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경제의 만남] (40) '레 미제라블'과 넛지
“다시 만나게 돼서 다행이오. 어떻게 된 거요? 나는 당신에게 촛대도 드렸는데.

그것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은이니까 2백프랑은 넉넉히 받을 수 있을 거요.

어째서 그 그릇하고 함께 가져가지 않으셨소?” 장 발장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 거룩한 주교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중략)… 주교는 그에게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잊지 마시오. 절대로 잊지 마시오. 이 은그릇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쓰겠노라고 내게 약속해준 일을 말이오.”

1795년 26살의 청년 장 발장(Jean Valjean)은 7명의 어린 조카들을 위해 파브롤 성당 앞 광장에 있는 빵집의 유리 진열장을 깬다.

피가 흐르는 팔로 빵 하나를 움켜쥐고 달아나던 그는 빵집 주인에게 잡혀 재판소로 넘겨진다. 장 발장이 훔친 빵 한 조각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장 발장은 5년형을 선고받았고, 4번의 탈옥 기도로 인해 도합 19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긴 세월 복역을 마치고 석방된 장 발장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디뉴(Digne)에 들러 숙박할 곳을 찾지만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가는 곳마다 거절을 당한다.

형무소와 개집에서도 쫓겨난 장 발장의 처지는 참으로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차디찬 돌 벤치 위에서 노숙을 하려던 순간 어느 노부인의 추천을 받고 찾아간 집에서 장 발장은 미리엘(Myriel) 주교의 따뜻한 환대를 받게 된다.

그러나 감옥에서 악습에 물든 장 발장은 그날 밤 주교의 은식기를 훔쳐 도망치고, 다음 날 헌병들에게 체포돼 미리엘 주교의 집으로 돌아온다.

주교의 은식기를 훔친 일은 청년 시절 빵을 훔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장 발장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미리엘 주교는 헌병들에게 멱살을 잡혀 축 늘어져 있는 장 발장에게 다가가 왜 은촛대도 같이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물은 후 은촛대까지 내어준다.

그리고 주교는 은그릇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 데 쓰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한 일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꿈에도 약속을 한 기억이 없는 장 발장은 처음에는 주교의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주교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정직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한다.

이후 이름을 마들렌으로 바꾸고 북부 프랑스로 건너간 장 발장은 몽트뢰유 쉬르 메르(Montreuil-sur-Mer)에서 새로운 검은 구슬 제조법을 고안해 내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둔다.

그가 여러 선행으로 사람들의 신망까지 얻고, 시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자 국왕은 마들렌을 시장으로 임명한다.

이상의 이야기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전반부 줄거리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리엘 주교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장 발장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 그가 시장이 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장 발장의 갱생은 어떤 강압이나 끈질긴 호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주교는 은식기를 훔쳐간 장 발장을 용서해주고, 은촛대를 얹어주면서 자신과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말했을 뿐이다.

2008년 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미 시카고대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Richard H. Thaler)와 법률가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이 공저한 《넛지(Nudge)》란 책을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바 있는데, 미리엘 주교의 방식은 이 책의 주제와 연관성이 높다. 책의 제목인 ‘nudge’는 원래 ‘(특히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뜻의 영단어다.

탈러와 선스타인은 책에서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금지와 명령이 아닌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는 듯한 부드러운 권유로 타인의 바른 선택을 돕는 것이 넛지인 것이다.

넛지는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지만 유연하고 비강제적으로 접근하여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tarian paternalism)에 바탕하고 있다. 명령이나 지시가 있다면 그것은 넛지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급식을 하는 식당에서 몸에 좋은 과일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놓는 것은 넛지라고 할 수 있지만 정크푸드를 먹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은 넛지에 해당하지 않는다.

넛지는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넛지가 필요한 이유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 하더라도 이에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면 넛지는 구태여 실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넛지가 주목받는 이유는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넛지의 대표적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공공건물의 남자화장실은 통상 변기 밖으로 튀는 소변으로 더러워지게 마련이다.

감시나 벌금 등의 방법을 통해 이용자들에게 주의를 줄 수도 있겠지만, 현명한 해결책이라 보기는 힘들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스키폴 공항은 넛지를 활용해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그 해법이 아주 단순하다.

스키폴 공항은 경제학자 아드 키붐(Aad Kieboom)의 아이디어를 반영해 화장실 소변기 중앙에 검정색 파리를 그려놓았고, 남성들이 이를 조준하다 보니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이 80%나 감소했다고 한다.

사소한 변화 하나가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탈러와 선스타인은 넛지가 공공정책이나 법률제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는 실제로 넛지를 활용한 정책들이 수용된 바 있다.

작은 변화를 통해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세밀한 계산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선택 설계자’(choice architect)들의 아이디어로 인해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각 분야에서 적극 고려될 필요가 있다.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에서 장 발장은 친딸처럼 키운 코제트와 그녀의 남편 마리우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데, 임종을 맞는 그의 머리맡에는 미리엘 주교가 선물한 은촛대가 놓여 있었다.

은촛대의 불빛과 같은 넛지야말로 21세기 민주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현명한 정책 방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김훈민 KDI 경제정보센터 연구원 hmkim@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