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나무가 키운 아테네 문명
기름 수출해 부족한 식량수입
지중해 교역·경제 중심지로 성장
어느 날 신들의 모임에서 아테나 여신과 포세이돈 신은 서로 아티카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무거운 마차를 끌 수 있고 전장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잘생기고 힘센 말'이 깊은 바다에서 튀어나오도록 했다.
그러자 아테나는 신전의 바위 뒤에서 '밤에도 세상을 밝혀주고,상처를 낫게 해 주며,맛이 진하고 원기를 주는 귀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올리브나무'가 자라게 했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신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가 전쟁을 상징하는 말보다 인간에게 더 유용할 것이라 생각하고 아테나 여신에게 아티카 지방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때부터 이 도시를 아테네라고 부르게 됐다.
이 신화를 보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올리브가 얼마나 중요한 물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올리브기름은 유럽 음식의 가장 기본적인 소스다. 또 조명에 쓰이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전구가 등장하기 전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밤마다 기름램프를 사용해 불을 밝혔다.
사람들은 체육관이나 목욕탕 등지에서도 올리브기름을 많이 사용했다. 운동 전 몸에 기름을 바르고,목욕할 때는 올리브기름과 목회(木灰)로 만든 비누 유제(乳劑)를 사용했다.
올리브는 그야말로 지중해 문명의 상징이었다.
올리브나무는 석기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해 문명 발전과 함께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갔다.
기원전 2000년대 유적인 크레타섬의 미노아궁전 터 말리아에서는 식료품 저장고에 1만헥토리터의 올리브기름을 보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의 1년 수요는 기껏해야 2000헥토리터를 넘지 못하므로,남는 양은 주변 지역에 수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올리브기름은 중요한 교역품이었던 것이다.
아테네를 비롯한 소규모 국가들이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했던 것은 국내 농업 생산이 워낙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를 두고 '도시국가'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시민들 대다수는 시내와 시외의 농지에서 일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 중에서는 드물게 경제에 관한 논설인 '에코노미쿠스'(Oeconomicus:대개 가정론(家政論)으로 번역하는데,이때의 economy는 가족과 토지를 잘 관리한다는 의미다)를 쓴 크세노폰은 농업을 찬미하고 상공업을 천한 일로 쳤으며,자급자족제도를 이상으로 여겼다.
문제는 그리스 땅이 척박해서 그들의 밀농사만으로는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없어 이집트와 흑해 연안 지방에서 곡물을 수입해 와야 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응한 수출품으로는 도자기,포도주와 함께 값비싼 올리브기름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늘 수입이 수출보다 많았으므로 그 차액을 화폐로 지불했다.
아테나 여신의 상징인 부엉이가 새겨진 드라크마 화폐는 원래 경제적인 의미보다는 이 도시국가의 자율성의 '상징'으로 기원전 6세기부터 주조됐고,후대에 높은 은 함유량 때문에 지중해 전역에서 상인들이 선호하는 무역 화폐가 됐다.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과연 이런 무역이 규칙적으로 이뤄졌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의견을 달리하는 두 개의 학파가 있다.
'초보론자(primitivist)' 학파는 아테네의 무역은 주변적인 활동으로서 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우스에서 일하는 대상인들은 대개 외국인이었다.
이에 비해 '근대론자(modernist)' 학파는 고대 그리스 경제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오늘날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알랭 브레송이나 에드워드 코헨 같은 학자들은 심지어 아테네의 경제는 이미 '상업경제'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무역은 정규적이고 조직적이었으며,상인들은 어디에서 어떤 상품을 구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정보 수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에 따르면 아테네의 '시장경제'는 오늘날 뉴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개인 창고업자,항해인,은행가 같은 서비스 제공자들의 복합체가 피레우스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결국 이곳은 지중해 전역의 항구 간 상품 교역의 국제 청산소로 성장했다.
흑해 지방,시칠리아,이집트 등지에서 도착하는 곡물의 수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됐고,이는 지중해 지역 전체의 표준이 됐다.
화물에 물리는 2%의 세금 덕분에 국고는 크게 불어났다.
아테네는 큰 배들이 더 많이 들어오도록 방파제,도크,준설 서비스 등 인프라를 개선했고,화물선을 보호하기 위해 호송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그렇다고 현대 시장경제의 면모를 고대 경제에 너무 과도하게 투사해서는 곤란하다.
올리브기름이 고대인의 일상생활에 지극히 중요한 물품인 것은 맞지만 오늘날의 석유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올리브기름은 계속 고가의 상품이었으나,그리스의 식민지가 지중해 전역에 건설되면서 올리브나무 재배도 확대돼 오히려 교역품으로서의 중요성은 떨어졌다.
각 지역에서 자체 생산과 소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올리브기름은 오늘날까지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일상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물속에서 살다가 기름 속에서 죽는 것은?' 답은 물론 생선이다.
우리나라 생선은 매운탕 속에서 최후를 맞지만,지중해의 생선은 올리브기름을 뒤집어쓰고 산화한다.
기름 수출해 부족한 식량수입
지중해 교역·경제 중심지로 성장
어느 날 신들의 모임에서 아테나 여신과 포세이돈 신은 서로 아티카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무거운 마차를 끌 수 있고 전장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잘생기고 힘센 말'이 깊은 바다에서 튀어나오도록 했다.
그러자 아테나는 신전의 바위 뒤에서 '밤에도 세상을 밝혀주고,상처를 낫게 해 주며,맛이 진하고 원기를 주는 귀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올리브나무'가 자라게 했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신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가 전쟁을 상징하는 말보다 인간에게 더 유용할 것이라 생각하고 아테나 여신에게 아티카 지방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때부터 이 도시를 아테네라고 부르게 됐다.
이 신화를 보면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올리브가 얼마나 중요한 물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올리브기름은 유럽 음식의 가장 기본적인 소스다. 또 조명에 쓰이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전구가 등장하기 전에는 지중해 전역에서 밤마다 기름램프를 사용해 불을 밝혔다.
사람들은 체육관이나 목욕탕 등지에서도 올리브기름을 많이 사용했다. 운동 전 몸에 기름을 바르고,목욕할 때는 올리브기름과 목회(木灰)로 만든 비누 유제(乳劑)를 사용했다.
올리브는 그야말로 지중해 문명의 상징이었다.
올리브나무는 석기시대부터 재배되기 시작해 문명 발전과 함께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갔다.
기원전 2000년대 유적인 크레타섬의 미노아궁전 터 말리아에서는 식료품 저장고에 1만헥토리터의 올리브기름을 보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곳의 1년 수요는 기껏해야 2000헥토리터를 넘지 못하므로,남는 양은 주변 지역에 수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올리브기름은 중요한 교역품이었던 것이다.
아테네를 비롯한 소규모 국가들이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했던 것은 국내 농업 생산이 워낙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를 두고 '도시국가'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시민들 대다수는 시내와 시외의 농지에서 일하는 농민들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 중에서는 드물게 경제에 관한 논설인 '에코노미쿠스'(Oeconomicus:대개 가정론(家政論)으로 번역하는데,이때의 economy는 가족과 토지를 잘 관리한다는 의미다)를 쓴 크세노폰은 농업을 찬미하고 상공업을 천한 일로 쳤으며,자급자족제도를 이상으로 여겼다.
문제는 그리스 땅이 척박해서 그들의 밀농사만으로는 모든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없어 이집트와 흑해 연안 지방에서 곡물을 수입해 와야 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응한 수출품으로는 도자기,포도주와 함께 값비싼 올리브기름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늘 수입이 수출보다 많았으므로 그 차액을 화폐로 지불했다.
아테나 여신의 상징인 부엉이가 새겨진 드라크마 화폐는 원래 경제적인 의미보다는 이 도시국가의 자율성의 '상징'으로 기원전 6세기부터 주조됐고,후대에 높은 은 함유량 때문에 지중해 전역에서 상인들이 선호하는 무역 화폐가 됐다.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과연 이런 무역이 규칙적으로 이뤄졌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의견을 달리하는 두 개의 학파가 있다.
'초보론자(primitivist)' 학파는 아테네의 무역은 주변적인 활동으로서 사회의 주류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아테네의 항구인 피레우스에서 일하는 대상인들은 대개 외국인이었다.
이에 비해 '근대론자(modernist)' 학파는 고대 그리스 경제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오늘날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알랭 브레송이나 에드워드 코헨 같은 학자들은 심지어 아테네의 경제는 이미 '상업경제'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무역은 정규적이고 조직적이었으며,상인들은 어디에서 어떤 상품을 구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정보 수단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에 따르면 아테네의 '시장경제'는 오늘날 뉴욕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개인 창고업자,항해인,은행가 같은 서비스 제공자들의 복합체가 피레우스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며,결국 이곳은 지중해 전역의 항구 간 상품 교역의 국제 청산소로 성장했다.
흑해 지방,시칠리아,이집트 등지에서 도착하는 곡물의 수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됐고,이는 지중해 지역 전체의 표준이 됐다.
화물에 물리는 2%의 세금 덕분에 국고는 크게 불어났다.
아테네는 큰 배들이 더 많이 들어오도록 방파제,도크,준설 서비스 등 인프라를 개선했고,화물선을 보호하기 위해 호송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지만,그렇다고 현대 시장경제의 면모를 고대 경제에 너무 과도하게 투사해서는 곤란하다.
올리브기름이 고대인의 일상생활에 지극히 중요한 물품인 것은 맞지만 오늘날의 석유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올리브기름은 계속 고가의 상품이었으나,그리스의 식민지가 지중해 전역에 건설되면서 올리브나무 재배도 확대돼 오히려 교역품으로서의 중요성은 떨어졌다.
각 지역에서 자체 생산과 소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올리브기름은 오늘날까지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일상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 남부 지방에는 이런 수수께끼가 있다. '물속에서 살다가 기름 속에서 죽는 것은?' 답은 물론 생선이다.
우리나라 생선은 매운탕 속에서 최후를 맞지만,지중해의 생선은 올리브기름을 뒤집어쓰고 산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