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상인은 戰士였다.

중국-로마 무역로, 도적 위협 잦아 상인들도 중무장… 외교능력까지 갖춰

[경제사 뒤집어 읽기] (8)  비단길의 종점 팔미라
비단은 로마시대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도 고가품이었지만 그 먼 길을 지나 로마에 들어왔을 때는 가격이 100배나 올라 있었다.

비단은 금 가격과 같다는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금값'이었으며,몇 온스만 해도 보통사람의 1년 소득에 해당했다.

로마 황제 가운데 방탕과 사치로 악명을 떨친 엘라가발루스 황제(재위 218~222)는 100% 순견 토가를 만들어 입어 질시와 부러움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중국에서 로마까지 비단이 들어오는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후일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육로로서 사마르칸트,헤라트,이스파한 같은 중앙아시아 중개지들을 통과해 지중해 동부 연안까지 이르는 장거리 운송로였다.

다른 하나는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을 통과한 후 홍해를 거슬러 올라와 알렉산드리아까지 오는 해로였다.

두 루트가 너무 달라서 한때 로마인들은 육로로 오는 비단의 생산국은 세레스,해로로 오는 비단의 생산국은 시나에라는 서로 다른 국가라고 착각했다.

비단길의 서쪽 끝 지점에서 원거리 교역 네트워크는 로마제국과 어떻게 연결됐을까.

로마제국의 변경에 위치한 교역 도시 팔미라의 사례를 살펴보자.

오늘날 팔미라는 시리아의 사막에 폐허로 방치돼 있지만,한때는 '사막의 여왕'이라 불리는 풍요로운 오아시스 도시였다.

주변 지역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양,염소,말,낙타를 치는 유목민족이 살았다.

농사에 의존해 살기는 힘들었으므로 이 도시는 점차 주변 여러 민족 간에 생필품을 교환하는 교역도시로 성장해 갔다.

기원전 1세기께부터 상업활동이 시작됐다가 서기 1세기 이후 점차 원거리 교역으로 발전한 듯하다.

그런 발전이 이뤄진 데에는 이 무렵부터 수송 수단으로 낙타가 사용된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팔미라는 낙타 대상(隊商)을 조직해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서쪽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중개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서아시아의 파르티아 제국과 대립하고 있었는데,팔미라는 두 제국의 중간에 있었다.

이 도시는 때로 로마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가기도 했지만,대체로 중립을 표방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사실 지중해 연안과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중개지로 팔미라가 꼭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도적떼가 들끓는 위험한 사막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팍스 로마나'를 구축하면서 상황이 변해갔다.

로마 세력이 팽창하면서 이 지역의 안전이 확보됐다. 공격적인 유목민족의 위협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사업 내로 끌어들여 도시의 번화함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중국과 아시아 각지의 사치품이 팔미라까지 직접 들어오지는 않았다.

중앙아시아 상인들이 이곳에 와서 상품을 팔면 가지고 돌아갈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인도나 메소포타미아로 발길을 돌렸다.

따라서 팔미라 측에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찾아가 그곳에 들어온 상품을 가지고 와서 지중해 방향으로 전해주는 일을 한 것이다.

팔미라는 유프라테스강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팔미라의 대상들은 유프라테스강 중간의 두라 에우로포스 같은 교역 중심지를 찾아가 아시아 상품들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원정은 상당한 준비작업을 요했다.

모든 일은 대상의 총 책임자인 시노디아르크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그는 원정 사업에 자금을 출자하는 후원자를 만나 일을 시작한다.

후원자는 아마도 팔미라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으로 원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전주(錢主) 역할만 한다.

시노디아르크는 그 자본으로 수백 마리의 낙타와 말을 장만하고,동물들을 잘 다루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팔미라 주변 촌락의 유목민이 이 일을 맡아서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몇몇 부족장은 사막에 있는 자기 부족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한 채 팔미라에 거주하면서 이곳 사업자들과 계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이런 기본 준비를 하고 난 후 시노디아르크는 구체적인 여정을 짜고,물과 식량이 있는 곳을 알아보아야 한다.

또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국제관계가 늘 긴장상태에 있기 때문에 외교 교섭도 해야 하며,대개는 대상의 안전을 지켜 줄 호위대도 구성해야 한다.

유프라테스강까지 가는 길에는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므로 각별한 무장이 필요했다. 여기에는 팔미라 시민 민병대가 자주 고용됐다. 이들은 강력한 궁수로 유명했다.

현재 남은 유적지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는 원정대는 단도와 검으로 중무장하고 있어 상인이라기보다는 대초원의 기마병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 상업의 실상은 이처럼 무력과 교역이 혼합된 상태였다.

이런 사람들이 중국 비단을 로마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상품을 잔뜩 싣고 팔미라로 귀환하는 대상들은 가격표에 따라 세금을 물었다.

이 가격표가 새겨진 돌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국내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품 세율이 수출품 세율보다 높았다.

이 도시에서 소비되는 게 아니라 지중해 지역으로 계속 가기 위해 팔미라를 통과하는 상품은 면세 혜택을 누렸지만,다만 낙타 한 마리당 은화 1데나리우스를 물었다.

이런 관세와 통과세가 이 도시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번영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3세기에 로마제국이 분열되고 사산조 페르시아가 일어나 교역로를 봉쇄하면서 팔미라의 무역 활동은 종말을 맞았다.

비단교역은 또 다른 중개지를 찾아갔다.

과거 찬란했던 도시는 오늘날 사막 속에 신기루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