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쏘는' 자가 이긴다… 혀끝 짜릿한 '100년 戰爭'
끈질긴 2인자 펩시
1934년 '반값' 제품으로 히트
'블라인드 테스트' 젊은층 어필 콜라는 성분만 놓고 보면 99%의 설탕물과 1%의 ‘비밀성분’을 섞은 음료에 불과하지만 그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지닌 상품이다. 미국에서 탄생해 자유무역의 확산과 더불어 세계로 뻗어나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도 통한다. 세계 콜라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코카콜라컴퍼니와 펩시콜라는 기업 간 경쟁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례다. 코카콜라는 1886년, 펩시콜라는 1898년 탄생했으니 둘 다 100살을 넘긴 장수 브랜드다. 양사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디오, TV, 인터넷 등 매체를 넘나들며 살벌한 광고 경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스포츠 마케팅, 비교광고, 감성 마케팅 같은 새 광고기법을 선구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 펩시 인수기회 2번 놓쳐
콜라를 대중화한 주역은 역시 코카콜라다. 코카콜라는 1886년 미국 애틀랜타주의 약사 존 펨버턴(1831~1888)이 처음 만들었다. 그는 지역신문에 게재한 최초의 광고에서 자신의 제품을 이렇게 소개했다. “향긋하고 시원해 마음을 유쾌하게 하며 기운이 넘치게 합니다! 이 탄산음료에는 신비한 코카잎과 유명한 콜라 열매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한 잔에 5센트라는 가격으로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음료라는 점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더구나 당시 이 지역에선 금주법이 통과된 직후였기 때문에 강장제나 흥분제로도 쓰이는 코카잎 성분을 담은 코카콜라는 술의 대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1890년대 초반 음료시장에 수많은 유사품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초창기 약국에서 원액과 탄산수를 직접 섞어 만드는 방식으로 판매하던 코카콜라는 지역별로 보틀러(병입 제조업자)와 계약을 맺고 대량 생산하는 협업 체제를 구축한 뒤 빠르게 성장했다.
펩시콜라를 만든 사람도 약사다. 189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약국을 하던 칼랩 브래드햄(1867~1934)은 콜라 열매와 바닐라 등을 원료로 소화불량 치료약의 일종인 ‘브래드의 음료’를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펩시콜라라는 이름도 소화효소의 일종인 ‘펩신’에서 따온 것이다. 코카콜라보다 12년 늦게 등장한 펩시콜라는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국 25개 주에 보틀링 공장을 두는 등 시장에 안착하는 듯했다. 하지만 1920년 선물계약을 통해 고가에 매입한 설탕 현물시세가 폭락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보고 도산 위기에 처했다. 브래드햄은 1922년 코카콜라에 인수를 제안했지만, 코카콜라는 빈사상태인 이 매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23년 파산한 펩시콜라는 다른 투자자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1931년 또다시 코카콜라에 매각을 제의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던 펩시콜라는 ‘반값 작전’을 들고 나왔다. 1934년 12온스들이 펩시를 6온스짜리 코카콜라와 같은 가격인 5센트에 판 것이다. 이 같은 마케팅은 소비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내 펩시콜라 점유율을 단숨에 14%로 끌어올렸다. 당시 코카콜라 점유율은 46% 수준으로 압도적이었지만 펩시는 2위 사업자로 자리매김하는 모멘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 경쟁과 모방의 연속
코카콜라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해외에 참전한 미군에 콜라를 독점 공급하면서 펩시콜라를 다시 멀찌감치 따돌린다. 코카콜라는 참전 군인들이 플라시보 효과를 경험할 정도로 ‘성수’ 대접을 받으며 브랜드 파워를 강화해갔다. 코카콜라 마개가 전쟁의 기념품처럼 소장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두 회사는 해외 시장 개척에 본격적으로 주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50년대 코카콜라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펩시콜라를 5 대 1의 차이로 앞섰다. 해외 진출도 코카콜라가 주도하고, 펩시콜라는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이때부터 펩시콜라는 ‘저렴한 음료’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한다. 설탕 성분을 줄여 코카콜라같이 자극적인 맛에 접근시키는 한편 젊고 경쾌한 이미지의 광고를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타도! 코카콜라”를 외치면서도 생산 공정과 조직 관리에 있어 상대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모방했다.
또 젊은 소비자를 ‘펩시 세대’로 규정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나 펩시 자동판매기를 끌어올리는 헬리콥터 등을 광고에 등장시켰다. 다소 소란스럽지만 감성적인 광고였다. 펩시는 이런 노력들을 통해 코카콜라와의 세계 시장점유율 격차를 종전 5배에서 3배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코카콜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노화되는 데 위기감을 느끼고 반격에 나섰다. 펩시콜라로부터 “우리를 따라하는 거냐”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1955년 26온스짜리 ‘킹 사이즈’ 제품을 내놨고, 펩시의 각종 시장조사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 분석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거치면서 탄산음료시장의 파이도 덩달아 커졌다. 1965년 미국인 1인당 탄산음료 소비량은 연간 260병까지 올랐다.
* 펩시의 반격, 코카콜라의 실책
펩시콜라의 결정적 한방은 블라인드 테스트 방식을 도입한 비교광고인 ‘펩시 챌린지’였다. 1973년 이 회사는 이른바 ‘코크 신봉자’라 불리는 코카콜라의 열성 소비자들을 모아 눈을 가린 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맛보게 했다. 참가자 중 상당수는 “펩시가 더 맛있다”고 손을 들었고, 펩시콜라는 이 장면을 그대로 TV 광고에 내보냈다. 지금은 비교광고가 많이 확산됐지만 당시엔 상당히 낯선 기법이었다. 펩시 챌린지 캠페인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국 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위협을 느낀 코카콜라는 1980년대 들어 ‘다이어트 코크’와 같은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며 응수했다. 이 과정에서 실책도 있었다. 기존 제품을 단종하고 1985년 출시한 ‘뉴 코크’는 400만달러 이상이 투입된 야심작이었지만 기존 소비자들로부터 “맛없다”는 혹평만 들었다. 회사 측은 두 달 반 뒤에 기존 제품 판매 재개 결정을 내린다. 그러자 판매량은 금세 예전 수준을 회복했고, 뉴 코크 개발비를 뛰어넘는 수준의 광고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받았다.
* 아직 끝나지 않은 경쟁
‘만년 2인자’ 펩시는 탄산음료 비중을 낮추고 과일주스나 시리얼 등 건강 음료를 강화하는 전략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건강에 좋지 않은 탄산음료를 기피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2004년 펩시코의 전체 매출은 292억달러로 코카콜라컴퍼니(219억달러)를 처음 앞질렀다. 2005년부터는 시가총액과 순이익도 코카콜라를 넘어섰다. 하지만 펩시콜라가 시야를 넓히는 동안 음료시장 내에서 코카콜라의 아성은 훨씬 더 견고해졌다. 올해 인터브랜드가 평가한 코카콜라의 브랜드가치는 719억달러로, 전 세계 모든 브랜드 가운데 1위다. 펩시(146억달러)는 음료브랜드 가운데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전체로는 22위에 그쳤다.
한편 코카콜라는 전체 매출에서 탄산음료 비중이 높은 자사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건강한 이미지의 후속 브랜드도 육성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펩시콜라 또한 올 여름에도 코카콜라를 상징하는 광고 소재인 북극곰과 산타클로스를 광고에 등장시켜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내보내며 코카콜라를 자극했다. 최근엔 코카콜라가 북한에 공장을 세우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언젠가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콜라 전쟁의 마지막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북한에서 경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
끈질긴 2인자 펩시
1934년 '반값' 제품으로 히트
'블라인드 테스트' 젊은층 어필 콜라는 성분만 놓고 보면 99%의 설탕물과 1%의 ‘비밀성분’을 섞은 음료에 불과하지만 그 이상의 문화적 의미를 지닌 상품이다. 미국에서 탄생해 자유무역의 확산과 더불어 세계로 뻗어나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도 통한다. 세계 콜라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코카콜라컴퍼니와 펩시콜라는 기업 간 경쟁의 역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례다. 코카콜라는 1886년, 펩시콜라는 1898년 탄생했으니 둘 다 100살을 넘긴 장수 브랜드다. 양사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라디오, TV, 인터넷 등 매체를 넘나들며 살벌한 광고 경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스포츠 마케팅, 비교광고, 감성 마케팅 같은 새 광고기법을 선구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 펩시 인수기회 2번 놓쳐
콜라를 대중화한 주역은 역시 코카콜라다. 코카콜라는 1886년 미국 애틀랜타주의 약사 존 펨버턴(1831~1888)이 처음 만들었다. 그는 지역신문에 게재한 최초의 광고에서 자신의 제품을 이렇게 소개했다. “향긋하고 시원해 마음을 유쾌하게 하며 기운이 넘치게 합니다! 이 탄산음료에는 신비한 코카잎과 유명한 콜라 열매 성분이 들어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한 잔에 5센트라는 가격으로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음료라는 점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더구나 당시 이 지역에선 금주법이 통과된 직후였기 때문에 강장제나 흥분제로도 쓰이는 코카잎 성분을 담은 코카콜라는 술의 대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1890년대 초반 음료시장에 수많은 유사품이 생겨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초창기 약국에서 원액과 탄산수를 직접 섞어 만드는 방식으로 판매하던 코카콜라는 지역별로 보틀러(병입 제조업자)와 계약을 맺고 대량 생산하는 협업 체제를 구축한 뒤 빠르게 성장했다.
펩시콜라를 만든 사람도 약사다. 189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약국을 하던 칼랩 브래드햄(1867~1934)은 콜라 열매와 바닐라 등을 원료로 소화불량 치료약의 일종인 ‘브래드의 음료’를 제조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펩시콜라라는 이름도 소화효소의 일종인 ‘펩신’에서 따온 것이다. 코카콜라보다 12년 늦게 등장한 펩시콜라는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국 25개 주에 보틀링 공장을 두는 등 시장에 안착하는 듯했다. 하지만 1920년 선물계약을 통해 고가에 매입한 설탕 현물시세가 폭락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보고 도산 위기에 처했다. 브래드햄은 1922년 코카콜라에 인수를 제안했지만, 코카콜라는 빈사상태인 이 매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1923년 파산한 펩시콜라는 다른 투자자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1931년 또다시 코카콜라에 매각을 제의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던 펩시콜라는 ‘반값 작전’을 들고 나왔다. 1934년 12온스들이 펩시를 6온스짜리 코카콜라와 같은 가격인 5센트에 판 것이다. 이 같은 마케팅은 소비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내 펩시콜라 점유율을 단숨에 14%로 끌어올렸다. 당시 코카콜라 점유율은 46% 수준으로 압도적이었지만 펩시는 2위 사업자로 자리매김하는 모멘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 경쟁과 모방의 연속
코카콜라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해외에 참전한 미군에 콜라를 독점 공급하면서 펩시콜라를 다시 멀찌감치 따돌린다. 코카콜라는 참전 군인들이 플라시보 효과를 경험할 정도로 ‘성수’ 대접을 받으며 브랜드 파워를 강화해갔다. 코카콜라 마개가 전쟁의 기념품처럼 소장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두 회사는 해외 시장 개척에 본격적으로 주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50년대 코카콜라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펩시콜라를 5 대 1의 차이로 앞섰다. 해외 진출도 코카콜라가 주도하고, 펩시콜라는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이때부터 펩시콜라는 ‘저렴한 음료’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한다. 설탕 성분을 줄여 코카콜라같이 자극적인 맛에 접근시키는 한편 젊고 경쾌한 이미지의 광고를 집중적으로 내보냈다. “타도! 코카콜라”를 외치면서도 생산 공정과 조직 관리에 있어 상대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모방했다.
또 젊은 소비자를 ‘펩시 세대’로 규정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나 펩시 자동판매기를 끌어올리는 헬리콥터 등을 광고에 등장시켰다. 다소 소란스럽지만 감성적인 광고였다. 펩시는 이런 노력들을 통해 코카콜라와의 세계 시장점유율 격차를 종전 5배에서 3배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코카콜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노화되는 데 위기감을 느끼고 반격에 나섰다. 펩시콜라로부터 “우리를 따라하는 거냐”는 조롱을 들으면서도, 1955년 26온스짜리 ‘킹 사이즈’ 제품을 내놨고, 펩시의 각종 시장조사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 분석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마케팅 경쟁을 거치면서 탄산음료시장의 파이도 덩달아 커졌다. 1965년 미국인 1인당 탄산음료 소비량은 연간 260병까지 올랐다.
* 펩시의 반격, 코카콜라의 실책
펩시콜라의 결정적 한방은 블라인드 테스트 방식을 도입한 비교광고인 ‘펩시 챌린지’였다. 1973년 이 회사는 이른바 ‘코크 신봉자’라 불리는 코카콜라의 열성 소비자들을 모아 눈을 가린 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맛보게 했다. 참가자 중 상당수는 “펩시가 더 맛있다”고 손을 들었고, 펩시콜라는 이 장면을 그대로 TV 광고에 내보냈다. 지금은 비교광고가 많이 확산됐지만 당시엔 상당히 낯선 기법이었다. 펩시 챌린지 캠페인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국 내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위협을 느낀 코카콜라는 1980년대 들어 ‘다이어트 코크’와 같은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며 응수했다. 이 과정에서 실책도 있었다. 기존 제품을 단종하고 1985년 출시한 ‘뉴 코크’는 400만달러 이상이 투입된 야심작이었지만 기존 소비자들로부터 “맛없다”는 혹평만 들었다. 회사 측은 두 달 반 뒤에 기존 제품 판매 재개 결정을 내린다. 그러자 판매량은 금세 예전 수준을 회복했고, 뉴 코크 개발비를 뛰어넘는 수준의 광고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받았다.
* 아직 끝나지 않은 경쟁
‘만년 2인자’ 펩시는 탄산음료 비중을 낮추고 과일주스나 시리얼 등 건강 음료를 강화하는 전략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건강에 좋지 않은 탄산음료를 기피하는 소비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감안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2004년 펩시코의 전체 매출은 292억달러로 코카콜라컴퍼니(219억달러)를 처음 앞질렀다. 2005년부터는 시가총액과 순이익도 코카콜라를 넘어섰다. 하지만 펩시콜라가 시야를 넓히는 동안 음료시장 내에서 코카콜라의 아성은 훨씬 더 견고해졌다. 올해 인터브랜드가 평가한 코카콜라의 브랜드가치는 719억달러로, 전 세계 모든 브랜드 가운데 1위다. 펩시(146억달러)는 음료브랜드 가운데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전체로는 22위에 그쳤다.
한편 코카콜라는 전체 매출에서 탄산음료 비중이 높은 자사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건강한 이미지의 후속 브랜드도 육성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펩시콜라 또한 올 여름에도 코카콜라를 상징하는 광고 소재인 북극곰과 산타클로스를 광고에 등장시켜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내보내며 코카콜라를 자극했다. 최근엔 코카콜라가 북한에 공장을 세우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언젠가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가 ‘콜라 전쟁의 마지막 무풍지대’로 남아 있는 북한에서 경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