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말'로써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이를 꼽으라면 단연 노무현 전 대통령일 것이다.
특히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우리 사회 권위주의 청산 작업은 그 공과에 대한 평가와 함께 지금까지 계속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가령 집권 초인 2003년 3월 있었던 평검사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 '파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고간 대화 내용은 당시로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토론을 통해 검사들을 제압하려 한다면 이 토론은 무의미하다.
"(검사) "잔재주로 여러분을 제압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낀다.
"(대통령) "대통령이 되기 전에 부산 ××지청장에게 뇌물사건을 잘 봐달라고 했다는데, 검찰의 중립을 훼손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느냐.
"(검사) "이쯤 가면 막가자는 거죠?"
(대통령) TV로 생중계된 당시 현장은 검사들의 걸러지지 않은 질문과 이에 응하는 대통령의 직설적 대화로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최근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어록을 엮어낸 한 전직 언론인은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어법이 대통령의 언어로는 너무 거칠고 품격에 맞지 않았다"며 "권위주의는 배격하더라도 권위는 지켜야 하는데 권위까지 내팽개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권위주의 언어는 버려야 하지만 권위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지난 호에서 살폈듯이 '영부인'은 본래 '남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이지만 지난 시기에 '대통령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왜곡돼 사용되기도 했다.
물론 그 여파는 계속 이어져와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후유증이 크다.
비록 왜곡된 인식에 의해 오도된 것일지언정 권위주의 언어는 과거 어두웠던 시대의 잔재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
또 우리말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인이란 점에서 하루 빨리 청산하거나 제자리로 돌려놔야 할 대상이다.
'영부인'은 정치권과 언론 등에 의해 생겨난 일종의 돌연변이성 말이지만,우리말 가운데는 실제로 말 자체에 특수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있다.
그런 말들은 문맥 안에서 어떤 행위나 그 주체에 대해 행위의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한다.
가령 일반적인 평범한 글에서는 단순히 '경찰'로 표현될 말이 폭력적인 시위현장에서는 '공권력'으로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공권력'은 원래 법률용어로 '국가나 공공 단체가 우월한 의사의 주체로서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뜻하는 말이다.
'공권력을 투입하다. /공권력을 행사하다'처럼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riot police' 또는 'riot troop'으로 명시되는 이 말이 '공권력'으로 표현되는 것은,행위자를 추상화/개념화함으로써 그 말에 공적이고 권위적인 함의를 불어넣기 위한 방식이다.
본래 추상적인 말이지만 특정 상황 아래서 구체적인 실체를 대신하는 말로 쓰여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단어도 잘못 쓰면 권위주의 언어의 수단이 된다.
가령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나설 때 "재계 인사들이 대통령을 수행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이 경우 재계 인사들은 '수행원'이 될 터인데,수행원의 사전적 의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그를 돕거나 신변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공무원이라면 대통령의 수행원이 될 수 있지만 민간 기업의 대표가 대통령을 '수행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하는데 경제적 목적에 따라 기업인들과 함께 가는 것이지,비즈니스가 주업인 기업인들이 대통령을 '모시기 위해' 따라나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 경제 시대에 외교와 경제 활동영역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수행'이란 말에 담겨 있는 종속적이고 권위적인 어감은 피할 수 없다. 그보다는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대동'한다든가,기업인들이 대통령과 '동행'한다는 표현이 보다 수평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대동'은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이고,'동행'은 말 그대로 같이 가는 것이다.
그 말 속에는 민간 기업인들의 '자율적인 경제 활동'에 대한 이미지도 담아낼 수 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
특히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우리 사회 권위주의 청산 작업은 그 공과에 대한 평가와 함께 지금까지 계속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가령 집권 초인 2003년 3월 있었던 평검사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 '파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고간 대화 내용은 당시로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토론을 통해 검사들을 제압하려 한다면 이 토론은 무의미하다.
"(검사) "잔재주로 여러분을 제압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낀다.
"(대통령) "대통령이 되기 전에 부산 ××지청장에게 뇌물사건을 잘 봐달라고 했다는데, 검찰의 중립을 훼손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느냐.
"(검사) "이쯤 가면 막가자는 거죠?"
(대통령) TV로 생중계된 당시 현장은 검사들의 걸러지지 않은 질문과 이에 응하는 대통령의 직설적 대화로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최근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어록을 엮어낸 한 전직 언론인은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의 어법이 대통령의 언어로는 너무 거칠고 품격에 맞지 않았다"며 "권위주의는 배격하더라도 권위는 지켜야 하는데 권위까지 내팽개친 것 아니냐는 해석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권위주의 언어는 버려야 하지만 권위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지난 호에서 살폈듯이 '영부인'은 본래 '남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이지만 지난 시기에 '대통령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왜곡돼 사용되기도 했다.
물론 그 여파는 계속 이어져와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후유증이 크다.
비록 왜곡된 인식에 의해 오도된 것일지언정 권위주의 언어는 과거 어두웠던 시대의 잔재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
또 우리말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인이란 점에서 하루 빨리 청산하거나 제자리로 돌려놔야 할 대상이다.
'영부인'은 정치권과 언론 등에 의해 생겨난 일종의 돌연변이성 말이지만,우리말 가운데는 실제로 말 자체에 특수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있다.
그런 말들은 문맥 안에서 어떤 행위나 그 주체에 대해 행위의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한다.
가령 일반적인 평범한 글에서는 단순히 '경찰'로 표현될 말이 폭력적인 시위현장에서는 '공권력'으로 바뀌어 나타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공권력'은 원래 법률용어로 '국가나 공공 단체가 우월한 의사의 주체로서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뜻하는 말이다.
'공권력을 투입하다. /공권력을 행사하다'처럼 쓰인다.
영어권에서는 'riot police' 또는 'riot troop'으로 명시되는 이 말이 '공권력'으로 표현되는 것은,행위자를 추상화/개념화함으로써 그 말에 공적이고 권위적인 함의를 불어넣기 위한 방식이다.
본래 추상적인 말이지만 특정 상황 아래서 구체적인 실체를 대신하는 말로 쓰여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단어도 잘못 쓰면 권위주의 언어의 수단이 된다.
가령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나설 때 "재계 인사들이 대통령을 수행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이 경우 재계 인사들은 '수행원'이 될 터인데,수행원의 사전적 의미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따라다니며 그를 돕거나 신변을 보호하는 사람'이다.
공무원이라면 대통령의 수행원이 될 수 있지만 민간 기업의 대표가 대통령을 '수행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하는데 경제적 목적에 따라 기업인들과 함께 가는 것이지,비즈니스가 주업인 기업인들이 대통령을 '모시기 위해' 따라나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 경제 시대에 외교와 경제 활동영역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수행'이란 말에 담겨 있는 종속적이고 권위적인 어감은 피할 수 없다. 그보다는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대동'한다든가,기업인들이 대통령과 '동행'한다는 표현이 보다 수평적이고 가치중립적이다. '대동'은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이고,'동행'은 말 그대로 같이 가는 것이다.
그 말 속에는 민간 기업인들의 '자율적인 경제 활동'에 대한 이미지도 담아낼 수 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