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영역의 비문학 제시문과 다른 점
[생글 논술 첨삭노트] (40) "글을 쓴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제시문의 내용이나 길이로만 보자면, 논술의 제시문들은 언어영역의 비문학 지문들과 그 성격이 비슷합니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서도 이런 점을 고려하여 고등학교 과정을 충분히 이수했다면 읽을 수 있는 제시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진 않지요.

언어영역은 주어진 정보를 확인하는 객관식인 반면, 논술은 주어진 정보 중에서 조건에 맞게 필요한 정보를 자신이 직접 요약해 내야 하는 주관식입니다.

당연히 체감난이도로 보았을 때 논술이 한결 더 어렵습니다.

객관식과 주관식의 차이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 읽는 방식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어진 문제조건에 맞게 필요한 정보를 찾는다는 점은 같을지 몰라도 그 내용들을 직접 자신이 찾아야 한다는 부담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객관식이라면 보기 중에 힌트가 될 만한 단어나 방향이 숨어있겠지만, 주관식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또 다른 제시문일 뿐이죠.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 또한 요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핵심적으로, 논술의 제시문은 언어영역의 그것과 달리 주제문을 직접 찾아서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한 문장으로 정리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제시문을 분석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글쓴이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 왜 글을 쓰는가?

'이 사람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이것이 제시문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던져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글쓴이는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썼습니다.

그것이 설명이든, 주장이든, 혹은 감정의 발산이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서술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필자는 이왕이면 그것을 독자에게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친절하게 이것저것 사례나 부연을 붙여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의 글이라는 것은 '하고 싶은 말 A'와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친절히 이해시키기 위한 부분 B'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령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자'라는 주장(가치판단)을 하고 싶다면 그전에 깔아놔야 할 포석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이 문장만으로는 읽는 이가 '왜?'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핵심은 '벗어나자'가 맞지만 이것만으로 내용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여기에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으로부터 기인했다'라는 사실판단을 붙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심각성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몇 가지 예시를 들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글은 하나의 주장(핵심)과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두 개의 부연 부분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핵심 부분은 보통 맨 앞이나 맨 뒤에 놓는 것이 정석일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그렇지요.

이 지루할 수도 있는 글을 독자에게 좀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주의가 집중되어 있을 때인 시작 지점이나 끝지점이 좋겠지요.

중간에 숨겨놓으면 글자 더미 속에서 찾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보는 대개의 글들은 이런 구성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글은 다소 박진감이 떨어진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또 다른 방식을 고민하게 됩니다.

⊙ not A but B 타입의 제시문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많이 읽다 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흐름 속에서 역사성을 타고나야 합니다.

즉, 무작정 흰 백지를 놓고 글을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작업들을 참고하여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잘 보면 알겠지만 책이란 기존의 것들을 뛰어넘거나, 기존의 것들을 설명하거나, 기존의 것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화이트헤드(A. Whitehead)는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라는 책에서 생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달기 작업에 불과하다고 평합니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이 모두 플라톤을 뛰어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그래봤자 그걸 설명하는 것에 그쳤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엎치락뒤치락하는 학자들의 논쟁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곤 합니다.

플라톤을 뒤엎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적 입장을 취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수의 제시문들이 <이것은 틀렸다. 이게 맞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무엇인가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내놓습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가 됩니다.

흔히 우리가 독해할 때 <하지만>과 같은 연결어를 주의해서 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내내 해놓고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라는 식으로 방향을 꺾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다음의 제시문을 유의해서 읽어보도록 하지요.

그 어렵다는 홍익대학교 논술 제시문입니다.

폭군이 아니라면 강제로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권리를 동물이 획득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피부 색깔이 검다는 이유로 인간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프랑스 사람들은 이미 자각하고 있다.

다리가 몇 개인지, 피부가 털투성이인지, 또는 꼬리뼈가 퇴화했는지 등의 차이 때문에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학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인가?

아니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인가?

그런데 문제는 완전히 성장한 말이나 개가 갓난아기보다도 더 이성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갓난아기들보다 성장한 동물들과 훨씬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동물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다고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제는 동물에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있는가.

또는 대화를 나눌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먹는 문제만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들이 동물을 먹어도 되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동물을 먹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물들은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이유로 인해 더 큰 고통을 받지는 않는다.

인간과는 달리 동물은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여 고통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자연 과정 속에서 죽는 것보다 사람의 손에 의해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죽는 것이 훨씬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 2009학년도 홍익대학교 수시 기출문제 중에서

이 제시문에 딸린 문제 조건은

<제시문들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것인가, 구분한다면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각 제시문의 논지를 찾아 각각 요약하고 이를 비교 · 대조하시오.>였습니다.

즉, 이 제시문은 구분을 하든가, 하지 않든가 둘 중 하나이겠지요.

언뜻 보면 위 제시문은 꼭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으니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처럼 보입니다.

첫 부분부터 노골적으로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파놉티콘(Panopticon)으로 유명한 벤담(Jeremy Bentham)의 쓰기 실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한껏 평등을 부르짖다가 막판에 <그런데>라는 반전을 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비판할 상대방의 의견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친절하게 받아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런데>라는 반전을 던지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동물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지 못해. 죽음을 예감하면서 고통받지는 않아.'

거기에 좀 더 확실한 힌트가 될 만한 구절도 나옵니다.

<인간과 달리>라는 명확한 조건 말이죠. 그렇게 되면, 벤담은 인간과 동물이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죠.

동물도 고통을 느끼니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던 이들의 의견을 모두 쓸어다가 확 던져버리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지요.

대개의 학생에게 이 제시문을 주면, 중간에 등장한 <그런데>와 <하지만> 세트만을 보고 '아하! 역시 인간과 동물은 같다는 것이구나'하고 말아버립니다.

워낙 복잡한 구성처럼 보이는지라 어디서 반전이 오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대표적인 제시문 몇 가지를 놓고 독해 방식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 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