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진보를 낳는다?

수능 이후 치러지는 수시 2차 전형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학은 바로 고려대학교이다.

수시 집중현상이 확연한 2011학년도 입시의 특징은 그 어느 때보다 경쟁률이 높은 상황이다.

그런데 고대는 수능시험 최저 등급이 2개 영역 이상 2등급 이내의 요건만 충족시키면 되므로 정시의 경우 수도권 내 대학 합격이 어려운 학생이라도 논술고사만 잘 본다면 고대라는 명문대 진학을 꿈꿔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도전할 만한 학교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대는 전통적으로 논술고사의 비중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간 동일한 유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신과 정시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하더라도 준비하는 수험생들 입장에서는 유리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난이도가 다른 대학에 비해 수험생들을 힘들게 하는 문제임은 틀림없으나 최근 치러진 수시 1차 논술고사들을 보면 기출이나 모의유형과 조금씩 다른 문제를 출제한 다른 대학들에 비해 유형면에서는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장점이다.

금년 2011학년도 대비 예시문제에서도 1문항이 늘어났지만 큰 변화가 없다고 학교 측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숙지하면서 준비한다면 꼭 그렇게 어렵지만도 않을 수 있다.

또 매번 논술백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예시문제에서 제시된 유형과 배점이 변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2010학년도 기출문제 역시 숙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려대학교는 이번 수시 2차 일반전형에서 1436명을 논술고사를 중심으로 선발한다.

단일 전형으로 가장 많은 학생을 선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아무리 경쟁률이 높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논술 준비에 힘써야 할 것이다.


※ 아래의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1 근대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은 어떤 것이 정립, 반정립, 종합이라는 3요소로 특징지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전개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먼저 정립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관념이나 이론 또는 운동이 존재한다.

그러한 정립은, 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한정된 가치밖에 없으며 또 여러 약점이 있을 것이므로 종종 대립물을 산출할 것이다.

이 대립되는 관념이나 운동은 처음의 것, 즉 정립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반정립이라고 한다.

정립과 반정립의 투쟁은 어떤 해결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 해결은 정립과 반정립 각각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모든 장점을 보존함으로써, 또한 양자에게 제약을 가하고 있는 모든 약점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정립과 반정립을 초월한다.

제3의 단계인 이 해결을 종합이라고 한다.

일단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 종합은 또다시 변증법 3요소의 1단계가 될 수 있다.

즉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도달한 특수한 종합이 일면적이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종합은 다시 정립으로서 새로운 반정립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점은 적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오해와 혼란은 모순에 대한 변증법 논자들의 부정확한 표현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모순이 사고의 역사에서 최고의 중요성을 갖고 있고, 매우 생산적이며, 실로 사고가 진보하기 위한 원동력이라고 본다.

변증법 논자들은 생산적인 모순들을 회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순이란 세계 도처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불가피하다는 주장까지 한다.

이러한 주장은 전통적인 논리학의 이른바 모순율, 즉 모순되는 두 진술이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원리에 대한 공격이 된다.

변증법 논자들은 모순의 유익함에 호소함으로써 전통적인 논리학의 이 법칙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변증법이 새로운 논리학이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변증법 논자들에 의하면, 모순은 유익하거나 창조적이거나 진보를 낳는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도 인정했다. 그런데 모순의 창조성은, 우리가 진술들 간의 모순을 허용치 않고 모순이 내포된 이론은 어떤 것이든지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바꾸어 모순을 묵인하면, 모순이 그 즉시 모든 다산성을 잃고 만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순은 이제 더 이상 지적인 진보를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순을 묵인하면 우리 이론이 갖고 있는 모순이 지적된다 하더라도 이로 인해 이론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순을 용인하면 모든 비판은 그 힘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모순을 용인할 경우, 비판은 물론 모든 지적인 진보 역시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변증법 논자들에게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모순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단순히 다산성 때문이라면 모순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변증법 논자들이 모순을 굳이 받아들인다면 모순은 무익한 것이 될 것이고, 합리적인 비판과 토론 및 지적인 진보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모순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의하면, 우리는 모순을 피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탐색하게 된다.

더구나 이 결의는 완전히 정당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순을 용인할 경우 그 어떤 종류의 과학적인 활동도 포기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과학의 전면적인 붕괴를 뜻하게 되리라는 것을 쉽게 논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모순되는 두 진술을 인정할 경우, 어떠한 진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밝힐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모순되는 한 쌍의 진술로부터는 어떠한 진술이라도 타당하게 추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순율은 모순이 자연, 즉 사실의 세계에서는 결코 생길 수 없으며, 모든 사실은 서로 모순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예컨대 양전기와 음전기가 서로 모순된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요 애매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모순의 실례는 다음의 두 문장일 것이다. 즉 "여기에 있는 물체는 1938년 11월 1일 오전 9시와 10시 사이에 양전기를 띠고 있었다.

"는 문장과, 같은 물체에 대해서 그것이 같은 시각에 양전기를 띠고 있지 않았다는 문장이다. 이것은 두 문장 간의 모순이다.

그것에 대응하는 모순적인 사실은 하나의 물체가 동시에 양과 음 쌍방의 전기를 띠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음전기를 띤 물체를 당기는 동시에 당기지 않는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모순적인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 스탈리니즘에 있어서의 마틴 루터는, 아직 없다. 크렘린의 서슬에 맞선 사람은, 이단 신문소에서 화형이 되었다. 권위는 아직도 튼튼하다.

하느님이 다시 온다는 말이 2,000년 동안 미루어져 온 것처럼, 공산 낙원의 재현은 30년 동안 미루어져왔다.

여기까지가 그가 알아볼 수 있었던 벼랑 끝이었다.

벼랑을 뛰어넘거나 타고 내리지도 못했을뿐더러, 이 무서운 밀림에 과연 얼마나 한 자리를 낼 수 있을지, 자기 힘에 대한, 지적 체력에 대한 믿음이 자꾸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북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물음을 누군가와 힘을 모아 풀어나간다는 삶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벌써 전쟁이 나기 전에 알고 있던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참을 차비가 되어 있었다. 역사의 속셈을 푸는 마술 주문을 단박 찾아내지 못한다고 삶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참고, 조금씩, 그러나 제 머리로 한 치씩이라도 길을 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그는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북조선 같은 데서, 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의 처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이명준은 자기한테 돌아온 운명을 한탄했다.

적어도 남만큼 한 충성심을 인정받으면서, 자기가 믿는 바대로 남은 세월을 조용히, 그러나 자기 힘이 미치는 너비에서 옳게 써나간다는 삶조차도 꾸리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제국주의자들의 균을 묻혀가지고 온 자로서, 일이 있을 적마다 끌려나와 참회해야 할 것이었다.

마치 동네 안에 살면서도 사람은 아닌 문둥이처럼. 그런 처지에서 무슨 일을 해볼 수 있겠는가.

이것이 돌아갈 수 없는 정말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남녘을 택할 것인가?

명준의 눈에는, 남한이란, 키르케고르 선생 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다.

미친 믿음이 무섭다면, 숫제 믿음조차 없는 것은 허망하다.

다만 좋은 데가 있다면, 그곳에는,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정말 그곳은 자유 마을이었다. 오늘날 코뮈니즘이 인기 없는 것은, 눈에 보이는, 한마디로 가리킬 수 있는 투쟁의 상대-적을 인민에게 가리켜 줄 수 없게 된 탓이다.

마르크스가 살던 때에는 그렇게 뚜렷하던 인민의 적이 오늘날에는, 원자 탐지기의 바늘도 갈팡질팡할 만큼 아리송하기만 하다.

가난과 악의 왕초들을 찾기 위하여, 나뉘고 얽히고설킨 사회 조직의 미궁 속을 헤매다가, 불쌍한 인민은, 그만 팽개쳐버리고, 예대로의 팔자풀이집, 동양철학관으로 달려가서, 한 해 토정비결을 사고 만다.

일류 학자의 분석력과 직관을 가지고서도, 현대사회의, 탈을 쓴 부패 조직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드는 판에, 김 서방 이 주사를 나무라는 건, 아무래도 너무하다. 그래서 자유가 있다.

북녘에는, 이 자유가 없었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없었다.

그건 제 멋 짓밟기다.

남한의 정치가들은 천재적이었다.

들어찬 술집마다 들어차서,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으랴고 왔던가를 가슴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대중을 위하여, 더 많은 양조장 차릴 허가를 내준다.

갈보장사를 못 하게 하는 법률을 만들라는 여성 단체의 부르짖음은 그날치 신문 기사거리를 만들어 주는 게 고작이다.

그들의 정치철학은 의뭉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데로 풀리는 힘을 막으면, 물줄기가 어디로 터져나올지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에겐, 진심으로, 교회에 나가기를 권유하고, 외국에 보내서 좋은 가르침을 받게 하고 싶어한다.

이런 사회. 그런 사회로 가기도 싫다. 그러나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박헌영 동지가 체포되었다 하오. 전해듣게 된 그 흉한 소식. 아버지.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짐승이었다.

그때, 중립국에 보내기가 서로 사이에 말이 맞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얼이 빠져 주저앉을 참에 난데없이 밧줄이 내려온 것이었다.

그때의 기쁨을 그는 아직도 간직한다. 판문점. 설득자들 앞에서처럼 시원하던 일이란, 그의 지난날에서 두 번도 없다. [중략]


모순은 사물 그 자체의 본질 속에 존재한다?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였던 게 틀림없다.

큰일 날 뻔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 가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었다.

밤중.

선장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른 손목에 찬 야광시계를 보았다. 마카오에 닿자면 아직 일렀다.

"무슨 일이야?"

"석방자가 한 사람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

"응?"

"지금 같은 방에 있는 사람이 신고해와서 인원을 파악해 봤습니다만 배 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

선장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물었다.

"누구야, 없다는 게?"

"미스터 리 말입니다. "

이튿날.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3,000톤의 몸을 떨면서, 한 사람의 손님을 잃어버린 채 물체처럼 빼곡히 들어찬 남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3 여기 두 종류의 속담이 있다.

하나는 "빵 반쪽이라도 있는 것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 "다수에 대항하는 소수는 반드시 패한다.

"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쇠보다는 강하지만 파리보다 약한 존재이다. " "적보다는 친구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전자의 속담들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데 비하여 후자는 누가 봐도 명백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심리학자인 펑카이핑과 나는 후자의 속담 유형이 미국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흔하게 발견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우리는 미시간대학과 베이징대학의 학생들에게 그와 같은 일련의 속담들을 제시해주고 각 속담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를 평가하게 했다.

그 결과 미국 학생들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 속담들을 더 선호한 반면, 중국 학생들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속담들을 선호했다.

이러한 차이가 중국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보다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속담들에 더 친숙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두 나라 사람 모두에게 친숙하지 않은 유태인 속담을 이용하여 또 다른 연구를 수행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즉, 모순을 포함하지 않은 속담보다 모순을 포함한 속담에 대해서 중국인들의 선호가 훨씬 더 높았다.

'모순에 대한 선호'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는 매우 뿌리 깊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변증법적 사고라 부를 만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특징은 모순이 되는 주장들을 타협을 통해 수용하는 것이었다.

모순되는 두 주장 모두에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그 사고방식의 핵심이다.

동양인들의 생각에, 우주는 정적인 곳이 아닌 역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곳이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대립,역설,변칙이 늘 발생하며, 신구 · 선악 · 강약이 모든 사물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

대립은 사실상 서로를 완성시키고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도교에서는, 모순 관계에 있는 두 주장들이 역동적인 조화의 상태로 존재하며, 서로 대립적인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상호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노자(老子)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추한 것이 있기 때문이고, 착한 것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착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생기게 하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은 서로 성립하게 하며,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하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은 서로 기대고 있다. "라고 하였다.

서양 사고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동일률'은 상황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일관성을 강조한다.

즉, A는 맥락에 관계없이 A인 것이다. 또한 '모순율'은 한 명제와 그 명제의 부정이 동시에 참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즉,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현대의 동양인들이 서양인들의 논리학 원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순전히 형식 논리상 모순된다는 이유로 결론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개념이란 단지 사물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을 동시에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4 지금까지 헤겔의 논리학이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모순이라는 용어를 매우 독특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헤겔은 "객관은 여러 가지 것의 완전한 자립성인 동시에 구별되는 것의 완전한 비자립성이라는 절대적 모순"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모순은 명백히 진술이나 판단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거짓인 진술 또는 판단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헤겔은 객관적인 것,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 자체에 있는 사태를 보여 주기 위해서 모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부류의 모순을 '변증법적 모순'이라고 명명하였다.

사물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오류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본질 속에 모순의 기원이 있다고 헤겔은 생각했다.

사물들이 동일한 관계에서 하나의 특징과 그에 모순되는 반대물을 동시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객관적 현존으로 모순을 이해할 때 그에 대한 진술은 형식상 모순된 명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철학사상 최초로 실재적 대립을 모순으로 표현했고, 관념론의 입장에서 모순에 대하여 뚜렷한 의미를 부여했으며, 모순을 객관적 사태로 파악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모순 개념은 사회적 모순을 바라보는 관점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모순은 발전과정의 진보와 새로운 것의 등장에 유리한 주객관적 전제들이 밝혀짐으로써 생긴다.

그것은 모든 운동을 특징짓는 안정성과 변화의 보편적 모순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형태이다.

발전과정에서는 늘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사이의 모순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의 양극성은 동일한 하나의 사실 연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된다.

결국 모순은 역동적 대립관계의 발전 국면을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항상 새롭게 산출되는 극성(極性)의 성숙한 국면을 나타낼 수 있다.

많은 변증법적 모순의 현상들이 문학에서 갈등의 형태로 드러난다. 갈등은 대립되는 이해와 경향의 일시적인 상호배척이며, 사회적 관계의 발전과 형태 변화의 역동성을 분명하게 반영한다.

사회의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발생하는 모순은 문학적으로 서술되고 묘사되는 과정에서 그 내적인 필연성을 드러낸다.

즉 문학적 형상화는 모순들의 일반적 구조에 따라 모순의 전개과정과 해결을 지향하여, 다양한 모순들에서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일치에 이른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모순 개념은 무엇이 참된 모순인가에 관해서 독자적인 이해를 발전시켰다고 평가된다.



5 개인들의 합리적인 선택이 사회적으로도 합리적인 결과를 낳는가?

자원 고갈, 환경오염, 교통체증 등 현실의 많은 문제에서 우리는 개인의 합리성이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합리성의 역설'의 사례라 할 수 있다.

합리성의 역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두 사람의 개별적 의사결정이 자신의 이득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이득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갑과 을이 각자 선택지 A와 B 중에서 하나를 취한다.

이 경우,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네 가지 결과, AA(갑과 을 모두 A를 선택), AB(갑은 A를, 을은 B를 선택), BA(갑은 B를, 을은 A를 선택), BB(갑과 을 모두 B를 선택)가 가능하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 원칙 중 하나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최소의 이득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최소극대화 원칙'이라 한다. 가령, 갑이 A를 선택할 때, 을도 A를 선택하면 갑은 4의 이득을 얻고 을이 B를 선택하면 갑은 1의 이득을 얻는다고 하자.

이때 갑이 A를 선택함으로써 얻는 최소 이득은 1이다. 갑이 B를 선택할 때, 을도 B를 선택하면 갑은 2의 이득을 얻고 을이 A를 선택하면 갑은 3의 이득을 얻는다고 하자.

이때 갑이 B를 선택함으로써 얻는 최소 이득은 2이다. B를 선택할 때 얻는 최소 이득이 A를 선택할 때 얻는 최소 이득보다 크므로 갑은 최소극대화 원칙을 따른다면 B를 선택할 것이다.

'사회적 합리성'은 더 이상 사회구성원들의 이득을 동시에 높일 수 없을 때 달성된다.

예를 들어, AA의 경우 각자 4의 이득을 얻고, BB의 경우 각자 3의 이득을 얻는다고 하자.

아울러 AB와 BA에서는 A를 선택하는 사람은 5의 이득을 얻고 B를 선택하는 사람은 1의 이득을 얻는다고 하자.

이때 갑과 을 모두 BB보다 AA에서 더 큰 이득을 얻으므로 BB라는 결과는 사회적 합리성을 결여한다.

반면, AB나 BA 어느 것도 AA에 비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더 큰 이득을 주지 않으므로, AA라는 결과는 사회적 합리성을 가진다.

최소극대화 원칙에 따른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적 합리성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할 때 '합리성의 역설'이 발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세 가지 상황을 살펴보자.

상황 1: 이득이 큰 순서대로 결과를 나열하면 갑의 경우에는 BA, AA, BB, AB이고, 을의 경우에는 AB, AA, BB, BA이다.

상황 2: 이득이 큰 순서대로 결과를 나열하면 갑의 경우에는 BA, AA, AB, BB이고, 을의 경우에는 AB, AA, BA, BB이다.

상황 3: 이득이 큰 순서대로 결과를 나열하면 갑의 경우에는 AA, BA, BB, AB이고, 을의 경우에는 AA, AB, BB, BA이다.



Ⅰ. 제시문 (1)을 요약하시오. (15점)

Ⅱ. 제시문 (4)의 논지를 밝히고, 제시문 (1)과의 관계를 설명하시오. (30점)

Ⅲ. 제시문 (3)에 나타난 동양적 사고의 관점에서 제시문 (2)의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에 관해 논하시오. (30점)

IV. 제시문 (5)의 상황 1, 상황 2, 상황 3 각각에서 갑과 을이 최소극대화 원칙을 따를 경우 어떤 선택을 할지 분석하고, 그러한 선택의 결과를 합리성의 역설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시오. (25점)

김은희 S · 논술 선임연구원 Jinenji1@naver.com



※ 2011학년도 고대 예시문제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다음호 생글생글에서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