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승부하다’가 어색한 이유
"'야만한 원색'은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르겠고,'서기한 광채'는 아마 '瑞氣한 光彩'인 모양인데 '瑞氣'는 명사다. 명사 밑에 '한'이 붙어도 좋다면 '人間한' '地球한' '赤色한'도 다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김동리)

"'야만'은 사전을 찾아보면 풀이 끝에 '-하다'라고 되어 있다. '야만'이 형용사로 쓰일 수 있다는 표시이다. '서기하는 광채'는 기호지방, 특히 충청도에서 쓰는 말이다. 어둠 속에서 인광처럼 퍼렇게 빛나는 것을 '서기한다'고 한다. 이에 해당될 만한 표준어가 없기에 방언을 그대로 썼다."(이어령)

1959년 3월 한 신문을 통해 전개된 소설가 김동리와 비평가 이어령 사이의 시비는 우리 문단사에서 은유와 비문(非文)에 관한 '험악한' 논쟁으로 기록된다. (남영신,<나의 한국어 바로 쓰기 노트>)

50여년 전 대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비문논쟁이지만 요즘의 눈으로 다시 보아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하물며 일반인들의 글쓰기에서 어법을 벗어나는 표현으로 문장이 어색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서기한 광채'에서 '서기'를 '瑞氣'로 해석한다면 어법적으로 '서기한'은 틀린 표현이다.

'瑞氣'란 말 그대로 '상서로운 기운'이므로 여기에 '-하다'를 붙이는 것은 매우 어색하기 때문이다.

'야만하다'도 같은 이치로 문법적 틀을 벗어난 말이다.

'-하다'는 통상 명사 밑에 붙어 우리말에서 부족한 동사,형용사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다.

'칭찬하다'에서처럼 동작명사 밑에 붙어서는 동사를,'만족하다'에서처럼 상태명사 뒤에서는 형용사를 만든다.

하지만 물질명사나 추상명사에는 붙지 않는다.

'기운하다'가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기하다'나 '야만하다'도 바른 어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당시의 이어령은 수사법을 말하고 있어 단순히 문법적 잣대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적어도 우리의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승부'에 '하다'를 붙인 '승부하다'란 말도 원래 쓸 수 없는 표현인데 요즘 무심코 이를 쓰는 경우가 많다.

가령 "벤처기업은 말 그대로 실패 위험이 높아 성공 확률이 낮은 사업에 승부하는 기업이다" "올봄 방송 3사는 드라마로 승부한다는 전략 아래…" 식으로 쓴다.

'이기고 짐'을 뜻하는 말인 '승부'에 '-하다'를 바로 붙일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지만 입에 익은 대로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것이다.

같은 계열의 단어인 '승산'을 '승산하다' 식으로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에서도 '~사업에 승부를 거는 기업이다' '~드라마로 승부를 낸다는(건다는) 전략 아래…'라고 해야 마땅한 표현이다.

#그는 '이 세계에선 한계를 초월하는 노력을 해야만 승산이 난다'고 힘주어 말했다.

'승산'은 '이길 가망,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말은 '승산이 있다(없다)/승산을 따지다/승산이 희박하다. /승산이 서다' 식으로 쓰인다.

'승산이 나다'라고는 잘 쓰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나다'와 어울리는 말은 '승부'이다.

'승부가 나다/승부를 내다/승부가 걸리다/승부를 걸다/승부를 가르다/승부가 엇갈리다/승부가 결정되다' 식으로 '나다'와 '걸다'를 같이 쓸 수 있다.

이같이 특정 단어나 표현에 어울리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구별해 써야 한다.

예문은 "그는 '이 세계에선 한계를 초월하는 노력을 해야만 승산이 있다(또는 살아남는다)'고 힘주어 말했다"로 써야 적절한 표현이다.

#그동안 맥을 추지 못하던 전통 제조업주와 금융주 등 이른바 '구경제' 업종의 주식들까지 전반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기운이나 힘을 뜻하는 말 '맥(脈)'과 어울려 쓰는 관용구가 많다.

'맥이 풀리다,맥이 빠지다,맥을 놓다,맥을 못 추다' 같은 게 그런 것이다.

'맥을 못 추다'라고 하면 '기운이나 힘 따위를 못 쓰거나 이성을 찾지 못하다'란 뜻이다.

이때 쓰인 '추다'는 '(쇠약해진 몸이나 윈기를) 회복하여 가누다'라는 뜻인데 요즘 단독으로 '맥을 추다'라는 표현은 잘 쓰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부정어를 만들 때도 이론적으로는 '맥을 추지 못하다'라고 해도 그만일 것 같지만 이미 '맥(을) 못 추다'의 형태로 굳어져 사전에 오른 말이다.

"정치인 얘기라면 신물이 난다며 손사래를 젓는다"란 표현도 관용구 용법으로 보면 흠이 있다.

'손사래'란 '어떤 말이나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에게 조용히 하라고 할 때 손을 펴서 휘젓는 일'로서 '손사래(를) 치다'가 관용구로 익은 표현이다.

'손사래를 젓는다'라고 하면 의미가 중복되는 꼴이기도 하다.

요는 관용적 표현은 굳어서 사전에 오른 대로 써야지 개인적으로 말을 비틀어 바꿔 쓰면 문장이 어색해진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