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잃어버린 우리말 '하제'
'감독 임권택. 주연 이덕화, 안소영. 산울림의 영화음악 데뷔작.

제25회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미성년자 입장 불가. ' 1979년 3월10일 서울 허리우드극장에 '내일 또 내일'이란 제목의 영화가 걸렸다.

내용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저 여성편력이 심한 주인공 남자가 여러 여자들을 만나며 겪는 사건을 그린 멜로 드라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하제 또 하제'라는 순우리말이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내용이 미성년자 관람 불가 등급인 데다 제목이 주는 어감마저 '하기는 뭘 자꾸 하자는지' 야하고 저속한 느낌을 주니 당시 정서에서 공연윤리 심사를 통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제작사 측은 제목을 평범한 우리말인 '내일 또 내일'로 바꾼 뒤에야 극장에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제'는 한자어 '내일(來日)'에 해당하는 잃어버린 우리 고유어이다.

우리말에서 일(日) 단위 때를 나타내는 말은 영어나 다른 한자어권 말에 비해 많은 편이다.

'어제, 오늘, 내일'을 기본으로 해서 이틀 전은 '그제(그저께)', 사흘 전은 '그끄제(그끄저께)'라고 한다.

또 이틀 뒤는 '모레', 사흘 뒤는 '글피', 나흘 뒤는 '그글피'이다.

이에 비해 영어에서는 yesterday, today, tomorrow만 단어로 있고 나머지는 구(句)로 표현해야만 한다.

가령 '그저께'는 the day before yesterday가 된다.

'그끄저께'를 말하려면 three days ago라고 하든지 two days before yesterday 식으로 해야 한다.

앞날을 나타내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모레'는 the day after tomorrow, '글피'는 two days after tomorrow 또는 three days from now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한자도 별 차이가 없다. 어제, 오늘, 내일에 해당하는 '작일(昨日), 금일(今日), 명일(明日)'이 전부이다.

그러니 '그저께'를 말하려면 재작일(再昨日), '그끄저께'는 재재작일(再再昨日) 또는 삼작일(三昨日) 식으로 말한다. '모레' 역시 再나 後를 써서 재명일(再明日) 또는 명후일(明後日)이라 한다.

글피는 삼명일(三明日)이라 한다. 한자에도 작일, 금일, 명일뿐이 없는 셈이다.

우리말에서 때를 가리키는 말이 이처럼 상대적으로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내일'만 한자어로 돼 있어 오래 전부터 많은 국어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돼 왔다.

이런 특이한 점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민족에겐 내일이 없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우리말은 있지만, 불행하게도 '내일'을 나타내는 순우리말은 없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림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마치 '한국사에는 내적 발전이 결여돼 있다'는 식민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대하는 것과도 같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우리 고유어에는 '내일'이 없는 게 아니라 다만 그 말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오히려 모레, 글피, 그글피 등 다양한 미래의 '날'을 가리키는 말들이 있다.

'내일'을 뜻하는 우리 고유어는 고려 때 문헌인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명일왈할재(明日曰轄載)'란 데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명일, 즉 내일에 해당하는 '轄載'의 발음을 학자들 간에 '하제, 올제, 후제' 등으로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림유사>를 40년 넘게 연구해온 국어학자 진태하 교수는 轄의 송나라 때 발음이 '하'였던 것에 비춰 내일의 순수 우리말이 '하제'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명일(明日)'은 내일과 같은 말이다.

이에 비해 '익일(翌日)'은 '어느 날 뒤에 오는 날'을 뜻하는 말로, 명일이나 내일과는 의미가 좀 다른 것이다.

이 말은 '다음 날' 또는 '이튿날'로 바꿔 부르는 게 좋다.

<계림유사>에는 또 '금일왈오날(今日曰烏捺)'이라는 기록이 있어 '오늘'의 유래도 찾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때부터 이미 [오날]로 쓰였고 이것은 15세기 국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국어학자 최창열 교수에 따르면 '오늘'은 '온+알'로 분석되는 말이다.

이때의 '온'은 '오다'의 관형형 '온'으로 풀이하는 게 일반적이다.

즉 시간적으로 '이미 와버린'이라는 의미를 담은 말이라는 것이다. '알'은 요즘도 쓰는 '날(日)'의 고어 형태이다.

즉 '온알>오날>오늘'로 자연스럽게 음운 변화를 일으켜 '오늘'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풀이이다.

어원적으로는 '이미 다가와 버린 날'이란 의미를 담은 말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