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조선망국과 일제 식민지시대의 평가

"억압과 차별의 식민시대였지만 근대문명을 학습한 시기이기도 했다”
[기획] 이영훈 교수와 역사 대담 (2)
지난 9일 여의도 자유기업원에서 열린 이영훈 교수와의 역사 대담 두번째 시간은 ‘조선 패망의 원인과 일제 식민지 시대평가’를 주제로 진행됐다.

이교수는 일본 식민지 시대가 제국주의 억압과 차별의 시대였지만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시대이기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근대인으로 발전한 수 많은 사람들이 이후 대한민국 발전의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대학생 교양웹진 ‘바이트’가 기획한 역사대삼은 내달 중순까지 두 차례 더 열린다.


▼황인혜=조선 패망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세요?

"한 나라의 패망에는 장기간 누적된 구조적 원인이 있습니다.

18세기 중반부터 산이 헐벗기 시작하면서 환경이 파괴됐습니다.

19세기 말이 되면서 북부 고원지대와 강원도 깊은 산속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지가 발갛게 헐벗고 말았습니다.

산림이 황폐하자 조금의 비에도 홍수가 나고 토사가 논밭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 결과 농업생산이 감소했습니다.

19세기 말이면 100여년 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토지생산성이 감소합니다.

그러나 각종 조세는 그대로여서 농가에 큰 부담이 됐고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했습니다.

민란의 물결은 1860년대부터 더욱 거세게 일어 1894년 동학농민봉기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조선왕조의 정치적 통합력은 현저히 약해졌지요.

이런 시기에 제국주의가 침입해 들어오자 조선왕조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

▼김초롱=교수님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조선의 경제가 성장했다고 보시던데요.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0](낙성대경제연구소)이란 책을 보면 이 기간에 연평균 3.6% 정도 경제가 성장합니다.

같은 기간 인구증가율은 연 1.3%였습니다.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원인은 수출과 자본투자입니다.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의 과실은 주로 지주들이 차지했습니다.

지주들은 늘어난 소득을 은행과 상업회사,광산업 등에 투자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상업과 공업이 발달했습니다. "

▼김승재=그렇게 경제 성장의 과실을 주로 지주가 차지했다면,소작농 등 하층민의 삶은 더 어려웠다고 생각되는데요.

"맞는 지적입니다.

경제 성장에 따라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의 소득과 부가 점점 더 커진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경제 성장의 주도권을 쥔 측이 일본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한 일본인들이 성장의 과실을 모조리 다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인의 소득이 커지는 속도만큼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한국인의 소득도 커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주나 상공업자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농촌의 빈농과 도시 하층민의 소득까지 크게 증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소작농이 증가한 가장 큰 원인은 1.6배나 크게 증가한 인구 압력에 있었습니다.

경지 규모는 고정되어 있는데 인구가 증가하자 농가의 경작 면적이 줄고 또 소작농이 증가하게 된 것이죠.

식민지 시대에 농촌사회의 빈곤 문제가 개선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승수=1920년대에 실력양성운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이후 대부분 친일행위를 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3 · 1운동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이 가까운 미래에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긴 안목에서 낡은 사회를 개혁하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편이 장래의 독립을 준비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해서 동아 조선과 같은 민족언론이 세워지고,경성방직과 같은 민족공장이 만들어지고,고려대와 같은 민족대학도 건립되었습니다.

수많은 농민들이 앞다퉈 소학교에 그들의 자제를 입학시켰습니다.

바로 그렇게 양성된 인적 자본이 후일 대한민국을 세우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1937년 이후 아시아 · 태평양전쟁기가 되자 일제는 민족의 지도세력에게 전쟁협력을 강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명망 있는 민족지도자들이 친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습니다.

나는 전쟁기에 일제에 의해 강요된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당시의 어려웠던 환경을 감안하여 너그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하고 탄압하는 데 앞장섰던 악질적인 친일행위까지 용서할 수는 없지요. "

▼김형주=교수님은 친일이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불가피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아직도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십니까?

"해방과 독립이 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일파 문제를 제기하는 역사관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이완용 등 소수의 사람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장기간에 누적된 구조적 모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8~19세기에 걸쳐 조선왕조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구조적으로 살피고 그로부터 역사의 교훈을 얻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는 해방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민족정기가 훼손되는 등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켜 왔다는 역사인식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친일파를 청산하자고 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취지에서 지난 정부 시절 친일파를 조사하고 약 4000명의 명단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의 우리 역사를 잘 살피면 결코 친일파가 지배한 역사가 아닙니다.

건국 초기의 농지개혁으로 일제시대의 지배계급인 지주세력이 해체됐습니다.

노골적인 친일세력이 정부의 요직을 농단한 적도 없습니다.

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면서 새롭게 형성된 한국의 지도층은 구래의 양반세력이나 지주세력과 무관하게 새롭게 고등교육을 받아 성장한 상공업자 관료 전문가 계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

▼이승수=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올바로,종합적으로 평가해야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 시대가 제국주의에 의한 억압과 차별의 불행했던 역사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국주의의 지배가 안고 있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대해 비판의 고삐를 늦추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일본을 통해 서구의 근대 문명이 이식되고 정착되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가 이식한 근대적인 법과 제도는 원래 서구에서 발생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일제가 만든 것이라기보다 20세기 인류가 공유한 선진적 문명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제시대의 역사를 근대문명의 수용과 발전이라는 큰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심어준 것이 아니라 앞서 지적한 대로,우리 민족이 스스로 학습하고 실천한 근대문명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한편으로는 투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복합적인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할 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세워진 나라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정리=이유미 바이트 기자 worldeyu@naver.com

3회 대담은 생글생글 5월16일자에 계속됩니다.

※대담 동영상은 자유기업원 프리넷뉴스(http;//www.fntv.kr/)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