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산통' 깨면 안되는 까닭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자연스레 늘어나는 게 운세나 점을 보는 풍습이다.

특히 설을 지나면서 새해 금전운이나 애정운,직장운 따위를 보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미신에 지나지 않지만 길흉화복을 헤아려 몸가짐을 다스리려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 미아리고개에는 점집이 몰려 있었다.

《미아리고개 아래. 30여명의 맹인 점집이 낮은 지붕을 맞대고 있고 관상사주집이 더러 섞여 있는 점복가(占卜街). 이곳의 특색은 판수가 산통에서 산가지를 뽑아 점치는 육효점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이다. 》

1978년 한 신문이 보도한 이 기사에는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 몇 개가 보인다.

우선 '판수'는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또는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맹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로 하면 '장님 점쟁이'쯤 될 것이다.

'산통(算筒)'은 '셈 산,대통 통'자로, 맹인이 점을 칠 때 쓰는 통을 말한다.

이 말은 단독으로는 잘 쓰이지 않지만,관용구인 '산통(을) 깨다' '산통(이) 깨지다'란 말은 매우 활발한 쓰임새를 보인다.

'산통(을) 깨다'는 '잘되어 가던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틀다'란 의미이고 '산통이 깨지다'라고 하면 '잘되어 가던 일이 뒤틀리다'란 뜻이다.

'산통'은 산통계나 산통점 같은 합성어를 만드는데,사전에 그밖의 말은 보이지 않아 그다지 생산성이 좋은 단어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산통 깨지다'란 말의 유래를 산통점이나 산통계와 관련 있을 것으로 설명한다.

옛날에는 주로 맹인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점을 보았는데 대표적인 게 산통점이다.

산통을 이용해서 점치는 방법은 맹인 점술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통점에는 필수적으로 '산가지'가 필요하다. 산가지는 괘(卦)를 나타내기 위해 쓰는 나무로 된 도구를 말한다.

숫자가 새겨진 산가지를 산통에 넣어 흔든 다음 점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산가지를 집게 해 나오는 숫자로 길흉화복을 점쳤다.

'산통계(算筒契)'란 옛날에 금전을 조달하기 위해 조직한 계의 하나이다.

계원이 정해진 곗날에 일정한 곗돈을 내고,계원의 수효대로 통 속에 계알을 넣고 추첨해 뽑힌 계원에게 목돈을 주었다.

산통점이 됐든 산통계가 됐든 어쨌거나 그 '산통'이 깨지면 목적으로 하던 일을 이룰 수 없다는 점에서 '산통 깨지다''산통 깨다'란 표현이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다른 말과 어울리면서 본래 단어의 뜻을 잃고 새로운 의미를 얻은 말 중에 '육갑하다'도 있다.

'육갑'은 '육십갑자'의 준말이다.

이는 천간(天干)의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와 지지(地支)의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를 순차적으로 배합해 예순 가지로 늘어놓은 것을 말한다.

'갑자 을축 병인 정묘 …'식으로 조합해 나가다 보면 60번째가 계해이고 61번째에서 다시 갑자가 시작된다.

그래서 61세 되는 해를 회갑 또는 환갑이라 부른다. 산통과 마찬가지로 이 육갑 역시 만물의 운세와 점을 치는 데 쓰였다.

'생년월일을 가지고 길흉화복을 간단히 헤아리다'란 뜻의 관용구 '육갑을 짚는다'란 말은 여기서 생긴 것이다.

또 '육갑도 모르는 놈이 산통을 흔든다'라고 하면 기초도 안 돼 있는 사람이 아는 체를 한다,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일을 하려 한다는 뜻이다.

속담에 '맥도 모르고 침통 흔든다'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단어는 중립적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다'가 덧붙으면 어떤 말이나 행동을 아주 저속하게 낮잡아 보고 하는 말로 쓰인다.

욕이 되는 것이다. 원래는 이 말도 '운세를 헤아리다'란 의미에서 '육갑(을) 하다'로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일이 흐르면서 '운세를 짚다'란 의미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의 언행을 욕하는 의미로 바뀌어 굳어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육갑을 짚다'와 '육갑을 하다'는 전혀 다른 말이 됐으므로 구별해 써야 한다.

이것이 한술 더 떠서 '육갑 떨다'라고 하면 욕하는 의미가 더 짙어진다.

이때의 '떨다'는 '(동작이나 성질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 뒤에 쓰여) 그런 행동을 경망스럽게 자꾸 하다.

또는 그런 성질을 겉으로 나타내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능청을 떨다/부산을 떨다/방정을 떨다/야단법석을 떨다/아양을 떨다' 같은 게 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