 한 마을 안에 사민이 섞여 살 뿐 아니라 또한 한 몸뚱이로 네 가지 업을 겸해서 다스리니 이것이 한 기예로 성취된 것이 없다.”

기예란 오늘날로 말하면 숙련공들이 갖고 있는 숙련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당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급자족적인 생산활동으로 인해 각 경제주체들이 모든 생산활동을 스스로 전개하는 데 있다고 보았고, 각각 특별한 기술을 연마할 경우 생산량이 증가할 것이고 이는 곧 부국강병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사실을 제시한다.

분업 통한 생산성 향상 주장

다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사농공상이 철저히 분업화하기 위해서는 동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곳에 모여서 거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이는 오늘날 가장 기초적인 산업 입지 이론 중 하나인 집적 이익을 고려한 혜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끼리 모여 서로 교육 내지 연구를 함께할 경우 더 큰 기예를 익힐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업도시와 일반도시 등이 구분되어 정착이 되고 나면 많은 물류량이 발생할 것이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수레와 배의 규격을 통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 또한 제시한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모든 철도의 철로 규격은 통일되어 있다. 이는 각 나라마다 다른 철로 규격을 사용할 경우 서로의 철로를 연결할 수 없게 되며 원활한 물류 시스템을 갖추기 어렵다는 사실이 고려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열차를 본 적도 없는 그 시절 이러한 선견지명을 보여준 것이다.

다산의 경제관이 서양에서 전개되어 온 경제관과 다른 점은 일련의 경제적 개선 작업이 개인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고 국가가 주도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있다. 그가 바라본 시장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시장이 마을마다 설치되었더니, 큰 폐해가 발생하였다. 재물을 낭비하고 산업을 폐하고 술주정하고 싸움질만 하는 등 변이 발생하였다. 단연코 모든 시장은 엄금해야 한다.”

정부 개입 강조한 시장관

그의 시장관이 이와 같이 형성된 것은 당시의 상업 발달 형태를 고려할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가져다 주는 혜택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 당시 수행되는 상업적 거래는 몇몇 거상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이러한 거상들은 대부분의 품목에 대한 수급을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점매석의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즉, 당시 시장은 완전시장의 형태보다는 독과점시장에서 전개될 수 있는 모습들이 더 많이 엿보인 것이다. 결국 다산 정약용이 시장의 기능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강조한 것은 오늘날 독과점시장으로 인한 시장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이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할 것이다.

불과 애덤 스미스와 몇 십년 차이를 두고 우리는 애덤 스미스에 필적할 만한 경제관을 갖고 있는 지식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정약용의 학문관과 세계관이 잘 계승되어 지속적으로 발전했다면, 경제학의 메카는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아니라 성균관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호 KDI 전문연구원 aijen@kdi.re.kr

☞ 경제 용어 풀이

집적 이익(集積 利益)

어떤 지역에 산업이나 인구가 집중하면 서로가 분업(分業)되거나 노동력 및 소비의 시장이 이뤄지면서 또한 도로 등의 시설도 마련되고 투자 효율·생활 효율이 좋아지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이러한 것이 분산해 있으면 시설 같은 것도 이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