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없다"
[경제교과서 뛰어넘기] (30) 거시 경제학의 탄생
"어쩌면 난 경제학에 소질이 있는지도 몰라."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 1883~1946)의 이 말은 '시간 때우기 위해' [국부론]을 썼다는 스미스의 말과 더불어 가히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로 손꼽힐 만하다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中…….


케인스가 누구인지 안다면 실로 충격적이고 놀라운 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케인스가 1905년 공무원 시험을 봤으며 104명 중에서 2등을 했지만,수학과 경제학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 점이 우리 같은 범인에게 주는 희망인 것 같은데 그 다음을 보면 '역시 천재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참된 지식이란 성공을 가로막는 장벽에 불과하구나. 내가 이 사람들을 도리어 가르쳐야겠다. "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썩지 않기 위함인지 물은 쉴 새 없이 흐르며,담긴 강의 모양에 따라 변한다.

그런 경제학의 강물에 물줄기를 하나 만들어 물길을 바꿔놓았으며,큰 웅덩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케인스다.

케인스는 미시경제학이라는 물줄기에서 거시경제학이란 새로운 물길을 만들었다.

이런 배경에는 세계 대공황이 자리 잡고 있으니,세계 대공황은 케인스쇼를 알리는 커다란 무대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케인스 이전의 경제학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공부했던 미시경제학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경제학이 학문으로 세상에 태어나도록 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1723~1790)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 [국부론]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가격의 시장 조절 기능을 대표하며 '자유방임시장'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상호 작용을 통해 가격이 결정된다. 부족하면 가격이 올라가고 남게 되면 가격이 내려가면서 '부족과 남음'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경제학은 알프레드 마셜(1842~1924)의 [Principle of Economics]에서 우리가 배웠던 미시경제학의 모양으로 재탄생했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요와 공급의 그림,한계적 개념,탄력성,세테리스 파리부스,그리고 장기와 단기에 대해 언급했다.

이때까지 경제학자들은 세이의 법칙이란 것을 믿고 있었다.

세이의 법칙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생산자인 우리 부모님은 주말에 자녀와 함께 소비자가 된다.

생산을 통해 벌어들인 돈은 결국 지출되게 마련이고 시장 전체의 수요와 공급은 일치하게 된다.

만약 사과 시장의 상품이 남는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사과 가격이 하락할 것이고 사람들이 사과를 더 사먹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셜의 제자인 케인스의 생각은 달랐다.

임금이나 가격이란 것이 그렇게 단기에 신축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1929년 뉴욕증시 폭락으로 막을 올린 세계 대공황이라는 연극은 지속적인 물가 하락인 디플레이션과 함께 1933년 실업률 25.2%(1929년 3.2%),국민총생산 약 40% 감소(1929년 대비)라는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이상하지 않은가?

7년간의 디플레이션이란 것이!

기존의 경제학에 따르면 소비가 줄면 상품이 팔리지 않아 불황이 오겠지만,소비가 줄었다는 것은 저축이 늘었다는 것이며,저축이 늘면 이자율이 떨어지고,이는 기업의 투자를 자극해 경제가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

만약 투자가 늘어나지 않아도 문제는 아니다.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되면 기업이 생산을 줄이면서 임금과 가격을 낮출 것이다. 가격이 하락하면 다시 상품은 잘 팔릴 것이며 낮은 임금에 실직자를 다시 고용해 생산을 늘린다. 이런 가격의 조정과정이 대공황 7년 동안 고장이 난 것이다.

기존의 경제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여기서 보듯이 기존의 경제학이란 미시경제학에서와 같이 가격과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는 학풍을 말하며 이를 고전학파라고 부른다.

이들의 대공황에 대한 시각은 고전학파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I Fisher)가 1929년 뉴욕타임스에 '주가 폭락은 너무 걱정할 것이 없고 곧 회복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데서도 잘 읽을 수 있다.

케인스는 1936년에 출간된 그의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고전학파의 설명과 달리 가격,특히 임금이 상당기간 신축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세이의 법칙을 부정하며,수요가 공급을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케인스가 보기에 대공황은 유효수요가 부족해서 발생한 것이었다.

다시 대공황으로 돌아가 보자. 1929년 이후 실업이 증가하고 생산이 감소했다.

실업이 증가하면 임금이 하락하고 고용이 다시 증가해야 하지만 임금 인하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임금은 수시로 변하지 않고 장기 계약(연봉은 1년 단위 조정)으로 결정된다.

임금을 내리려고 하면 노동조합도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실업이 늘어도 임금이 쉽사리 내려가기 어렵고 고용이 시장의 힘에 의해 다시 증가하기 어려울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대공황 당시 실질이자율은 대부분 마이너스였다. 명목이자율보다 디플레이션율이 더 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기업의 투자는 살아나지 않았다.

투자가 이자율에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케인스에 따르면 투자는 이자율뿐만 아니라 기업의 야성적 충동에 반응한다. 그런데 불황이 계속 심화되는 상황에서 어떤 기업이 투자를 하겠는가.

실업이 만연하면 소득이 줄고 소비가 줄어든다.

투자도 줄어든 상황이다.

실업으로 소득이 줄고 수요가 없어 물건이 팔리지 않는 상황이 7년간 지속된 것이고 케인스는 수요가 창출되면 이 비극은 막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간의 소비나 투자가 여력이 없다면 마지막 기댈 곳은 정부였고 정부가 대규모 지출을 늘리면 수요가 창출되면서 불황을 탈출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면서 이후 케인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케인스학파라고 불렀다.

따라서 케인스학파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가격의 경직성,불완전한 시장의 가능성을 열어둔 학파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기존의 전통에 따라 가격과 시장의 완전성을 따르는 학파를 고전학파라고 부른다.

대공황 이후 케인스의 생각은 힉스와 한센 등의 학자에 의해 IS-LM 모형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또 다른 천재 경제학자인 사무엘슨에 의해 신고전파 종합이라는 모양으로 재탄생한다.

대공황의 연극에 조연도 아닌 관람객이었던 고전학파의 명맥은 통화주의자라로 불리는 프리드먼에 의해 이어지게 된다.

이후 고전파적 명맥은 루카스,사전트 등의 합리적 기대로 이어지며,프레스컷이라는 걸출한 학자에 의해 실물경기변동론으로 확대되었다.

케인스의 추종자들도 지속적 연구를 계속해 가격의 경직성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지루하고 긴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

거시경제학은 크게 두 개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가격과 시장을 신뢰하는 고전학파적 시각과 가격이 경직적일 수 있고,독점이나 독점적 경쟁시장이 존재하는 상황을 설정하는 케인스학파적 시각이 그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처럼 다르기 때문에 양쪽의 경제에 대한 처방과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단기적 현상은 케인스적 견해가,장기적 현상은 고전학파적 견해가 세상을 더 잘 설명하는 것 같다는 필자의 대학 교수님 말씀이 떠오른다.

[경제 교과서 뛰어넘기]에서 이 모든 문제를 설명하고 다루려면 거시경제학 책을 써야 할 판이며,필자들은 그런 역량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물론 생글생글에서도 지면을 할애할 생각이 전혀 없겠지만 말이다.

여기에 고민이 있다. 무엇을 얼마나 알려줘야 할 것인가.

두 학파 간에 의견이 달라 정답이 없는 이런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필자들의 회의 끝에 총수요와 총공급에 대해 간략히 알려주고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핵심만을 설명한 후 경제 성장에 관한 간단한 원고로 '뛰어넘기'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단 더 쉽고 직관적인 모형을 선택하기로 했으며,이는 케인스적 시각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내용들은 다분히 케인스적일 수 있으며,Lieberman과 Hall이 쓴 [경제학 원론]을 모태로 원고를 써나갈 것이다.

차성훈 KDI 경제정보센터 전문연구원 econcha@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