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

“사랑의 교환성 위에서만 이타적 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


[논술 기출문제 풀이] 2011학년도 건국대학교 수시 1차 논술 기출문제 풀이 (下)
기업 입장에서 사회적 책임 준수와 수익성 확보를 동시에 달성하기란 쉽지 않다.

기업이 환경 친화적으로 생산을 하거나 수익금의 일부를 자선 단체에 기부할 경우 자연히 비용이 상승한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 추구가 수익성 확보와 양립하기 위해서는 고객들이 이들 기업 제품에 관심을 갖고 구매를 늘려주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고객들이 기업을 믿지 못한다는 점,둘째 고객들이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구조라는 점이 지적된다.

최근 저명한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실린 한 연구 결과는 이 문제와 관련되어 주목된다. 이 연구는 미국의 한 유명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이용 고객을 대상으로 실험을 행하였다.

원래 공원 측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든 고객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이를 모니터를 통해 보여준 후,원하는 고객에 한해 사진을 출력하여 판매하였다.

실험은 사진에 대해 몇 가지 다른 가격 정책을 설정하고 여기에 고객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실험의 가격 정책은 우선 두 가지로,하나는 '정액 지불'(12.95달러)이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만큼 돈을 내거나 아예 내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 지불'이다.

그리고 '정액 지불'과 '자유 지불'이라는 조건에 덧붙여,고객이 지불한 금액의 절반을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고 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고객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조사하였다.

다음 표는 실험 결과다.
[논술 기출문제 풀이] 2011학년도 건국대학교 수시 1차 논술 기출문제 풀이 (下)
⊙ 제시문 해설

글의 핵심은 나와 타자 사이의 교환적 관계에 대한 적극적 옹호를 향해 있다.

교환적 관계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이웃을 왜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이른바 'give & take'로 도착하는 대인 관계다.

어떤 특별한 고민 없이 이 주장은 우리의 상식적 지지를 충분히 얻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일면식도 없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실 수 있는 분이 그 말을 내뱉으신 분과 더불어 혹 몇 분 더 계시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타자를 자신의 몸과 동일시하라는 명령은 그만큼 종교적 준거점 위에 서 있는 엄준한 정언명령인 것이다.

우리는 비록 신실한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지켜내기 힘든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제시문의 필자가 보기에 그 명령은 젠체하는 명령이며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다.

게다가 그 명령은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확장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당혹스러운 불합리함을 직면하게 한다.

누가 자신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종교적 명령과 그 명령이 담지하고 있는 타자에 대한 사랑의 보편성은 개인의 합리적 차원에서 보건대 납득하지 못할 이유로 가득찬 허구적 명령일 뿐이다.

나 혹은 개인은 사랑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사랑하며,나 혹은 개인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한 사랑의 교환성 위에서만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이타적 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

타자에 대한 나의 관계는 결코 절대적인 명령이나 보편성 위에서 성립되지 않으며,철저히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원칙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이다.

이 정의에서 중요한 대목은 '일관되게'와 '기본적인'이다.

원칙이란 기본이 되는 것이며 일관성을 어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윤리적 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이 기본과 일관성에 '윤리적'이라는 제한을 가한 것으로,윤리적으로 볼 때 반드시 기본이 되어야 하며 결코 일관성을 위배하지 말아야 하는 규칙이나 법칙이라 할 것이다.

제시문 [나]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이러한 윤리적 원칙의 기반 위에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존중감은 대강 다음과 같은 수순으로 확장된다.

일단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이 이기적 생명 존중감은 자연스럽게 그 개인의 주변 인물들의 생명 존중으로 확장된다.

나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 또한 소중함을 감정적으로 자명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합리적이고 손쉬운 확장이므로 문제없으나 이 다음부터는 약간의 곤란함이 따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명이 과연 똑같이 존중받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그들 또한 나와 같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일 것이 분명하므로 원칙적으로 그들 또한 똑같이 생명 존중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확장 수순으로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보편적으로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윤리적 원칙에 우리는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 혹은 개인은 모든 타자를 나 혹은 개인과 동등한 생명 존재로서 대해야 하며,나와 먼 타자들을 소중한 생명 존재로 동등하게 대접하기가 현실적으로 힘이 들 때,우리는 기본적이고 일관적이어야 하는 윤리적 '원칙'을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 제시문에서 우리는 일단 어떤 선택지 앞에 노출되게 된다.

죽느냐,사느냐,혹은 죽일 것이냐,살릴 것이냐 하는 선택지.

질문과 대답은 이 제시문으로부터 모두 환경과 경제적 관점 위에 기록되고 있으나 그것들이 과연 전적으로 경제적 관점으로만 두고 볼 일인지는 진정 두고 볼 일이다.

제시문의 두 견해는 모두 합리적이다.

우선 후자 쪽 견해부터 파헤쳐 보자. 근래 보기 드문 합리성 위에서 하딘은 과감하고 무모하며 용기 있는 주장을 펼친다.

제3세계의 빈민들은 도움 받을 자격이 없으며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도움 주지 않은 자들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 이것은 너무나 차갑고 날카로워서 손을 대면 베일 만큼 합리적인 주장이다.

지구라는 우주선은 분명 한정된 자원을 가진 채로 비행 중이며 따라서 그 비행을 장시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불평등적 빈민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지구 우주선의 장시간 비행 목적이 진정 무엇인지 하딘으로부터 알아챌 방도는 없으나 어쨌든 하딘의 합리적 주장은 대한민국의 우리들을 비롯한 지구 북반구의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은 인구를 살릴 아주 고마운(?) 방법이 될 듯도 하다.

로만과 벤츠의 주장을 따를 경우 지구 우주선의 모든 탑승자는 장시간 비행을 위해서 합동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몫의 식량을 먹을 권리를 가진다면,지금까지 지구 우주선에서 몰래 혹은 공공연하게 대놓고 많이 먹어왔던 탑승자들은 당장 많이 먹기를 중단하고 자신들의 과잉을 타인의 몫으로 내놓아야 한다.

자,이 지점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먹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그러므로 식량의 동등한 배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배분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과잉의 몫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이 포기는 결코 경제적 관점에서만 종용될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것.

그렇다면 로만과 벤츠는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동등한 관계를 위한 우리의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 결단을 요구한다는 해석은 제시문 [다]의 경계를 넘어서는 외부적 주장이지만 이 주장은 앞의 두 제시문과 연계적 해석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월담이다.

이 부분은 논제 해설에서 보충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 그렇게 본다면 사실 시간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딘이든 로만과 벤츠든 우리든,우리 모두는 지구 우주선의 장시간 비행을 원한다.

윤리적 결단이란,시간의 문제를 넘어서,소수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과잉의 몫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수의 빈민을 죽이고 지구 우주선을 비행시킬 것이냐,아니면 동등한 생명 존중 원칙의 기반 위에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왔던 과잉을 평등하게 배분하며 다소 힘들더라도 같이 함께 지구 우주선을 비행시킬 것이냐 하는 선택지 가운데 원칙적으로 윤리적인 것을 선택하려는 인간적 의지의 실천이다.



"자신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는 만큼 타인의 생명도 존중해야"


제시문에서 중요한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무와 수익성의 양립 가능성 따위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실험 결과로부터 도출되는 개인들의 행위 양상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나 혹은 개인의 이타심이 어떠한 조건 아래에서 특별히 발로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일차적으로 지불 조건의 변동에 따른 결과를 점검해 보자.

정액 지불제와 자유 지불제 양쪽의 이용 고객은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판매율은 현저하게 차이를 보인다.

이는 가격이 책정되었을 경우 사진을 구매하는 사람이 현저하게 적다는 사실을 의미하며,따라서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구매 체계를 더 선호한다고 일단 결론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지불 체계가 자율적이므로 당연히 가격이 책정되었을 때보다 사진 구매를 위해 지불한 평균 금액은 적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의 구매와 지불 체계는 일종의 개인의 양심에 빚지는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며,그러한 한에서 모든 사람들의 양심이 기업이 책정한 가격을 초과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무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결과다.

자유 지불제의 평균 지불 금액이 정액 지불제의 책정된 가격보다 현저하게 낮은 것은 사실이나,구매율이 상대적으로 현저하게 높기 때문에 사진 판매 수익이 오히려 정액 지불제보다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든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놓고 선택적으로 판매하는 것이므로 자유 지불제는 결과적으로 수익면에서 기업에 훨씬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기부라는 조건이 제한되었을 때는 보다 의미심장한 결과가 도출된다.

기부 조건 하에서의 자유 지불제의 경우,이용 고객 수가 동일 조건 하에서의 정액 지불제 이용 고객 수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구매율과 수익 양면에서 모두 기부 조건 하에서의 정액 지불제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기부라는 조건이 붙었을 때 자유 지불제의 기업 수익(총수익의 절반)이 기부라는 조건이 붙지 않았을 때의 자유 지불제 기업 수익보다도 높게 나타났다.

반면 정액 지불제의 경우는 그 반대의 결과를 보이는데,이용 고객 수의 변동을 고려하면 기부라는 조건이 정액 지불제 채택의 결과 변동을 사실상 거의 추동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개인의 자율성과 자발성이 사회적으로 존중되었을 때 타인에 대한 배려심과 존중감이 더욱 확장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나 혹은 개인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충분히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이며,이러한 개인의 자발적 윤리성을 사회 전체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무 또한 수익성과 양립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간단하다. 이제까지의 모든 제시문 해설의 초입으로 문제는 다시 돌아간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어떠한 마음으로부터 어떻게 비롯되는가?

나 혹은 개인과 타인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 정립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주관적 대답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제시문이며,그 주관적 대답 아래로 다른 모든 제시문들에 대한 해석의 결과가 다분히 주관적으로 등록될 것이다.

인물들의 행위 구조와 내용 전개 역시 간단하다. 라오쑹은 병이 들어 다리를 잘라야 한다.

그런데 돈이 없다.

동료 혹은 이웃으로서 라오샤는 라오쑹을 돕기 위하여 라오쑹의 다른 이웃들로부터 라오쑹 돕기 성금을 모금한다.

한 청년은 과거에 라오쑹으로부터 받았던 개인적 은혜를 갚기 위하여 거액을 쾌척한다.

많은 돈이 치료비조로 모금되어 라오쑹에게 전달된다.

돈을 보자 라오쑹은 갈등한다. 그 돈이면 소소하게나마 인생 역전을 도모할 수 있으므로 라오쑹은 돈을 갖고 튄다. 물론 시골에서 싼 값에 다리를 절단하기는 한다.

라오쑹의 도망에 라오샤를 비롯한 기부자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배신감을 느끼는 이웃 대표로 라오샤가 라오쑹을 찾아 간다. 라오쑹은 라오샤를 보자 가책과 난감함을 느껴 또 도망친다.

줄거리를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언어적 도식화는 필수적이다.

첫 번째 핵심은 기부자들의 심리적 상황 파악에 있다.

그들이 라오쑹에게 'give & take'적인 기대를 하고 기부를 했다면 당연히 그들이 심적으로 인정하는 범주 내에 마련된 병원에서의 치료와 일정한 감사의 인사를 라오쑹으로부터 기대했을 것이며 소설 속에서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으므로 배신감을 느낀다.

두 번째 핵심은 라오쑹의 심리적 상황 파악에 있다. 라오쑹은 분명 돈을 탐했다.

그러므로 시골로 잠적했다. 돈에 대한 탐욕과 시골로의 잠적은 라오쑹이 결코 스스로도 기부자들에게 당당한 심리 상태를 갖고 있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오샤를 보고 다시 부끄러운 도망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해석력이 가동되어야 할 지점은 이 다음부터다.

기부자들이 'give & take'의 기대 없이 기부를 했다면 라오쑹의 잠적 소식을 들은 그들의 심적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 하는 것.

그들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얼추 비슷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 자신의 완결된 기부 행위 이후에 벌어진 라오쑹의 잠적 행위에 대해서 별다른 왈가왈부를 안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타인을 위한 진정한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일까.

자발적 기부 행위 혹은 자발적 이타 행위가 어떤 타인의 정형화된 반응을 기대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행위가 과연 자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치료 목적으로 라오쑹에게 기부를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치료를 받은 라오쑹에 대한 배신감은 접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도움으로 가난한 라오쑹이 치료도 받고 살 길도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윤리적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닐까.

이런 모든 질문들이 이 제시문으로부터 던져지고 있으며 구체적 논제를 통해 논술자의 주관적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 논제 해설

<문제1>

일단 세 제시문 해설의 핵심을 간추리면 답이 된다.

[가]는 개인과 타자의 관계가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상대적으로 정립된다는 점을 피력한다.

나는 나와 친연 관계에 있는 사람을 더욱 혹은 오직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나와 무관한 개인을 보편적 명령에 따라 보편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합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다.

사랑이란 주고 받는 관계로부터 가능한 감정 상태이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과 감정을 주고 받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나]는 생명 존중감의 확장을 통한 윤리적 원칙을 강조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존귀하게 생각하며 이 존중감은 타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개인은 타인의 생명 역시 존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모든 생명의 동등한 존중감이 원칙적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타인과의 관계 역시 이 원칙을 고수하려는 노력 위에 존립해야 한다.

[다]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비되는데 제시문 해설에서 언급했다시피 두 입장 가운데 하나의 선택은 다분히 윤리적 태도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가]보다는 [나]의 입장에 서 있는 선택이며 경제-환경의 관점 안에서도 역시 유효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문제2>

역시 제시문 해설에서 대강이 언급되었다.

가격 정책의 변화와 특정 조건의 부여라는 변동적 상황 속에서,가장 의미 심장한 결과는 자율 가격제와 반액 기부의 양립적 체계 속에서 도출되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구매자들이 결코 사회적 강제 속에서 이타심을 발로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으며,기업이 사회적 책무와 수익성을 양립시키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을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개인은 타인에 대한 윤리적 실천을 충분히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사회가 개인들의 윤리적 실천 가능성을 신뢰하고 그 가능성들을 자발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도록 추동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 역시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문제3>

제시문 해설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마]에 대한 논평은 라오샤를 비롯한 기부자들의 심리-행위와 라오쑹의 심리-행위를 주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소설의 내용만을 제한적으로 본다면 일단 라오샤 등은 제시문 [가]에서 피력된 심적 상태와 유사한 이타 행위를 실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분명 어떤 반대급부로서의 기대가 있었으며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았으므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라오쑹,곧 타인에 대하여 맺고 있는 관계는 [나]에서 주장하는 보편적 윤리 원칙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다분히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주고 받음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라오쑹의 경우는 사실 어떠한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칭찬받기는 힘들다. 그의 도망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기부자들이 어떤 기대를 하였건 간에 그로서는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도망칠 필요 없는 선택을 했어야 했다.

치료비 명목을 다른 명목으로 도용해야만 자신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면 라오샤 등에게 사실 자체를 말하는 선택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라오쑹의 심리-행위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나 혹은 개인이 타인에 대하여 맺는 관계,그 심리적 동기와 결과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곧 논술자가 수행해야 할 핵심적 과제다.

그 주관적 해석의 다양한 면모는 [마] 해설의 말미에 언급하였던 질문들로부터 스스로 추론해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논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제시문[다]의 두 입장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점과 그 선택에 따라 제시문 [가]와 [나]의 대비되는 입장을 선택적으로 정리하는 것,그리고 자신의 그 모든 주관적 해석에 기반하여 [마]를 통해 타자와의 바람직한 공존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것들이다.

진리영 S · 논술 선임 연구원 furyfury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