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번의 경제위기 ‘예방주사’맞아 …룰라 대통령 시장 친화적 정책효과
[Global Issue] ‘고공성장'하는 브라질···모라토리엄 국가에서 세계5위 경제대국 되나
1998년 9월 말 브라질 재무부 청사.당시 페드로 말란 재무장관은 미국 정부 및 국제통화기금(IMF) 관계자들과 마주 앉아 "150억~210억달러의 긴급자금만 지원해준다면 외환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며 고개를 숙였다.

브라질 외환보유액이 320억달러였던 때였다.

12년이 흐른 지난달 24일 상파울루 증권거래소.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국영 석유기업인 페트로브라스의 상장을 기념하는 개장벨을 눌렀다.

이날 페트로브라스의 기업공개(IPO) 규모는 700억달러(약 80조원).세계 IPO 사상 최고였다.

이날 브라질의 외환보유액도 2735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과거 삼바와 축구의 나라로만 유명했던 브라질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AFP통신) 세계 주요국들의 재정위기로 더블딥(경기 상승 후 재하강)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지만 브라질은 9%가 넘는 고성장세로 오히려 경기 과열을 걱정할 정도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국가부도 위기까지 몰렸던 나라가 이젠 "5년 내 세계 5위 경제대국이 될 수 있다"(룰라 대통령)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다.

브라질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1조4800억달러로,스페인을 제치고 세계 8위에 올랐다.



⊙위기 통해 예방주사 맞았다

브라질은 1983년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1999년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섯 번의 경제위기를 겪었다.

이 시기 브라질은 정책 실패 등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결국 가장 최근의 경제위기였던 1999년 이후 경제 체질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브라질은 수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다양한 실험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학습효과를 체득했다"고 평가했다.

위기를 통해 예방주사를 맞은 덕에 경제체질을 변화시켰다는 설명이다.

브라질이 오랫동안 경제위기를 겪은 이유는 높은 물가,외채,재정적자 등 3고(高) 때문이었다.

특히 높은 물가상승률은 브라질 경제에 악몽이었다.

1999년 외환위기 때 물가상승률은 연 12%에 달했다. 정부는 고금리라는 칼을 빼들었다.

GDP 증가율이 2000년대 초반 제로(0) 수준이었지만 중앙은행은 오히려 19.75%까지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그 결과 물가상승률은 2002년 12.5%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해 2007년엔 물가목표치인 5%를 밑돌게 됐다.

게다가 오랫동안 고금리 정책을 실시한 덕분에 2008년 금융위기가 발발한 후 실시한 금리인하 정책은 제대로 빛을 볼 수 있었다.

재정건전화를 위한 긴축재정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공무원 연금제도를 개혁하고 방만한 지방정부 지출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2003년 4.6%에 달했던 GDP 대비 재정적자는 지난해 1.2%로 줄어들었다.

고금리와 재정긴축정책으로 위축된 경제엔 외국인직접투자(FDI) 활성화 정책이 숨결을 불어넣었다.

정부는 낙후된 북동부 및 미개발된 아마존 지역에 투자하는 외국 자본들에 수입세와 소비세의 80%까지 감면해 주는 인센티브를 실시했다.

게다가 '브라질 코스트'로 악명 높았던 각종 규제를 풀고 기업에 우호적인 환경을 제공하면서 1980년대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외국인 투자자들을 다시 유치할 수 있었다.

1995년 107억달러였던 FDI는 2008년 450억달러로 4배 넘게 증가했다.

이 같은 정책들은 2003년 취임한 중도좌파 출신 대통령인 룰라에 의해 본격화됐다.

그는 우파 정부가 1999년 외환위기 후 시행했던 정책들을 과감하게 계승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많은 남미 국가에서 좌파 정권이 포퓰리즘으로 치달았던 것과 달리 룰라는 지지세력으로부터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시장 친화적 정책을 택했다.

결국 이 같은 '룰라노믹스'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내년 퇴임을 앞두고 있는 룰라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금도 80%가 넘는다.

⊙탄탄한 내수시장과 강한 금융경쟁력

내수시장이 넓고 금융 산업이 발달한 브라질 경제구조도 금융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브라질 전체 GDP 중 내수 비율은 80%를 넘는다. 반면 수출은 14%에 불과하다.

수출 비중이 높은 다른 신흥 국가들과 비교된다. 수출 비중이 낮고 내수 비중이 높으면 대외 충격의 영향도 줄어들게 된다.

과거 브라질이 경험했던 수차례 위기와 달리 최근의 금융위기는 미국,유럽 등 선진국 경기 침체에서 비롯됐다.

대외 경기에 대한 변동성이 작은 브라질이 금융위기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던 이유다. 대표적으로 강한 내수업종이 자동차다. 올 들어 1~7월 브라질의 자동차 판매량은 188만대로 독일을 제치고 세계 4위로 올라섰다.

탄탄한 금융 경쟁력도 또 다른 원인이다.

여섯 차례에 걸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브라질은 일찍부터 금융 건전성에 주력했다.

현재 브라질 중앙은행은 국내 은행들에 국제결제은행(BIS) 기준이 정한 자기자본비율(8%)보다 높은 11%를 적용한다.

ABN암로,이타우 등 브라질 전체 은행 자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메이저 은행들은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은행들보다도 대출 등에서 더욱 엄격하고 보수적인 영업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브라질 금융산업은 1990년대 실시한 강력한 구조조정에 따라 보수적인 자산 운용과 고위험 자산에 대한 엄격한 관리로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까지 노린다

급성장한 경제력 덕분에 국제적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브라질은 지난해 100억달러 규모의 IMF SDR(특별인출권) 채권을 매입했다. 브라질이 IMF에 자금 지원은 사상 처음으로,IMF 역사상 최대 금액인 304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지 10년 만이었다.

IMF는 지난달 29일 브라질의 쿼터(지분율) 순위를 기존 14위에서 11위로 올렸다.

최근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환율전쟁에서도 "위안화 절상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발 더 나아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환율문제가 논의돼야 한다"고 국제사회의 공론 주도에도 나섰다.

국제사회에서 찬밥신세인 베네수엘라와 이란에도 자금지원의 손길을 내밀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등 신흥국가들의 맹주로 떠오르고 있다.

이 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룰라 대통령은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차기 대통령으로 확실시되는 여성 후보인 지우마 호세프와 동반 참석할 예정이다.

호세프 후보는 지난 3일 치러진 대선에서 46.8%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과반 획득에는 실패해 오는 31일 결선 투표를 치를 예정이지만 호세프 후보의 승리는 무난할 것이란 분석이다.

브라질은 이처럼 G20 국가의 주요 일원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도 노린다.

전문가들은 만약 유엔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수를 늘린다면 브라질이 가장 유력하다고 예상한다.

강경민 한국경제신문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