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다”
<문제 3>
제시문 [가]를 읽고 자아와 자서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설명하고,이를 토대로 제시문 [나]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은 자서전의 경우에는 자아와 자서전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제시문 [다]를 참조하여 논하라. (40%,1000~1200자)
가 문학적 자서전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보다 자연스럽고 간결하게,그리고 에피소드와 연결된 설명을 하게 될 때에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해서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철학적 개념을 암시해준다.
최근의 한 저서에서는 이 점이 분명히 강조되어 있는데,여기에서는 이 자서전 장르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성 어거스틴의 「고백 Confessions」에서부터 그 종언이라 할 수 있는 사무엘 베켓까지 검토되고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탐구를 그의 진실한 인생,그의 진실한 자아를 위한 탐구로 보았고,그래서 자서전을 진실한 기억,실재의 탐구로 간주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진실한 삶은 신과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내러티브(자서전 이야기)의 고유한 독자적 질서는 기억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형식,섭리로서 주어진 존재에 대한 가장 진실한 형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진실한 기억은 현실세계를 반영하며,내러티브가 그 매체라고 인정한다.
그의 생각은 내러티브적 실재론(realism)이며,그로부터 출현하는 자아는 계시의 선물,이성에 의해 발효되는 것이다.
18세기의 지암바티스타 비코와 어거스틴을 대조해보기로 하자.
비코는 마음의 힘에 대해 생각함으로써,어거스틴의 내러티브적 실재론에 눈을 돌린다.
비코에게 삶이란,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신의 행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이야기적 측면은 우리의 활동에 의한 것이지 신의 그것이 아닌 것이다.
비록 비코가 일종의 합리주의에 의해 보호받고는 있지만-그 합리주의가 일반적으로 그런 입장과 연결되어 있는 회의주의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그는 아마도 최초의 급진적 구성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약 반세기 뒤의 장-자크 루소도,비코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또 자기가 살고 있던 혁명적 시대의 새로운 회의주의에 의해 고무되어,어거스틴의 확고하고도순수한 내러티브적 실재론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다.
루소의 「고백록 Confessions」은 대담한 회의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그로부터 2세기 뒤에,베켓은 비코가 어거스틴의 내러티브적 실재론을 이성적으로 거부한 것을 지지하고 루소의 왜곡된 회의주의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내러티브를 삶의 초월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한다.
실제로,그는 어떤 초월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철저한 허구주의(fictionalism)이며,그의 사명은 삶에 대해 글을 쓰는 것-문학만이 아니라-을 그 내러티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삶은 문제적인 것으로서,관습적인 장르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 존 브루너,「이야기 만들기」
나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프랑스의 철학자로,1940년 전쟁포로가 되어 심리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한 적이 있으며 1947년에도 심각한 우울증 증세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여 전기요법 치료를 받았다.
이후 그는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아내를 교살한 죄로 병원에 강제 수용되었으나,이듬해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면소(免訴)되었다.
그는 1985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집필했는데,그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하기를 원치 않았거나 할 수 없었던 것을 했다. 즉,마치 제3자의 일인 것처럼 나는 모든 '자료들'을 내가 겪은 것에 비추어 정리하고 대조했으며 그 역으로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온전한 정신과 책임하에 마침내 나 자신이 공개적으로 나를 해명하기 위해 말문을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중략)…
나는 내가 지금 나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명료하게 해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그런 경험에 대한 비판적 '고백'의 선례가 전혀 없었던 하나의 구체적 경험,가장 심각하고 가장 끔찍한 형태로 내가 겪은 한 경험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 보기를 권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경험은 분명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중략)…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한 것,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나의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들었던 모든 정서적 감정 상태들의 충격이다."
다 자서전의 문제는 고유명사와의 관련 하에 연구되어야 한다.
책으로 인쇄된 텍스트의 경우에 그 언술 행위는 일반적으로 책의 표지와 간지 위에,제목 상단 혹은 하단에 이름이 기록되는 사람의 것으로 인정된다.
바로 그 이름 속에 우리가 저자라고 부르는 존재가 그대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텍스트 외부의 요소가 텍스트 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징표이며,결국 텍스트의 언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최종적으로 자기에게 물을 것을 요구하는 실제 인물을 지칭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텍스트 내에서 작가가 나타나는 것은 이 단 한번의 이름으로 족하다.
그렇지만 이 이름이 차지하는 위치는 아주 중요하고,그것은 사회적인 관례에 의해 텍스트의 언술 행위에 대해 실제 인물이 책임을 약속하는 행위에 연결된다. …(중략)…
자서전은 저자(책 표지에 자기 이름을 걸고 모습을 드러내는 대로의 저자)와 그 이야기의 화자,또 그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인물의 이름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상정한다. …(중략)…
저자의 이름이 들어간 그 페이지를 텍스트에 포함시키게 되면 (저자-화자-주인공의) 동일성이라는,자서전을 정의해 주는 보편적인 텍스트 내적 기준이 주어진다. 자서전의 규약이란 결국 표지에 기록되는 작가의 이름으로 귀결되는 이러한 동일성의 문제를 텍스트 내에서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 필립 르죈,「자서전의 규약」
⊙ 나와서는 안 될 문제
이런 문제가 나오게 된 것에 대해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고3 수준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출제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고3들이 이 문제를 받아들고 과연 어느 정도의 방향이라도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시험을 보고 나온 학생들,혹은 올해 서강대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물어보아도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답을 한 학생을 찾기 힘들었다.
이것은 출제자의 지적 수준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면,제대로 된 철학수업 한번 받지 못했던 고3 학생들을 골탕먹이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물론 개인적으로,철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철학공격'을 펼친다면 누가 철학을 배타적인 학문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이 문제의 제시문들이 지칭하는 개념들은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에게조차 낯설기 그지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실재론'이나 '허구주의''구성주의'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과연 '그 합리주의가 일반적으로 그런 입장과 연결되어 있는 회의주의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라든지,'그는 아마도 최초의 급진적 구성주의자였을 것이다'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고3이 아니라,대학 3학년일 것이다.
⊙ 배경지식:신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다
니체(Nietzsche)가 신을 사살한 이후,우리는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개인적인 신앙체계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종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할이 중세시절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카를로 긴즈바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에 묘사되어 있듯,중세의 몰락은 인간이 가진 주체적 이성능력이 신의 질서를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왜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기는지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었던 기존의 신학은 그 지위를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이를 대체할 근대적 학문들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가 저물어가는 시기는 이러한 인간 능력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작용하던 시기였다.
이제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겨놓고 살아가던 인간들이 서서히 자신들의 능력에 눈을 뜨고 반가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과연 신의 뜻인가?''정말 교회나 교황의 말은 모두 사실인가?''신은 언제나 옳은가?'와 같은 회의적 질문들이 등장하게 되고,진리의 선명성에 대한 의심을 끝까지 몰고 간 데카르트 또한 등장하게 된다.
이제 갈릴레이와 뉴튼의 과학적 발견,데카르트나 칸트의 철학적 작업들은 세상의 주인이 신이 아닌,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게 된다.
특히,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증명해내고,그 모든 사고의 정점에 인간의 이성능력을 올려놓게 되면서 근대의 문을 여는 최초의 근대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는 의심할 수 없는 사유의 시작으로서 '생각하는 나'를 상정함으로써 세상의 주인공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게 된다.
비로소 이제 인간들은 신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자유를 되찾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으며,유일하게 신으로부터 자유를 찾은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그 모든 세상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시간이 흐르고 이제 사람들은 그 이성이 가져온 폐해를 경험하게 된다.
과학지상주의,근대성,효율성과 같은 단어들로 상징되는 근대 이성의 시기는 제국주의,세계대전,환경오염,전체주의,비인간화,인간소외와 같은 문제를 직면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신의 권위를 이성이 이어받았을 뿐,권위가 그대로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들이 이로부터 탈주하기 시작하였고,그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과 68혁명을 불러왔다.
⊙ 제시문 (가) 분석
제시문 (가)야말로 2009년에 실시된 모든 논술문제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제시문임이 틀림없다.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열띤 의지를 갖는 것은 환영하나,이해하지 못한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우선 첫 문단에 주목해야 한다.
자서전이란 결국 <저자의 자아란 무엇인가> 혹은 작가마다 상이한 <자아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규정짓는다.
결국 자서전을 통해 자아상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서전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듯,순차적 사건의 나열을 통해 한 인간의 인생을 따라 훑는 것이 보통 우리가 자아를 이해하는 방식인 것이다.
제시문 (가)의 성 어거스틴(354~430,우리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로 알려져 있다)은 초기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명이다.
어거스틴의 철학적 작업은 초기 신학이론의 중심에 놓여져 있으며,이를 토대로 중세시대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제시문 (가)에서 드러나듯 그는 자신의 이야기란 것이 신의 질서에 의해 주어진 계시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그는 진실한 기억의 연속으로서의 자서전의 기록을 긍정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실재론적 입장을 취했지만,이 현실이란 것은 오로지 신의 질서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나란 자아는 결국 신의 뜻에 의해 부여받은 것일 뿐,내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 역시 모두 신의 이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비코는 이런 어거스틴의 이야기에서 눈을 밖으로 돌린다.
신의 행위에 의해 내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신을 의심하면서 모든 진리에 대한 회의적 입장을 취했지만,그 태도는 여전히 이성에 의한 합리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했다.
인간 이성을 기준으로 놓고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결국 남겨진 진리나 기준이란 없다는 회의주의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최초로 자기 스스로,주체적 질서를 구성한 급진적 구성주의자가 된 것이다.
루소 역시 신의 질서를 따른 순수한 내러티브의 서술이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이제 중세를 벗어나면서,한 인간의 인생에 있어 이야기의 주도권을 신이 아닌,인간이 잡게 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면,사무엘 베켓의 자서전이 등장한다.
사무엘 베켓(Samuel Beckett)은 1952년작 <고도를 기다리며(En dttenant Godot)>로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이다.
이 요상한 제목에서도 상징하듯 그에게 GOD은 DOT에 불과하다.
그는 부조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작품 속에서 내러티브(이야기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면서,합리적 인과율과 신존재의 허무함을 맹렬하게 폭로한다 (인과율을 거부했으므로 허구적일 수밖에!).
제시문에서도 베켓은 초월적 존재나 질서(=신)을 완강히 거부하는 동시에,자서전을 기존의 내러티브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려고 한다.
그에게 삶이란 '문제적'(전혀 문제적이 아닌 삶-어떤 선택없이 살아지는 일상적 삶-과 비교해보았을 때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인 것으로,관습적으로 내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술술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면,베켓의 자서전은 신 주도는 절대 아니지만,그렇다고 인간 주도도 아니게 된다.
관습적으로 이해되고 사용되는 전형적인 내러티브 체계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은 어떤 원인에 의해 어떤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는 이성적 내러티브 자체를 무너뜨리고,한 인간의 주도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자서전의 형식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비코와 베켓의 주장은 비슷해보일 수도 있다.
베켓의 분량이 적기도 적어서 해석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어거스틴을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있을 뿐 비코나 루소를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설마 <인식의 변화>라는 문제조건이 허투루 존재하겠는가? 어거스틴-비코-베켓으로 이어지는 인식의 변화는 이렇게 완성된다.
⊙ 문제 풀기
(다)는 비교적 가볍게 이해된다. 자서전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그 텍스트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제시문은 이를 당위성을 주장하는 가치명제가 아닌 아닌 'a는 b이다'와 같은 사실명제로써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자서전의 규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알튀세르로 옮겨가보자. 이 유명한 맑시스트 철학자는 부인을 살해했으나,이내 정신병으로 인한 살해라는 이유로 면책받게 된다.
얼마 전 있었던 조두순 사건과 같이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라는 이유로 그 행위의 주체성이 의심을 받은 것이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소위 '제 정신이 아닌 상태' 혹은 '미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중세를 무너뜨린 인간 이성의 업적이 나의 기원을 나에게서 찾는 자아의 인식이라면 알튀세르는 이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큰 따옴표로 인용된 부분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부인을 죽인 일에 대해,정말 제3자의 입장에서 한번 제대로 조사하고 정리해서 이야기해볼께요. (물론 그 조사대상은 저에요) 이거 해명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일은 정말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죠. 그때 왜 제가 그렇게 행동했는지,그 행동의 원인이 되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얘기함으로써 제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기를 빌어요. (제 자아는 보통의 내러티브가 실린 그런 자서전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거든요)."
이렇게 되면,알튀세르의 작업은 당시 이성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제3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꼴이 된다.
그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에서 말하는 자서전의 규약에서 어긋나는 일이 된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제목의 자서전은 일기도,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서전의 형태로 비춰지지만,기존의 자서전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가)가 말하듯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자서전이라면,이 하나의 사건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이 하나의 문제로 자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알튀세르의 인식은 우리가 흔히 아는 내러티브식 전개구조를 가진 자서전이 아닌,문제적 삶을 대하는 사무엘 베켓식의 자서전 구조에서 동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의 질서에 의한 어거스틴의 그것도,인간주도의 구성주의적 그것도 아닌,새로운 방식의 자서전을 쓰게 된 것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
<문제 3>
제시문 [가]를 읽고 자아와 자서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설명하고,이를 토대로 제시문 [나]에서 예로 든 것과 같은 자서전의 경우에는 자아와 자서전의 의미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를 제시문 [다]를 참조하여 논하라. (40%,1000~1200자)
가 문학적 자서전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보다 자연스럽고 간결하게,그리고 에피소드와 연결된 설명을 하게 될 때에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해서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철학적 개념을 암시해준다.
최근의 한 저서에서는 이 점이 분명히 강조되어 있는데,여기에서는 이 자서전 장르를 실질적으로 개척한 성 어거스틴의 「고백 Confessions」에서부터 그 종언이라 할 수 있는 사무엘 베켓까지 검토되고 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탐구를 그의 진실한 인생,그의 진실한 자아를 위한 탐구로 보았고,그래서 자서전을 진실한 기억,실재의 탐구로 간주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진실한 삶은 신과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내러티브(자서전 이야기)의 고유한 독자적 질서는 기억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형식,섭리로서 주어진 존재에 대한 가장 진실한 형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진실한 기억은 현실세계를 반영하며,내러티브가 그 매체라고 인정한다.
그의 생각은 내러티브적 실재론(realism)이며,그로부터 출현하는 자아는 계시의 선물,이성에 의해 발효되는 것이다.
18세기의 지암바티스타 비코와 어거스틴을 대조해보기로 하자.
비코는 마음의 힘에 대해 생각함으로써,어거스틴의 내러티브적 실재론에 눈을 돌린다.
비코에게 삶이란,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적 행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신의 행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이야기적 측면은 우리의 활동에 의한 것이지 신의 그것이 아닌 것이다.
비록 비코가 일종의 합리주의에 의해 보호받고는 있지만-그 합리주의가 일반적으로 그런 입장과 연결되어 있는 회의주의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그는 아마도 최초의 급진적 구성주의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약 반세기 뒤의 장-자크 루소도,비코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또 자기가 살고 있던 혁명적 시대의 새로운 회의주의에 의해 고무되어,어거스틴의 확고하고도순수한 내러티브적 실재론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다.
루소의 「고백록 Confessions」은 대담한 회의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그로부터 2세기 뒤에,베켓은 비코가 어거스틴의 내러티브적 실재론을 이성적으로 거부한 것을 지지하고 루소의 왜곡된 회의주의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내러티브를 삶의 초월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한다.
실제로,그는 어떤 초월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철저한 허구주의(fictionalism)이며,그의 사명은 삶에 대해 글을 쓰는 것-문학만이 아니라-을 그 내러티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삶은 문제적인 것으로서,관습적인 장르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 존 브루너,「이야기 만들기」
나 알튀세르(Louis Althusser)는 프랑스의 철학자로,1940년 전쟁포로가 되어 심리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한 적이 있으며 1947년에도 심각한 우울증 증세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여 전기요법 치료를 받았다.
이후 그는 1980년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아내를 교살한 죄로 병원에 강제 수용되었으나,이듬해 금치산자 판정을 받고 면소(免訴)되었다.
그는 1985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집필했는데,그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하기를 원치 않았거나 할 수 없었던 것을 했다. 즉,마치 제3자의 일인 것처럼 나는 모든 '자료들'을 내가 겪은 것에 비추어 정리하고 대조했으며 그 역으로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온전한 정신과 책임하에 마침내 나 자신이 공개적으로 나를 해명하기 위해 말문을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중략)…
나는 내가 지금 나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명료하게 해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그런 경험에 대한 비판적 '고백'의 선례가 전혀 없었던 하나의 구체적 경험,가장 심각하고 가장 끔찍한 형태로 내가 겪은 한 경험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깊이 생각해 보기를 권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경험은 분명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중략)…
내가 일러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일기도 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내가 오직 드러내고자 한 것,그것은 바로 내 존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나의 존재를 이러한 형태로,즉 그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을 알아보게 되고 타인들도 나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런 형태로 만들었던 모든 정서적 감정 상태들의 충격이다."
다 자서전의 문제는 고유명사와의 관련 하에 연구되어야 한다.
책으로 인쇄된 텍스트의 경우에 그 언술 행위는 일반적으로 책의 표지와 간지 위에,제목 상단 혹은 하단에 이름이 기록되는 사람의 것으로 인정된다.
바로 그 이름 속에 우리가 저자라고 부르는 존재가 그대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텍스트 외부의 요소가 텍스트 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징표이며,결국 텍스트의 언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최종적으로 자기에게 물을 것을 요구하는 실제 인물을 지칭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텍스트 내에서 작가가 나타나는 것은 이 단 한번의 이름으로 족하다.
그렇지만 이 이름이 차지하는 위치는 아주 중요하고,그것은 사회적인 관례에 의해 텍스트의 언술 행위에 대해 실제 인물이 책임을 약속하는 행위에 연결된다. …(중략)…
자서전은 저자(책 표지에 자기 이름을 걸고 모습을 드러내는 대로의 저자)와 그 이야기의 화자,또 그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인물의 이름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을 상정한다. …(중략)…
저자의 이름이 들어간 그 페이지를 텍스트에 포함시키게 되면 (저자-화자-주인공의) 동일성이라는,자서전을 정의해 주는 보편적인 텍스트 내적 기준이 주어진다. 자서전의 규약이란 결국 표지에 기록되는 작가의 이름으로 귀결되는 이러한 동일성의 문제를 텍스트 내에서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 필립 르죈,「자서전의 규약」
⊙ 나와서는 안 될 문제
이런 문제가 나오게 된 것에 대해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할 수밖에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고3 수준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출제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고3들이 이 문제를 받아들고 과연 어느 정도의 방향이라도 예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시험을 보고 나온 학생들,혹은 올해 서강대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물어보아도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답을 한 학생을 찾기 힘들었다.
이것은 출제자의 지적 수준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면,제대로 된 철학수업 한번 받지 못했던 고3 학생들을 골탕먹이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물론 개인적으로,철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철학공격'을 펼친다면 누가 철학을 배타적인 학문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이 문제의 제시문들이 지칭하는 개념들은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들에게조차 낯설기 그지없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실재론'이나 '허구주의''구성주의'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과연 '그 합리주의가 일반적으로 그런 입장과 연결되어 있는 회의주의로부터 그를 지켜주었다'라든지,'그는 아마도 최초의 급진적 구성주의자였을 것이다'란 문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고3이 아니라,대학 3학년일 것이다.
⊙ 배경지식:신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다
니체(Nietzsche)가 신을 사살한 이후,우리는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개인적인 신앙체계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종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역할이 중세시절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카를로 긴즈바르크의 「치즈와 구더기」에 묘사되어 있듯,중세의 몰락은 인간이 가진 주체적 이성능력이 신의 질서를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왜 치즈에서 구더기가 생기는지에 대한 해명을 할 수 없었던 기존의 신학은 그 지위를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이를 대체할 근대적 학문들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가 저물어가는 시기는 이러한 인간 능력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작용하던 시기였다.
이제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겨놓고 살아가던 인간들이 서서히 자신들의 능력에 눈을 뜨고 반가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과연 신의 뜻인가?''정말 교회나 교황의 말은 모두 사실인가?''신은 언제나 옳은가?'와 같은 회의적 질문들이 등장하게 되고,진리의 선명성에 대한 의심을 끝까지 몰고 간 데카르트 또한 등장하게 된다.
이제 갈릴레이와 뉴튼의 과학적 발견,데카르트나 칸트의 철학적 작업들은 세상의 주인이 신이 아닌,인간 자신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게 된다.
특히,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증명해내고,그 모든 사고의 정점에 인간의 이성능력을 올려놓게 되면서 근대의 문을 여는 최초의 근대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는 의심할 수 없는 사유의 시작으로서 '생각하는 나'를 상정함으로써 세상의 주인공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포하게 된다.
비로소 이제 인간들은 신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자유를 되찾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으며,유일하게 신으로부터 자유를 찾은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그 모든 세상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시간이 흐르고 이제 사람들은 그 이성이 가져온 폐해를 경험하게 된다.
과학지상주의,근대성,효율성과 같은 단어들로 상징되는 근대 이성의 시기는 제국주의,세계대전,환경오염,전체주의,비인간화,인간소외와 같은 문제를 직면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신의 권위를 이성이 이어받았을 뿐,권위가 그대로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인간들이 이로부터 탈주하기 시작하였고,그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과 68혁명을 불러왔다.
⊙ 제시문 (가) 분석
제시문 (가)야말로 2009년에 실시된 모든 논술문제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제시문임이 틀림없다.
제대로 이해해보려는 열띤 의지를 갖는 것은 환영하나,이해하지 못한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우선 첫 문단에 주목해야 한다.
자서전이란 결국 <저자의 자아란 무엇인가> 혹은 작가마다 상이한 <자아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규정짓는다.
결국 자서전을 통해 자아상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서전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듯,순차적 사건의 나열을 통해 한 인간의 인생을 따라 훑는 것이 보통 우리가 자아를 이해하는 방식인 것이다.
제시문 (가)의 성 어거스틴(354~430,우리에게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로 알려져 있다)은 초기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명이다.
어거스틴의 철학적 작업은 초기 신학이론의 중심에 놓여져 있으며,이를 토대로 중세시대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제시문 (가)에서 드러나듯 그는 자신의 이야기란 것이 신의 질서에 의해 주어진 계시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그는 진실한 기억의 연속으로서의 자서전의 기록을 긍정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실재론적 입장을 취했지만,이 현실이란 것은 오로지 신의 질서에 의해 구성된 것에 불과하다.
나란 자아는 결국 신의 뜻에 의해 부여받은 것일 뿐,내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 역시 모두 신의 이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비코는 이런 어거스틴의 이야기에서 눈을 밖으로 돌린다.
신의 행위에 의해 내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신을 의심하면서 모든 진리에 대한 회의적 입장을 취했지만,그 태도는 여전히 이성에 의한 합리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했다.
인간 이성을 기준으로 놓고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에,결국 남겨진 진리나 기준이란 없다는 회의주의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최초로 자기 스스로,주체적 질서를 구성한 급진적 구성주의자가 된 것이다.
루소 역시 신의 질서를 따른 순수한 내러티브의 서술이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이제 중세를 벗어나면서,한 인간의 인생에 있어 이야기의 주도권을 신이 아닌,인간이 잡게 된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면,사무엘 베켓의 자서전이 등장한다.
사무엘 베켓(Samuel Beckett)은 1952년작 <고도를 기다리며(En dttenant Godot)>로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이다.
이 요상한 제목에서도 상징하듯 그에게 GOD은 DOT에 불과하다.
그는 부조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작품 속에서 내러티브(이야기 구조)를 완전히 무너뜨리면서,합리적 인과율과 신존재의 허무함을 맹렬하게 폭로한다 (인과율을 거부했으므로 허구적일 수밖에!).
제시문에서도 베켓은 초월적 존재나 질서(=신)을 완강히 거부하는 동시에,자서전을 기존의 내러티브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려고 한다.
그에게 삶이란 '문제적'(전혀 문제적이 아닌 삶-어떤 선택없이 살아지는 일상적 삶-과 비교해보았을 때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인 것으로,관습적으로 내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술술 써내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면,베켓의 자서전은 신 주도는 절대 아니지만,그렇다고 인간 주도도 아니게 된다.
관습적으로 이해되고 사용되는 전형적인 내러티브 체계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은 어떤 원인에 의해 어떤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는 이성적 내러티브 자체를 무너뜨리고,한 인간의 주도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자서전의 형식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한 것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비코와 베켓의 주장은 비슷해보일 수도 있다.
베켓의 분량이 적기도 적어서 해석 자체가 어려울 뿐 아니라,어거스틴을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있을 뿐 비코나 루소를 거부한다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설마 <인식의 변화>라는 문제조건이 허투루 존재하겠는가? 어거스틴-비코-베켓으로 이어지는 인식의 변화는 이렇게 완성된다.
⊙ 문제 풀기
(다)는 비교적 가볍게 이해된다. 자서전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그 텍스트의 주인공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이다.
제시문은 이를 당위성을 주장하는 가치명제가 아닌 아닌 'a는 b이다'와 같은 사실명제로써 드러내고 있다.
그것이 자서전의 규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알튀세르로 옮겨가보자. 이 유명한 맑시스트 철학자는 부인을 살해했으나,이내 정신병으로 인한 살해라는 이유로 면책받게 된다.
얼마 전 있었던 조두순 사건과 같이 심신미약의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라는 이유로 그 행위의 주체성이 의심을 받은 것이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소위 '제 정신이 아닌 상태' 혹은 '미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중세를 무너뜨린 인간 이성의 업적이 나의 기원을 나에게서 찾는 자아의 인식이라면 알튀세르는 이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큰 따옴표로 인용된 부분에서 알튀세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부인을 죽인 일에 대해,정말 제3자의 입장에서 한번 제대로 조사하고 정리해서 이야기해볼께요. (물론 그 조사대상은 저에요) 이거 해명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일은 정말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죠. 그때 왜 제가 그렇게 행동했는지,그 행동의 원인이 되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얘기함으로써 제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기를 빌어요. (제 자아는 보통의 내러티브가 실린 그런 자서전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거든요)."
이렇게 되면,알튀세르의 작업은 당시 이성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제3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꼴이 된다.
그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에서 말하는 자서전의 규약에서 어긋나는 일이 된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제목의 자서전은 일기도,회상록도 자서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서전의 형태로 비춰지지만,기존의 자서전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가)가 말하듯 자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자서전이라면,이 하나의 사건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이 하나의 문제로 자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알튀세르의 인식은 우리가 흔히 아는 내러티브식 전개구조를 가진 자서전이 아닌,문제적 삶을 대하는 사무엘 베켓식의 자서전 구조에서 동일하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의 질서에 의한 어거스틴의 그것도,인간주도의 구성주의적 그것도 아닌,새로운 방식의 자서전을 쓰게 된 것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