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된 자본주의 구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 1번 제시문 분석 및 답안작성
[논술 기출문제 풀이] 2011학년도 서강대학교 모의 논술문제 풀이(下)
제시문 (가)에는 '전지구적인 보살핌'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비키는 자신의 아이들이 필리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대학까지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기 위해 베벌리힐스에서 주급 400달러짜리 가정부를 하고 있습니다.

눈물나는 모성애에 대해 라첼 파레나스라는 어려운 이름의 학자는 '전 지구적인 보살핌'이라고 명칭을 부여합니다.

비키는 힘든 와중에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쏟지 못하는 사랑을 두 살배기 미국 아이에게 쏟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면접과정에서 비키는 5명의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자신은 자신의 아이를 키운 적도,보살핀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결국, 이렇게 하여 '전 지구적인 보살핌의 사슬'이 완성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자신의 아이를 자신이 보살피지 못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보살핌'이란 것은 가족적 행위입니다. 인류 역사상 언제나 그래왔듯,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챙기지요.

모든 인간은 한 엄마의 자식입니다.

하지만, 세계화된 환경은 보살핌의 대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고유한 특성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후진국의 어머니는 선진국의 아이를 돌보고, 후진국의 어머니는 번 돈으로 다시 자신의 아이를 돌봐줄 더 어려운 상황의 어머니를 찾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서로 남의 아이를 맡아 보살피게 되는 사슬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국경을 넘게 되면서 '전 지구적인(GLOBAL)'이라는 명칭을 받게 됩니다.

비키 디아즈의 이야기가 끝나면서 화자가 이런 사례의 본질은 무엇인지 핵심 주제를 꺼냅니다.

<세계 자본주의는 무엇이든 그것이 만지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모든 것을 만지는데, 그 중에는 내가 얘기하는 '전 지구적인 보살핌의 사슬'도 포함된다.

이것은 유급 혹은 무급의 보살피는 일을 바탕으로 한 전 세계 사람들 간 일련의 개인적 연결이다. >

이것을 세계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부여했군요. 즉, 세계 자본주의라는 핵심 변화가 '전 지구적인 보살핌의 사슬'과 같은 사태를 만든 것이 됩니다.

(세계화 make 특정한 사태/사례)경제적 조건이 삶에 있어서 가장 우위에 놓이게 됨에 따라, 그리고 그 경계가 무너짐에 따라 양육과 같은 고유한 조건들조차 국경을 넘나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의 고유한 삶의 범위는 전 지구로 확장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일까요?

제시문 (나)는 <경쟁의 세계에서 속도는 사회적 신분의 지표가 된다>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높은 계급의 사람이 되는 세상입니다. 효율성을 앞세우는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빠른 것은 곧 비싼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곧 돈을 번다는 뜻이지요.

이런 계량화된 사고는 자동자 운행자의 시간을 시간당 3만원의 가치로 환산됩니다.

물론 그 반대편의 풍경의 가치는 무형의 가치이므로 무시됩니다.

이렇듯, 생산성이 있는 대상과 그렇지 못한 대상 사이에 우열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자, 그리고 화자는 이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는군요.

<이와 매우 유사한 것이 서구화된 경제구조라 할 수 있다.

금융을 주도하는 자들이 그 시스템의 혜택을 누리는 동안, 그 지배력에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무산자들은 고용 불안과 빈곤에 시달린다.

제3세계 외채 문제의 전문가 수전 조지는 금융자본이 얼마나 빨리 이동하는지(하루에 10억 달러 이상 이동한다)를 보여주면서, 세계는 '빠른 계급'과 '느린 계급'으로 양분되어 있고 빠른 계급은 혜택을 누리지만 느린 계급은 채무의 늪에 빠진다고 주장한다. >

속도를 사용하는 계급의 차이와 같이 곧 금융지배권력을 가진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의 관계는 뺏고 빼앗는 관계가 됩니다.

세계화는 이렇게 빈부격차를 가속화시킵니다. 이제는 한 나라 내에서의 계급갈등이 아닌, 전 세계적인 계급갈등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제시문 (다)는 첫문장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반다나 시바는 다국적 기업에 의한 종자의 독점이 인류가 현재 직면한 최대의 위협이라고 한다. >

그러면서 계속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다국적 기업의 독점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이런 기업들이 고유한 조건으로서의 다양성을 무너뜨리고, 종자의 균질화를 만들고 있답니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 '종자 보존 네트워크'같은 운동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네요.

결국, 여기서는 (가)와 같은 사례가 벌어지는 것이 다국적 기업이 경제논리를 앞세워 고유한 문화적, 생태적 다양성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겠네요.

물론,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아니 "비키 디아즈씨랑 다국적 기업이 무슨 관계가 있지요?

" 물론 없습니다. 둘 다 세계화된 현대사회 속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다국적 기업과 그에 의해 삶의 양태가 변한 비키 디아즈씨가 있을 뿐이지요.

이제 답안을 작성하기 위해 내용의 조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는 속도이야기, (다)는 다국적 기업의 이야기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들이 왜 (가)와 같은 사례를 만들었는지 쓰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보면 비키 디아즈씨의 이야기, 혹은 세계화에 따른 삶의 형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 속도나 다국적 기업은 말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접 이것을 연결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자, 이제 우리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내용을 정리해야 합니다.

단순히 (가)(나)(다)의 직접적인 요약만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와 (다)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핵심적인 동작이 (가)에도 드러나야 합니다.

다만 (가)를 <세계화로 인해 인간의 삶의 조건이 뒤바뀌고 있다>라고 하기엔, (나)가 보여주는 '착취'의 모습이나, (다)가 보여주는 '박탈'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가)도 '착취'나 '박탈' '강요'의 뉘앙스를 넣는 것입니다.

물론 (가)에 애초에 그런 외연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내연을 조정(튜닝)하는 것이지요.

⊙ 2번 문제 제시문 분석 및 답안작성

제시문 (나)(다)(라)는 공통점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같은 방향의 제시문이로군요. 우리는 이미 (나)(다)를 보았으므로, 이것이 대략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가 더해지면서 어떤 식으로 조정될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이 방향을 그대로 끌고 가겠지요.

그리고 해결방안은 (마)에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라)를 먼저 읽어봐야겠습니다.

제시문 (라)는 농업이 제3세계의 대다수 사람의 생계수단임에도 불구하고, 현 시점에서 장애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고 폭로하면서 글이 시작됩니다.

농업의 가치가 이렇게 평가절하되었으니, 가치를 좀 인정해달라는 주장이죠.

현재로서는 다국적 기업들의 대량생산 작업으로 인해 종자가 균일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종자에 대한 권리도 독점하고 있지요.

가격은 싸졌지만, 엄청난 유전자변형이 가해지고, 낮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은 하급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화자는 탈중심화된 개발방식을 요청하면서, 이런 방식만이 3세계 농민들에게 제대로 된 생계수단을 유지시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태적인 농업과 지역적 조건에 맞는 농업을 위해 정부가 인센티브와 같은 적극적인 국가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다)(라)는 결국 모두 세계화된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절멸되어 가고 있는 가치들을 되살리자, 뭐 이런 식의 주장입니다. 중심화가 아닌 다양화, 탈중심화로 말이지요.

(마)에는 이런 메시지가 담길 가능성이 크군요.

제시문 (마)의 첫문단은 남성적 가치가 지배하던 근대(modern) 사회를 보여줍니다.

완전하고 지배적인 남성과 불완전하고 비지배적인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충만하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화자는 이러한 과거의 흐름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방향을 바꿉니다. 결국 화자는 느낌, 감정, 협력 뭐 이런 것을 중요시하자는 주장인 셈이지요.

바바라 맥클린톡의 사례는 이런 여성적 특징이 좀 더 과학적(=생산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맥클린톡은 연구대상을 객체로 전락시키지 않고, 자신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시킵니다.

나와 너의 이분법적 도식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세계화된 자본주의 구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마)의 도식에 따르면 이런 문제는 모두 근대적 특징에 불과한 것입니다.

앞부분에 등장했던 시대적 특징들이 문제점이 되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뒷부분, 즉 여성적 가치의 재고가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므로, 단어는 '여성적 가치'가 아니라, '탈중심적' 뭐 이런 것이 되겠지요.

<남성적 세계가 가지고 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적 가치가 해결을!>

<지나친 중심개발식 논의가 가져온 문제는 탈중심적 논의가 해결을!>


동일한 공간에 대한 동·서양의 사고의 차이는?

⊙3번 문제

인간의 집은 한 공동체의 문화 체계를 반영한다.

생리적 욕구, 정서적 동기 이외에 문화가 집을 짓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듯이 집은 원칙적으로 한 공동체가 지닌 우주상(宇宙像)을 본떠서 지어진다.

집은 우주의 작은 모상(模像)이다.

가령 시베리아 원주민의 저 유명한 파오는 하늘과 땅을 줄여놓은 모양이라고 생각된 것이다.

깔때기 모양의 파오, 그러니까 커다란 팽이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은 같은 모양의 파오에 있어 그 원추형의 꼭지점은 북극성 자리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하여 하늘이 북극성을 큰 못으로 삼아 걸려 있는 커다란 천막이듯이, 파오의 지붕은 원추의 꼭지점에 걸린 작은 천막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늘이란 천막이 대지를 덮고 있듯이 원추형의 지붕은 방바닥이라는 작고 좁은 대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하늘과 땅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작은 우주 공간에 살게 되는 것이다.

- 김열규, 「한 그루 우주나무와 신화」

수미산 세계의 모사(模寫)로서 조선시대 사찰 배치의 서사 구조는 불교적 사유에 있어서의 공간 인식을 매개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핵심이라 할 사성제(四聖諦)의 진행 과정을 반복한다.

1) 사찰 건축에 있어서 속세의 연장이자 사찰의 경계가 시작되는 진입 공간은, 사바 세계의 고통을 인지함으로써 깨달음의 길을 출발하는 고성제(苦聖諦)의 단계에 해당한다.

이후에 연속될 집(集), 멸(滅), 도(道)의 과정을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2) 이어 나타나는, 산문의 반복과 중첩은 공간에 대한 반복적 정화, 참례자의 지속적인 수행의 과정을 의미하며, 이때의 수행이란 곧 자신 안에 존재하는 고(苦)의 원인을 밝히고 이를 끊어내는 과정이므로 산문의 통과는 집성제(集聖諦)의 단계로 해석된다.

3) 멸성제(滅聖諦)는 깨달음의 실재성으로, 사찰의 중심을 이루는 불전 영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산문의 통과 이후에 나타나는 마당[佛國土]과 부처가 존재하는 불전, 그리고 화려한 불전의 장엄은 '멸(滅)하여 성불한 자'(석가여래)와 그가 주재하는 불국토의 지고지순함을 보여줌으로써 중생 역시 깨달음의 길에 나아가도록 북돋우는 멸성제의 단계가 된다.

4) 보살전(菩薩殿)의 전각들은 도성제(道聖諦)를 구현하는 공간들로, 참례자는 화엄경의 선재동자와 같이 이러한 전각들을 순행하면서 각 전각들에 모셔진 보살의 인도를 따라 깨달음의 길에 나아가게 된다.

불전까지의 과정이 고(苦), 집(集), 멸(滅)의 단계로서 사유와 인식의 과정이라면 보살전의 과정은 보살의 회향(回向)과 중생의 실천행, 두 가지 지향의 결합을 통하여 중생이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해 나아가는 도성제의 단계이다.

- 양상현, 「조선시대 사찰 배치의 서사구조」


교회는 '세계의 중심'이자 '진리의 거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이어야 할 교회는 광장의 후미진 곳에 지어졌으며, '진리의 거처'는 중심선 위에는 없고 오히려 광장의 후문과도 같은 장소에 배치되었습니다.

(…) 그리고 광장 중앙은 자유로운 채로 방치해 두고자 했습니다.

거기에는 분수도 모뉴먼트도 설치되지 않았으며, 권력자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물이나 조각물 같은 것도 놓이지 않았습니다.

광장에서는 사회적 언어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인은 이것에 무척 민감했지요.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곳에 서사적 환상이나 허튼 생각을 되도록 억제하고,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인의 동의를 얻을 때마다 거기에 사회적 의미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광장이 광장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또 다른 종류의 토폴로지가 하나 연결되어야만 했습니다.

(…) 인간의 생명은 잠깐 동안의 생존만이 허용되는 덧없는 것이며, 인간이 만드는 사회는 우주 속에 생겨난 보잘것없는 자율성을 가진 작은 섬에 불과합니다.

사회에는 사회의 '밖'이 있고, 인간의 사고에는 이해를 초월한 '밖'이 있지요.

그 '밖'이란 인간이 만드는 사회의 공공성을 초월한 우주적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일찍이 사회적 공공성은 우주적 공공성으로 통하는 통로가 없는 한 인간을 에워싼 광대한 자연 속에서 의미를 잃는다고 생각했지요.

- 나카자와 신이치,「예술 인류학」

⊙ 3번 문제 제시문 분석 및 답안작성

문제조건이 그동안 보여지던 것과 정말 상이하게 다릅니다.

뭐 어차피 정해진 유형이 없는 것이긴 하지만, <아는 대로> 논술하라는 조건은 정말 뜬금없습니다.

차라리 3개가 서로 어떤 주제에 대해 어떻게 다르니까, 이에 대해 의미를 살피라고 했으면 조금이나마 친절했을텐데 말이지요.

어쨌든 제시문이 3개밖에 없으니 내용을 어떻게 불려서 1000자를 채울지 고민해야 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실전에 나온다면 학생도, 학교도 모두 난감하겠지요. 그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채점할까요?

과연 객관적인 채점이 가능이나 한 것일까요?

여러모로 고민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시문 (가)는 첫 부분에 강력하게 무언가 나오는군요.

<인간의 집은 한 공동체의 문화 체계를 반영한다. 생리적 욕구, 정서적 동기 이외에 문화가 집을 짓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듯이 집은 원칙적으로 한 공동체가 지닌 우주상(宇宙像)을 본떠서 지어진다. 집은 우주의 작은 모상(模像)이다. >

이 부분이 거의 전체의 이야기를 다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뒤는 <가령>이라고 하며 예를 들고 있을 뿐이지요.

시베리아 원주민의 파오는 우주를 그대로 담아놓은 것이지요. 뭐, 간단한 제시문입니다.

제시문 (나)는 한자가 많이 나오니 다소 당황스러울 듯합니다.

한자를 좀 더 잘 안다면 쉬울텐데 말이죠. 예를 들어, 모사(模寫)라는 단어는 '형식을 베끼다'는 뜻입니다.

즉, 첫 문장에 이미 여기도 거주공간이 결국 어떤 모티브를 베껴왔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윤리를 조금 공부한 친구들은 알겠지요.

고집멸도(苦集滅道)란 결국 다음과 같습니다.

① 고(苦) 세상은 고통이다.

② 집(集) 이러한 고통은 집착(욕심)으로부터 발생한다.

③ 멸(滅) 그러므로, 이걸 없애야(멸)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④ 도(道) 그러려면, 요렇게 수행해라.

자세한 해당내용들이 중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이런 전문적인 내용을 제대로 알리도 없을 뿐더러, 이런 걸 구구절절 요약해서 무언가 맞추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어찌됐든 사찰의 공간구조라는 것이 고집멸도라는 불교적 사유의 테두리 안에서 그대로 모사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제시문 (다)에는 모뉴먼트(monument · 기념비)나 토폴로지(topology · 위상기하학) 같은 생경한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 안 써도 되는 것을 해석도 안한 채 그냥 담았군요.

(다)는 교회가 세계의 중심이자 진리의 거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광장의 중앙은 오히려 자유롭게 방치되었답니다.

광장(아고라)은 사람들의 대화가 로고스(LOGOS · 언어-논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비로소 사회적 의미를 얻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나>로 전환되는 부분을 보도록 하지요.

여기에 왜 교회가 그토록 후미진 곳에 자리했는지 나옵니다.

광장은 이성의 광장이며, 사회적 활동의 공간입니다. 이곳은 분명 인간만의 공간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공간은 '밖'에 위치하게 된답니다.

교회는 결국 초월에 관한 장소이며, 신과 진리에 관한 공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역과 다른 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 통로(=교회)를 통해 우주적 공공성과 만나게 된다고 하는군요.

자, 그렇다면 이제 모든 해석이 끝났습니다.

이 짧은 제시문들로 어떻게 1000자를 채워야 할까요? 우선 비교부터 해야겠습니다.

내용을 풍부하게,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가 돼야겠지요.

문제조건이 무한대니, 우리도 그만큼 풍부한 포인트를 두어야 합니다.

서강대 측에서는 어떤 수준의 답안을 원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위 세 편의 제시문은 인간의 집과 절, 그리고 마을의 구조를 언급하고 있는 글로서, 인간의 주거 공간이 성스러움이나 아니면 종교적인 관점과의 상관성 속에서 구축되고 설계되어 왔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 편의 글은 그 세부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간 인식의 공통적 측면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공간 인식의 특성이라는 측면에서 위에 든 세 편의 제시문은 그 각각이 집에서부터 마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공간 구축이 성스러운 어떤 표본, 보다 큰 우주적 체계의 축도(縮圖)를 겨냥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내용의 글로 볼 수 있다.

세속 공간이든 신성 공간이든, 아니면 세속과 신성함이 공존하는 공간이든간에 인간의 삶의 무대는 신성함에 대한 일정한 관계 속에 놓인다고 하는 입장에서 말이다.

한편 위 세 편의 글은 보기에 동일한 공간 인식에 대한 동양적 사고와 그리스로 대표되는 서양적 사고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 글로도 해석된다.


즉 제시문 [가]와 [나]는 집과 같은 인간의 거처는 물론 사원과 같은 신성한 공간이 그 자체로 신성하거나 신성함을 경험하도록 조직화된 공간임을 말하고 있는 데 반해, 제시문 [다]는 일상적 생활 공간은 인간 중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설계하되,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편으로 우주적 공공성과의 연결 고리를 마련하고 있는 그리스적 세계관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마지막은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서 결론맺고 있습니다.

이 답안에 대해 서강대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 편의 제시문들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그리고 가능한 관계의 가짓수를 거론하는 것인데, 위 답안은 세 편의 글이 본질에 있어서는 공통되기도 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동양과 그리스의 공간인식 간 차이를 거론하고 있는 글로도 읽힐 수 있음을 밝히고 있고, 더 나아가 그 차이가 개인적 차원의 종교적 경험과 공동체의 사회적 삶의 신성함을 대비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요구하는 다양한 맥락을 비교적 무리 없이 지적 한 답안으로 판단된다. "

이용준 S · 논술 선임 연구원 sgsgnot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