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생글생글 318호에서 서울대 정시 논술 문제 중에서 창의성이 발휘되는 영역은 기껏해야 20%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3번 문제가 바로 그 문제입니다. 하지만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말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는 빈 종이(tabula rasa) 위에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변별 장치를 두지 않은 상태로 자기 생각을 적게 한다면, 잘 쓰고 못 쓰고를 가려내는 일은 채점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3번 문제의 논제는 고작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어보지요. “좋은 음악이 뭐지?” 사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멜로디 라인이 좋아서, 어떤 사람은 가사가 좋아서, 어떤 사람은 어떤 기억과 관련돼서 등등. 이처럼 무한히 나열될 수 있는 내용을 적게 한다면 문제의 존재 의미가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조건이 또 붙어있습니다. ‘단, 제시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악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포함시킬 것’.
이 조건은, 최소한 제시문의 내용을 정확히 독해를 한 후, 즉 좋은 음악에 대한 제한된 보기를 준 후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를 거부해도 상관이 없지요. 자신만의 대답을 구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찌됐든 그 전에 정확하게 인식과 태도를 규정해줌으로써 변별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창의적인 문제는 아닌 셈이지요. 자, 그렇다면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음악은 음악으로만 평가받는가?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낯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창작자에 대한 배경지식을 얻는 것이지요. 왜 이런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어떠한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등등을 살펴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너무나 흔하게 접하는 애국가를 생각해보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윤치호(尹致昊·1864~1945)의 작품입니다. 윤치호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를 구사했던 구한말의 대표적 근대 지식인이자, 최초의 영어 전문 통역자이자, 독립협회 2대 회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친일파 딱지가 붙어있는 인물이지요. 식민지 말기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거든요. 물론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습니다. 여기에는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도 등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애국가를 교체하자는 운동까지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애국가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이 느리고 장중한 곡에서 ‘매국적인 느낌’ 혹은 ‘친일적인 느낌’이 풍기나요? 제시문 1의 정경패는 아마도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형식미와 상관없이, 그것에 관련된 -특히 작곡자- 외재적 요소들이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친일’이냐 ‘협력’이냐를 두고 최근 새로운 연구들이 속속 책으로 나오고 있으니, 이를 눈여겨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윤치호는 60년 동안 영어일기를 씁니다. 일기이니만큼, 솔직한 속내도 다 털어놓고 있지요.) 정경패는 <예상우의곡>이니 <호가십팔박>이니 하는 고전곡들에 대해 곡은 아름다우나, 곡들이 나라를 망쳤거나 혹은 작곡자가 절개를 잃었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습니다. 반면 <의란조>나 <남훈곡>에 대해서는 유교적 이치를 드높이는 곡이라는 이유로 반색을 하지요.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형식미보다는 곡의 성립 과정이 도덕적이냐, 좀 더 정확히는 유교적 질서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음악이 도덕(윤리)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술이란 거죽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용납될 수 있을까요? ‘외설이냐 예술이냐’는 흔한 토론 주제도 생각나는군요.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라? 그렇다면, 가사는 음악의 외재적 요소인가?’라고 말이지요.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려고 했더니, 정경패는 음악이 도덕적이어야 한답니다. 음악이 도덕적이란 말은 아마도 작곡자가 도덕적이거나, 내용이 도덕적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대답을 해야 하는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음악에 있어, 내용이 도덕적이란 것은 가사가 도덕적이란 말이고요. 그렇다면 가사는 외재적 요소인가요? 이 부분은 글을 쓰는 학생의 입장에서 혼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재적’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낫겠지요. 그냥 음악을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하려는 시도에 대해 가부를 놓고 따지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제시문 2에는 태도가 대립되고 있는데, 제시문 1에서는 따로 대립이 없을까요? 가령 양소유의 음악에 대한 태도까지 같이 언급하면 안될까요? 물론 양소유는 음악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정경패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자’ 류의 주장을 꺼낼 수도 있겠지요. 혹은 양소유의 음악관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논제, 즉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음악이 무엇이냐를 가리는 일과, 음악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느냐는 분명 별개의 질문이니까요.
▨ 대중음악과 고급음악, 그 지루한 논쟁
제시문 2는 꽤나 닳고 닳은 그 이야기입니다. 중학생용 독서 논술이라도 몇 번 해보았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제시문2의 서상수 공은 ‘나의 해금 음악’에 대해 비렁뱅이의 깡깡이라고 비하합니다. 그리고는 음악에 대해 일장연설을 합니다. 음악이란 어떻게 분류되고, 이 분야에서는 누가 제일이고, 저 분야에서는 누구를 알아주고. 그런 식의 분류에 따라 이들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음악은 모두 저열한 음악으로 치부됩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고, 누구나 쉽게 연주하는 그런 음악은 시장 바닥에 차고 넘치는 비렁뱅이의 그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고급문화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 류의 음악과 달리 체계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유우춘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우춘은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여 기예를 늘렸지만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렁뱅이의 몇 달짜리 해금솜씨를 좋아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 대해 이렇게 일갈합니다. 왜 인기도 없는 고급음악을 하려고 하냐고, 쉽게 익힐 수 있고 인기도 좋은 대중음악을 하라고 말이지요.
간단하게 정리됩니다.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를 놓고 비교해보죠. 클래식 음악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축적돼온 기술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곡들 또한 그렇습니다. 대개 우리가 접하는 클래식곡이란 몇 백년 전 작품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곡들을 연주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일정한 체계에 맞춰 연습해야 합니다. 많은 정통 클래식 연주자들이 그러했듯 말이지요. 반면 대중가요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노래 잘하는 가수만 가수가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뛰어난 실력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들어줄 만한 정도의 수준’만 갖고 있더라도 대중가요는 충분히 인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기예가 아니라, ‘대중성’이거든요. (다른 말로 ‘상업성’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논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더 유용하니까요.)
물론 서울대를 응시했던 많은 학생들은 대중음악에 손을 들어주었지요. 그 음악들을 통해 삶의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덜고, 희망을 얻었던 개인적 경험을 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입니다. 클래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대중음악이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쉽게 접근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비슷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not a but b중 but b에만 해당되는 내용이지요. 즉 하나를 선택하여 주장하려면 최소한 상대방의 주장을 무너뜨리는 행위 자체가 필요합니다. 처음엔 균형을 맞춰 서로의 장점을 모두 서술해주더라도 하나의 결론이 도출돼야 하니까요. 그때는 ‘내가 더 좋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너는 별로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 두 내용을 다 쓰면 더 ‘나은(better)’ 것이고요.
예를 들어 이런 내용을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고급음악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대중음악이다”고 말이지요. 고급음악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성 없이 생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옛날처럼 클래식 음악을 후원해주는 귀족들이 없기 때문에 클래식 연주자들도 ‘인기’를 고려해야 합니다. 클래식 연주 기술을 익히기 위해 투자한 재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상관없이 프로페셔널한 연주자라면 대중들에게 돈을 받고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말을 유우춘도 합니다. 세상 모든 소리는 그 뜻이 먹는 것을 구하는 데 있다고 말이지요.
이용준 S·논술 선임 연구원 sgsgnote@gmail.com
3번 문제의 논제는 고작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어보지요. “좋은 음악이 뭐지?” 사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멜로디 라인이 좋아서, 어떤 사람은 가사가 좋아서, 어떤 사람은 어떤 기억과 관련돼서 등등. 이처럼 무한히 나열될 수 있는 내용을 적게 한다면 문제의 존재 의미가 없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조건이 또 붙어있습니다. ‘단, 제시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음악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포함시킬 것’.
이 조건은, 최소한 제시문의 내용을 정확히 독해를 한 후, 즉 좋은 음악에 대한 제한된 보기를 준 후 하나를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를 거부해도 상관이 없지요. 자신만의 대답을 구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찌됐든 그 전에 정확하게 인식과 태도를 규정해줌으로써 변별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창의적인 문제는 아닌 셈이지요. 자, 그렇다면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음악은 음악으로만 평가받는가?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낯선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창작자에 대한 배경지식을 얻는 것이지요. 왜 이런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어떠한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 등등을 살펴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가 너무나 흔하게 접하는 애국가를 생각해보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가사는 윤치호(尹致昊·1864~1945)의 작품입니다. 윤치호는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를 구사했던 구한말의 대표적 근대 지식인이자, 최초의 영어 전문 통역자이자, 독립협회 2대 회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친일파 딱지가 붙어있는 인물이지요. 식민지 말기에 이르러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거든요. 물론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습니다. 여기에는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도 등재돼 있습니다. 그래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애국가를 교체하자는 운동까지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애국가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이 느리고 장중한 곡에서 ‘매국적인 느낌’ 혹은 ‘친일적인 느낌’이 풍기나요? 제시문 1의 정경패는 아마도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음악이 가지고 있는 형식미와 상관없이, 그것에 관련된 -특히 작곡자- 외재적 요소들이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친일’이냐 ‘협력’이냐를 두고 최근 새로운 연구들이 속속 책으로 나오고 있으니, 이를 눈여겨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윤치호는 60년 동안 영어일기를 씁니다. 일기이니만큼, 솔직한 속내도 다 털어놓고 있지요.) 정경패는 <예상우의곡>이니 <호가십팔박>이니 하는 고전곡들에 대해 곡은 아름다우나, 곡들이 나라를 망쳤거나 혹은 작곡자가 절개를 잃었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습니다. 반면 <의란조>나 <남훈곡>에 대해서는 유교적 이치를 드높이는 곡이라는 이유로 반색을 하지요. 음악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형식미보다는 곡의 성립 과정이 도덕적이냐, 좀 더 정확히는 유교적 질서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놓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음악이 도덕(윤리)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술이란 거죽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용납될 수 있을까요? ‘외설이냐 예술이냐’는 흔한 토론 주제도 생각나는군요.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라? 그렇다면, 가사는 음악의 외재적 요소인가?’라고 말이지요.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려고 했더니, 정경패는 음악이 도덕적이어야 한답니다. 음악이 도덕적이란 말은 아마도 작곡자가 도덕적이거나, 내용이 도덕적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대답을 해야 하는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음악에 있어, 내용이 도덕적이란 것은 가사가 도덕적이란 말이고요. 그렇다면 가사는 외재적 요소인가요? 이 부분은 글을 쓰는 학생의 입장에서 혼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재적’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이 낫겠지요. 그냥 음악을 도덕적인 잣대로 평가하려는 시도에 대해 가부를 놓고 따지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제시문 2에는 태도가 대립되고 있는데, 제시문 1에서는 따로 대립이 없을까요? 가령 양소유의 음악에 대한 태도까지 같이 언급하면 안될까요? 물론 양소유는 음악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정경패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자’ 류의 주장을 꺼낼 수도 있겠지요. 혹은 양소유의 음악관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논제, 즉 좋은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좋은 음악이 무엇이냐를 가리는 일과, 음악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느냐는 분명 별개의 질문이니까요.
▨ 대중음악과 고급음악, 그 지루한 논쟁
제시문 2는 꽤나 닳고 닳은 그 이야기입니다. 중학생용 독서 논술이라도 몇 번 해보았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제시문2의 서상수 공은 ‘나의 해금 음악’에 대해 비렁뱅이의 깡깡이라고 비하합니다. 그리고는 음악에 대해 일장연설을 합니다. 음악이란 어떻게 분류되고, 이 분야에서는 누가 제일이고, 저 분야에서는 누구를 알아주고. 그런 식의 분류에 따라 이들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음악은 모두 저열한 음악으로 치부됩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고, 누구나 쉽게 연주하는 그런 음악은 시장 바닥에 차고 넘치는 비렁뱅이의 그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고급문화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 류의 음악과 달리 체계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유우춘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우춘은 손가락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여 기예를 늘렸지만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렁뱅이의 몇 달짜리 해금솜씨를 좋아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 대해 이렇게 일갈합니다. 왜 인기도 없는 고급음악을 하려고 하냐고, 쉽게 익힐 수 있고 인기도 좋은 대중음악을 하라고 말이지요.
간단하게 정리됩니다. 클래식 음악과 대중가요를 놓고 비교해보죠. 클래식 음악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축적돼온 기술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곡들 또한 그렇습니다. 대개 우리가 접하는 클래식곡이란 몇 백년 전 작품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곡들을 연주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일정한 체계에 맞춰 연습해야 합니다. 많은 정통 클래식 연주자들이 그러했듯 말이지요. 반면 대중가요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노래 잘하는 가수만 가수가 아닌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뛰어난 실력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들어줄 만한 정도의 수준’만 갖고 있더라도 대중가요는 충분히 인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기예가 아니라, ‘대중성’이거든요. (다른 말로 ‘상업성’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논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가 더 유용하니까요.)
물론 서울대를 응시했던 많은 학생들은 대중음악에 손을 들어주었지요. 그 음악들을 통해 삶의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덜고, 희망을 얻었던 개인적 경험을 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입니다. 클래식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대중음악이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쉽게 접근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비슷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not a but b중 but b에만 해당되는 내용이지요. 즉 하나를 선택하여 주장하려면 최소한 상대방의 주장을 무너뜨리는 행위 자체가 필요합니다. 처음엔 균형을 맞춰 서로의 장점을 모두 서술해주더라도 하나의 결론이 도출돼야 하니까요. 그때는 ‘내가 더 좋다’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너는 별로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 두 내용을 다 쓰면 더 ‘나은(better)’ 것이고요.
예를 들어 이런 내용을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고급음악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대중음악이다”고 말이지요. 고급음악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성 없이 생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 옛날처럼 클래식 음악을 후원해주는 귀족들이 없기 때문에 클래식 연주자들도 ‘인기’를 고려해야 합니다. 클래식 연주 기술을 익히기 위해 투자한 재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상관없이 프로페셔널한 연주자라면 대중들에게 돈을 받고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말을 유우춘도 합니다. 세상 모든 소리는 그 뜻이 먹는 것을 구하는 데 있다고 말이지요.
이용준 S·논술 선임 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