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실패는 정의롭지 않기 때문일까?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에 "공직자가 되려면 공정 사회의 기준을 생각하라.
공정 사회를 이뤄야 경제 발전이 이뤄진다"며 '공정'을 강조했다.
공정한 것은 정의로운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방식을 탐색한다.
공리나 행복 극대화,선택의 자유에 대한 존중,그리고 마지막이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탐색하며,저자는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문제는 '미덕과 공동선'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샌델이 답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과거 철학자들의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정의란 무엇인가」에 더 접근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목적에 맞게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제약조건에서 자신의 목적을 극대화하는 경제학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를 찬성했다면?
제레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유명하다.
그는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A로 인한 사회의 순편익(편익-비용)이 B로 인한 사회의 순편익보다 크다면 A가 더 옳은 행위다.
비용과 편익을 사회적 관점에서 비교하는 것이 마치 경제적 분석과 닮아 있다.
그러나 순편익이 크다면 살인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공리가 크다면 인간이 목적인 아닌 수단이 되어도 무방한가.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하며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결과가 아닌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칸트는 사회계약을 기초로 한 정의론을 지지하는데,공정한 헌법은 개인의 자유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느끼는 쾌락에 의한 동기를 거부하는 칸트의 주장을 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는 어렵다.
존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장막' 속에서,그리고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태에서 합의한 원칙은 공정하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언론 · 종교의 자유 등은 평등하게 제공돼야 하며,소득이나 부를 똑같이 분배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최소극대화 원칙이라고 한다.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가면서 위의 철학적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지만,정의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정의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공평 · 공정 · 정의가 얼마나 정의 내리기 어려운 문제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며,정의에 대한 정의를 누구도 명확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정의에 대한 역사적이고 오랜 논쟁은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기 어렵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경제학에 정의를 다루라고 한다면 너무 어려운 질문을 떠넘기는 것이 아닐까.
경제학은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아니,경제학에서 정의는 어쩌면 효율성 기준이 아닐까.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율성은 '파레토 효율성'이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파레토 효율성; 어떤 사람의 후생 감소 없이는 다른 어떤 한 사람의 이익 증가도 만들어낼 수 없는 상태
파레토 효율적인 자원 배분에서는 어떤 사람의 후생을 증가시키려면 반드시 다른 한 사람의 후생이 나빠지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면 현재 자원 배분을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이고,그렇다면 정의로운 자원 배분 상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효율적인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면 'YES'다.
그러나 100의 자원 중에서 99를 한 사람이 가지고 1을 나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도 99를 가진 사람의 후생 감소 없이 1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없다면 '99:1'의 분배도 효율적인 것이다.
효율적인 것이 정의롭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파레토 효율의 개념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파레토 효율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미시 경제를 배우면서 공급 · 수요,그리고 두 곡선이 만나는 시장을 배웠듯이, 파레토 효율도 생산의 파레토 효율,소비를 위한 교환의 파레토 효율,생산과 교환이 동시에 만족되는 총체적 파레토 효율이 있다.
생산의 파레토 효율은 주어진 요소를 활용하여 효율적인 생산을 달성하는 것이다.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이것은 이미 배웠던 생산 가능 곡선을 말하는 것이다.
생산 가능 곡선의 모든 점이 파레토 효율적인 생산점인 이유는 생산 가능 곡선 상에서 어떤 한 재화를 더 생산하려면 반드시 다른 한 재화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파레토 효율성).
앞에서 이것을 기회비용으로 설명한 바 있다. 옷을 1단위 더 생산하면 한계비용(옷)이 추가로 발생한다.
만약 변화량을 △라고 하면 옷의 생산을 늘리는 데 들어간 총비용은 '△옷×한계 비용(옷)'이다.
이때 옷을 늘렸다면 그 대가로 음식을 줄여야 했을 것이고,이로 인해 감소한 총비용은
'△음식×한계비용(음식)'이다.
따라서 '△옷×한계 비용(옷)=△음식×한계비용(음식)'이 성립하고 이를 정리하면 '△음식/△옷 =한계비용(옷)/한계비용(음식)'이 된다.
생산 가능 곡선의 기울기가 기회비용이며,이 식의 좌변이 바로 생산 가능 곡선의 기울기이고,이것은 고도 우변의 두 재화의 한계비용의 비율이 된다.
교환과 소비의 파레토 효율은 총체적 파레토 효율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해해 보자.
소비의 최적 조건은 재화 1원으로 느끼는 한계 효용이 같아지는 것이다.
이를 한계 효용 균등의 법칙이라 하며 '한계효용(음식)/음식 가격=한계효용(옷)/옷 가격'으로 나타낸다.
이를 정리하면 '옷 가격/음식 가격=한계효용(옷)/한계효용(음식)이 성립한다.
완전 경쟁 시장에서 모든 사람은 같은 재화를 동일한 가격을 지불하고 소비한다.
때문에 이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조건이다.
한편 완전 경쟁 시장에서 기업은 '가격=한계비용'인 점에서 생산한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생산,교환(소비),그리고 총체적 효율성을 결합하면 다음과 같은 근사한 관계를 볼 수 있다.
즉, 생산과 교환,그리고 총체적인 효율성은 완전 경쟁 시장에서 결정되는 두 재화의 가격에 의해 자동으로 성립한다. 완전 경쟁 시장이 성립하면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이뤄지는 것이다.
일전에 독점시장에서는 '가격>한계비용'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이라고 했다. '가격>한계비용'이면 생산과 교환, 그리고 총체적 파레토 효율이 성립하지 않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수많은 수요자와 공급자가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경제 주체가 가격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가격 수용자(price taker)이며, 진입장벽이 없는 완전 경쟁 시장이 효율적이란 의미는 바로 총체적 효율성이 달성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완전 경쟁 시장의 자원 배분이 파레토 효율적이려면 완전 경쟁 시장은 위의 조건 이외에도 정보의 비대칭,외부효과,공공재가 없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완전경쟁시장에서 파레토 효율은 시장의 스스로 힘에 의해 달성된다는 것이 수학적으로 증명됐다.
이때 위에서 나열한 완전 경쟁 시장의 성립을 어렵게 하는 원흉(?)들이 있다면 파레토 효율적 자원배분이 달성되지 않고 시장이 실패했다고 한다.
이처럼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실패는 온전히 '효율성'의 관점에 관한 것이며 공평이나 정의와 무관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 시장의 성공을 가로막는 원흉(독점은 이미 공부했음)들에 대해 하나씩 공부해 볼 것이다.
차성훈 KDI경제정보센터 책임전문원 econcha@kdi.re.kr
공정 사회를 이뤄야 경제 발전이 이뤄진다"며 '공정'을 강조했다.
공정한 것은 정의로운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방식을 탐색한다.
공리나 행복 극대화,선택의 자유에 대한 존중,그리고 마지막이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탐색하며,저자는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
그런데 문제는 '미덕과 공동선'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샌델이 답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과거 철학자들의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 「정의란 무엇인가」에 더 접근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목적에 맞게 재화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제약조건에서 자신의 목적을 극대화하는 경제학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를 찬성했다면?
제레미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유명하다.
그는 옳은 행위는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A로 인한 사회의 순편익(편익-비용)이 B로 인한 사회의 순편익보다 크다면 A가 더 옳은 행위다.
비용과 편익을 사회적 관점에서 비교하는 것이 마치 경제적 분석과 닮아 있다.
그러나 순편익이 크다면 살인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공리가 크다면 인간이 목적인 아닌 수단이 되어도 무방한가.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하며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결과가 아닌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칸트는 사회계약을 기초로 한 정의론을 지지하는데,공정한 헌법은 개인의 자유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의 보이지 않는 손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나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느끼는 쾌락에 의한 동기를 거부하는 칸트의 주장을 경제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는 어렵다.
존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장막' 속에서,그리고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태에서 합의한 원칙은 공정하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언론 · 종교의 자유 등은 평등하게 제공돼야 하며,소득이나 부를 똑같이 분배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최소극대화 원칙이라고 한다.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가면서 위의 철학적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지만,정의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필자가 이렇게 길고 장황하게 정의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공평 · 공정 · 정의가 얼마나 정의 내리기 어려운 문제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며,정의에 대한 정의를 누구도 명확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정의에 대한 역사적이고 오랜 논쟁은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기 어렵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경제학에 정의를 다루라고 한다면 너무 어려운 질문을 떠넘기는 것이 아닐까.
경제학은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
아니,경제학에서 정의는 어쩌면 효율성 기준이 아닐까.
경제학에서 말하는 효율성은 '파레토 효율성'이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파레토 효율성; 어떤 사람의 후생 감소 없이는 다른 어떤 한 사람의 이익 증가도 만들어낼 수 없는 상태
파레토 효율적인 자원 배분에서는 어떤 사람의 후생을 증가시키려면 반드시 다른 한 사람의 후생이 나빠지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면 현재 자원 배분을 모두 동의하고 있는 것이고,그렇다면 정의로운 자원 배분 상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효율적인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면 'YES'다.
그러나 100의 자원 중에서 99를 한 사람이 가지고 1을 나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어도 99를 가진 사람의 후생 감소 없이 1을 가진 사람들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없다면 '99:1'의 분배도 효율적인 것이다.
효율적인 것이 정의롭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파레토 효율의 개념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파레토 효율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미시 경제를 배우면서 공급 · 수요,그리고 두 곡선이 만나는 시장을 배웠듯이, 파레토 효율도 생산의 파레토 효율,소비를 위한 교환의 파레토 효율,생산과 교환이 동시에 만족되는 총체적 파레토 효율이 있다.
생산의 파레토 효율은 주어진 요소를 활용하여 효율적인 생산을 달성하는 것이다.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이것은 이미 배웠던 생산 가능 곡선을 말하는 것이다.
생산 가능 곡선의 모든 점이 파레토 효율적인 생산점인 이유는 생산 가능 곡선 상에서 어떤 한 재화를 더 생산하려면 반드시 다른 한 재화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파레토 효율성).
앞에서 이것을 기회비용으로 설명한 바 있다. 옷을 1단위 더 생산하면 한계비용(옷)이 추가로 발생한다.
만약 변화량을 △라고 하면 옷의 생산을 늘리는 데 들어간 총비용은 '△옷×한계 비용(옷)'이다.
이때 옷을 늘렸다면 그 대가로 음식을 줄여야 했을 것이고,이로 인해 감소한 총비용은
'△음식×한계비용(음식)'이다.
따라서 '△옷×한계 비용(옷)=△음식×한계비용(음식)'이 성립하고 이를 정리하면 '△음식/△옷 =한계비용(옷)/한계비용(음식)'이 된다.
생산 가능 곡선의 기울기가 기회비용이며,이 식의 좌변이 바로 생산 가능 곡선의 기울기이고,이것은 고도 우변의 두 재화의 한계비용의 비율이 된다.
교환과 소비의 파레토 효율은 총체적 파레토 효율을 설명하면서 함께 이해해 보자.
소비의 최적 조건은 재화 1원으로 느끼는 한계 효용이 같아지는 것이다.
이를 한계 효용 균등의 법칙이라 하며 '한계효용(음식)/음식 가격=한계효용(옷)/옷 가격'으로 나타낸다.
이를 정리하면 '옷 가격/음식 가격=한계효용(옷)/한계효용(음식)이 성립한다.
완전 경쟁 시장에서 모든 사람은 같은 재화를 동일한 가격을 지불하고 소비한다.
때문에 이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조건이다.
한편 완전 경쟁 시장에서 기업은 '가격=한계비용'인 점에서 생산한다고 배웠다.
그렇다면 생산,교환(소비),그리고 총체적 효율성을 결합하면 다음과 같은 근사한 관계를 볼 수 있다.
즉, 생산과 교환,그리고 총체적인 효율성은 완전 경쟁 시장에서 결정되는 두 재화의 가격에 의해 자동으로 성립한다. 완전 경쟁 시장이 성립하면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이뤄지는 것이다.
일전에 독점시장에서는 '가격>한계비용'이 된다고 설명하면서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이라고 했다. '가격>한계비용'이면 생산과 교환, 그리고 총체적 파레토 효율이 성립하지 않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수많은 수요자와 공급자가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경제 주체가 가격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가격 수용자(price taker)이며, 진입장벽이 없는 완전 경쟁 시장이 효율적이란 의미는 바로 총체적 효율성이 달성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완전 경쟁 시장의 자원 배분이 파레토 효율적이려면 완전 경쟁 시장은 위의 조건 이외에도 정보의 비대칭,외부효과,공공재가 없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완전경쟁시장에서 파레토 효율은 시장의 스스로 힘에 의해 달성된다는 것이 수학적으로 증명됐다.
이때 위에서 나열한 완전 경쟁 시장의 성립을 어렵게 하는 원흉(?)들이 있다면 파레토 효율적 자원배분이 달성되지 않고 시장이 실패했다고 한다.
이처럼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실패는 온전히 '효율성'의 관점에 관한 것이며 공평이나 정의와 무관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 시장의 성공을 가로막는 원흉(독점은 이미 공부했음)들에 대해 하나씩 공부해 볼 것이다.
차성훈 KDI경제정보센터 책임전문원 econcha@kd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