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농업 덕에 풍요?… 오히려 대기근 불렀다
경작지 늘어도 地力약해져 1인 생산 급감
'죽음의 공포' 지나자 다시 풍요의 시간이
과거에는 음식이 풍족하던 시기보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가 훨씬 많았다.
인류의 역사는 차라리 기근의 연속에 가까웠다.
보나시라는 중세사 연구자에 의하면 750년부터 1100년 사이에 유럽 대륙 전체에 기근이 들었던 시기가 29차례라고 하니,대략 12년마다 한 번꼴로 대기근을 겪었던 셈이다.
유럽 문헌 가운데 가장 처참한 기근 기록으로 알려진 라울 글라베르의 연대기는 1032~1033년의 참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가축과 가금류를 다 잡아먹고 난 후 사람들은 끔찍한 배고픔에 사로잡혀 어떤 더러운 것들도 다 먹어치웠다. 어떤 이들은 나무뿌리와 수초를 먹어 죽음을 면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의 분노를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 시기에 오 불행이여,기아의 광증은 인육을 먹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던 일이다. 여행자들은 그들보다 힘센 사람들에게 잡혀서 몸이 절단돼 불에 구워졌다.
아사를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은 잠잘 곳을 마련했다고 생각한 곳에서 밤에 맞아 죽어 그곳 주인의 배를 채우는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과일이나 계란으로 아이들을 으슥한 곳으로 꼬여서 죽인 다음 먹어버렸다. 도처에서 시체를 파내어 요기를 했다.
마치 식인 풍습이 정상적인 관습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시장에 인육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
그 사람은 체포된 뒤에도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를 땅에 묻었더니 다른 사람이 파서 먹었다. 그 사람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
당시의 다른 기록들에도 기아,영양부족,질병,전염병 기사들이 넘쳐난다.
1066년부터 1072년까지 브레멘에 기근이 극심해져 '많은 빈민들이 광장에서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1083년에도 '많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1094년에는 독일 주교들이 마인츠 종교회의에서 돌아오다가 '암베르크의 교회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마룻바닥을 가득 덮고 있는 시체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 유독 11세기에 이렇게 기근이 심했을까.
역설적이게도 이때가 경제적 팽창이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회가 안정을 찾고 새로운 농업 체제가 확립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이런 시기에 오히려 간헐적으로 파국이 찾아온다.
당시의 농업 성장은 인구 증가를 가능케 했지만 사실 그 성장은 내부적으로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개간을 통해 경작지를 늘렸지만 그런 곳은 지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농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면 전체적인 농업 생산은 늘어나지만 1인당 생산은 줄어든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기후가 다소라도 불순하면 농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고,그로 인해 발생한 식량 부족 사태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는 잉여 인구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이처럼 주기적인 참사를 겪으면서도 12~13세기에 농업 생산과 인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했지만 이런 취약한 성장은 장기적으로 역전을 피할 수 없다.
1270년께 유럽의 경제 성장이 정지했고,14세기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후퇴 양상을 보였다.
다시 과거와 같은 참상이 벌어졌다. 여러 차례 심각한 기근을 거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영양결핍과 허약증을 겪게 되었다.
1347년 이후 유럽 대륙을 강타해 인구 4분의 1~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페스트의 창궐은 우연이 아니라 흉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인구가 격감하면서 유럽 사회는 멸망의 위기에 빠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번에는 팽창기의 시작 단계와는 반대 방향의 힘이 작용한다.
즉 전체 생산은 감소하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 지력이 좋지 않았던 한계지(限界地)를 버리고 지력이 좋은 땅에 집약적으로 노동을 투입하면 1인당 생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그것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면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어느 때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페스트가 지나간 1388년에 피아첸차 시는 풍요의 도시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운 성찬을 즐기고 있다. 특히 결혼 피로연에서 이 현상이 더욱 심하다.
만찬은 우선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무엇보다도 설탕 과자로 시작한다.
첫 번째 코스로 테이블마다 한두 마리의 닭과 큰 고깃덩어리를 대접한다.
이것은 큰 냄비에 아몬드,설탕,여러 향신료를 넣어 조리한 것이다.
다음으로 닭,꿩,자고새,토끼,멧돼지,사슴 같은 고기가 나온다. '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육류를 먹었던 호화로운 시기다.
독일의 사례들을 연구한 빌헬름 아벨에 따르면 15세기에 1인당 연평균 육류 소비량은 100㎏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다시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영양결핍,주기적인 기근 사태로 이어진다.
오랜 기간 인류는 이처럼 인구와 식량 간의 모순 속에서 살아왔다.
인구가 늘면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것이 결국 위기를 초래한다.
그러면 인구가 감소해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결국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마치 역사의 긴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되는 장기적인 인구 증감 사이클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며,역사의 기본 구조였다.
사람들이 풍족하게 잘 먹는 것은 그 중간의 아주 운 좋은 예외적인 시기에 국한됐다.
이런 구조적 현상이 깨진 것은 현대에 와서의 일이다.
오랫동안 인간의 육체는 일상적인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진화해 왔으므로 요즘 같은 영양 과잉 상태에 대해 우리 몸은 채 대비가 돼 있지 않다.
비만이 문제가 된 것은 그야말로 최근이며,이런 상황은 역사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경작지 늘어도 地力약해져 1인 생산 급감
'죽음의 공포' 지나자 다시 풍요의 시간이
과거에는 음식이 풍족하던 시기보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가 훨씬 많았다.
인류의 역사는 차라리 기근의 연속에 가까웠다.
보나시라는 중세사 연구자에 의하면 750년부터 1100년 사이에 유럽 대륙 전체에 기근이 들었던 시기가 29차례라고 하니,대략 12년마다 한 번꼴로 대기근을 겪었던 셈이다.
유럽 문헌 가운데 가장 처참한 기근 기록으로 알려진 라울 글라베르의 연대기는 1032~1033년의 참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가축과 가금류를 다 잡아먹고 난 후 사람들은 끔찍한 배고픔에 사로잡혀 어떤 더러운 것들도 다 먹어치웠다. 어떤 이들은 나무뿌리와 수초를 먹어 죽음을 면해 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의 분노를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 시기에 오 불행이여,기아의 광증은 인육을 먹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그 이전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던 일이다. 여행자들은 그들보다 힘센 사람들에게 잡혀서 몸이 절단돼 불에 구워졌다.
아사를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은 잠잘 곳을 마련했다고 생각한 곳에서 밤에 맞아 죽어 그곳 주인의 배를 채우는 역할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과일이나 계란으로 아이들을 으슥한 곳으로 꼬여서 죽인 다음 먹어버렸다. 도처에서 시체를 파내어 요기를 했다.
마치 식인 풍습이 정상적인 관습인 것처럼 어떤 사람은 시장에 인육을 가지고 와서 팔았다.
그 사람은 체포된 뒤에도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체를 땅에 묻었더니 다른 사람이 파서 먹었다. 그 사람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
당시의 다른 기록들에도 기아,영양부족,질병,전염병 기사들이 넘쳐난다.
1066년부터 1072년까지 브레멘에 기근이 극심해져 '많은 빈민들이 광장에서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1083년에도 '많은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1094년에는 독일 주교들이 마인츠 종교회의에서 돌아오다가 '암베르크의 교회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마룻바닥을 가득 덮고 있는 시체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 유독 11세기에 이렇게 기근이 심했을까.
역설적이게도 이때가 경제적 팽창이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회가 안정을 찾고 새로운 농업 체제가 확립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이런 시기에 오히려 간헐적으로 파국이 찾아온다.
당시의 농업 성장은 인구 증가를 가능케 했지만 사실 그 성장은 내부적으로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개간을 통해 경작지를 늘렸지만 그런 곳은 지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농사에 많은 인력을 투입하면 전체적인 농업 생산은 늘어나지만 1인당 생산은 줄어든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기후가 다소라도 불순하면 농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고,그로 인해 발생한 식량 부족 사태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는 잉여 인구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이처럼 주기적인 참사를 겪으면서도 12~13세기에 농업 생산과 인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했지만 이런 취약한 성장은 장기적으로 역전을 피할 수 없다.
1270년께 유럽의 경제 성장이 정지했고,14세기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후퇴 양상을 보였다.
다시 과거와 같은 참상이 벌어졌다. 여러 차례 심각한 기근을 거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영양결핍과 허약증을 겪게 되었다.
1347년 이후 유럽 대륙을 강타해 인구 4분의 1~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페스트의 창궐은 우연이 아니라 흉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인구가 격감하면서 유럽 사회는 멸망의 위기에 빠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번에는 팽창기의 시작 단계와는 반대 방향의 힘이 작용한다.
즉 전체 생산은 감소하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 지력이 좋지 않았던 한계지(限界地)를 버리고 지력이 좋은 땅에 집약적으로 노동을 투입하면 1인당 생산은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그것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면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어느 때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페스트가 지나간 1388년에 피아첸차 시는 풍요의 도시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운 성찬을 즐기고 있다. 특히 결혼 피로연에서 이 현상이 더욱 심하다.
만찬은 우선 적포도주와 백포도주,무엇보다도 설탕 과자로 시작한다.
첫 번째 코스로 테이블마다 한두 마리의 닭과 큰 고깃덩어리를 대접한다.
이것은 큰 냄비에 아몬드,설탕,여러 향신료를 넣어 조리한 것이다.
다음으로 닭,꿩,자고새,토끼,멧돼지,사슴 같은 고기가 나온다. '
이때는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게 육류를 먹었던 호화로운 시기다.
독일의 사례들을 연구한 빌헬름 아벨에 따르면 15세기에 1인당 연평균 육류 소비량은 100㎏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다시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영양결핍,주기적인 기근 사태로 이어진다.
오랜 기간 인류는 이처럼 인구와 식량 간의 모순 속에서 살아왔다.
인구가 늘면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것이 결국 위기를 초래한다.
그러면 인구가 감소해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결국 원래 상태로 되돌아간다.
마치 역사의 긴 들숨과 날숨처럼 반복되는 장기적인 인구 증감 사이클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며,역사의 기본 구조였다.
사람들이 풍족하게 잘 먹는 것은 그 중간의 아주 운 좋은 예외적인 시기에 국한됐다.
이런 구조적 현상이 깨진 것은 현대에 와서의 일이다.
오랫동안 인간의 육체는 일상적인 식량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진화해 왔으므로 요즘 같은 영양 과잉 상태에 대해 우리 몸은 채 대비가 돼 있지 않다.
비만이 문제가 된 것은 그야말로 최근이며,이런 상황은 역사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