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 철학이 남겨준 과제 인류가 시작되고,철학이 생겨났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다른 동물들과는 무언가 다른 자각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자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했다.
학문의 왕이었던 철학은 그렇게 인간의 호기심과 '가상한 용기'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간은 점점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000년을 넘게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온갖 해석을 쏟아냈지만,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게 세상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었다.
카뮈(Albert Camus)의 '그런 문제는 뒤로 제쳐놓고라도, 우선 인간은 왜 살아가는지도 모르지 않는가?'라는 강한 의문은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밖에 없다.
태어난 이유도 모른 채 습관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나약하고 근거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고,그저 세상이 어떻느니 떠드는 것은 '결코' 무의미할 뿐이라는 주장에 우리의 가슴은 뻥하니 뚫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더라도,그닥 이유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행복 때문일까? 그렇다면 불행한 삶은 결코 살 가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인 주제에,무슨 이유를 찾는 것은 다소 어리석을 수 있다.
그저 동물처럼 종족보존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기엔 우린 또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지 않은가.
먼저 결론을 말하자면,새뮤얼 베켓이 보기에 인간은 고도(Godot)를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고도를 말이다. 그런데 고도가 누구지?
⊙ 내러티브의 상실,부조리극의 원조
부조리(l'absurde) 문학의 시작은 바로 이 작품이었다.
부조리란 말 그대로 '말이 되지 않음' '이치에 맞지 않음'이란 뜻이다. 즉,온전한 인식이 가능한 전제와 그에 합당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모두 책을 읽는다면 바로 파악할 수 있겠지만,베켓은 굉장히 심오한 메시지를 친절하게 담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해 말하려다보니,결국 이해할 수 없는 형식을 띄게 된 것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만을 반복하는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역시 알 수 없는 주종관계에 놓여있는 포조와 럭키,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년,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작 5명이다.
이 다섯 명은 시간과 공간이 파괴되어 있는 '알 필요가 없는 공간,시골길'에서 단순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겪는다.
그 에피소드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고,그저 단발적으로,산발적으로 펼쳐진다.
잠시 전의 이야기는 잠시 후의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다. 그저 이런저런 지루한 대사만이 그들 사이에 나눠진다.
큰 액션이 있거나 큰 사건이 있지도 않다. 의미 없는 대사 사이에,그들의 관계와 의중 사이에서 관객들과 독자들이 메시지를 각자 찾아내어 조립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해석은 무수하게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부조리 문학에 대한 조리있는 해석이 무수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할 뿐이다.
⊙ 인간은 왜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가?
우리가 현대 문명이라고 부르는 바로 이것. 우리를 둘러싼 온갖 문명의 가지가지들은 사실상 서양문명을 지칭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서양문명을 진보로 알고,그렇게 따라왔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를 겪은 것은 문명개화가 늦어서였으며,그런 덕에 힘없는 종속국가의 운명 속에 한국전의 비극을 겪었다고 평가하곤 한다.
굳이 틀린 말이 아니다. 동양의 전통이 말그대로 지나온 것의 재발견에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서양에서는 새로운 기술과 사상이 등장하고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힘을 지니게 되었고,동양을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서양적인 힘과 우위,진보를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피상적으로 드러난 기술의 진보와 발명에 집중했을 뿐이지,그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심장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진 못했다.
서구의 근대화를 이끌어냈던 혈류를 몸 구석구석 뻗치게 해주었던 그 핵심으로서의 서양정신을 알지 못한 채,눈에 보이는 '신기함'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근대 유럽,아니 서양의 모든 역사를 지배했던 두 개의 정신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그것은 기독교정신과 그리스정신이며,종교와 철학(논리성을 지닌 학문 혹은 과학)이며,성과 속(성스러움과 속됨)이다.
그들의 기술을 가능하게 했던 이성적인 능력(철학,과학)과 더불어 그들의 정신을 지탱해주었던 기독교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성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 하고 있을 때,한편으로는 지금의 생에 도덕을 제공하고 후세의 삶에 천국을 제공해주었던 기독교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이 양축이 항상 사이좋게 나아갔던 것은 아니다.
중세시절에 종교는 철학과 과학을 그저 신학의 시녀로 만들었으며,근대에는 과학이 그 모든 것을 앞질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 균형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양축을 중심으로 조율할 수 있는 중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성과 종교로부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받았던 인간들이,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불안해진 시기는 바로 그때였다.
살아있는 동안 인간을 도와줄 기술(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죽이고,인간에게 선과 악을 정해주고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어주신다는 신이 두 번의 전쟁을 눈감아주신 것이었다.
인간은 불안해졌다.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모든 시선은 부정과 불안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는 니체에 의해 이미 산산조각나 부정되어 버렸고,인과율로 대표되는 이성의 능력은 오히려 시시각각 우리들의 목숨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성능력이 알아낸 것은 다만,세상의 확대하여 바라볼 수 있는 솜씨 좋은 시력뿐이었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삶의 동아줄을 붙잡고 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그 어떤 메시지를 보내주진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자기관찰의 시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외톨이로 남게 되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두 명의 어머니는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은 어리석게도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었던 모든 것에 대한 의심
이 작품은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교훈적인 목적으로 쓰여졌을리 만무하다.
메시지를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자기가 아는 만큼 얻어낼 뿐이다.
이 작품은 현대인을,혹은 근대인을 형성해주었던 온갖 토대들에 대해 공격하고,조롱하고 폐기시켜 버린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었던 합리성과 신에 대한 믿음을 비웃으며,의미 없이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두 인물,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에게는 과거가 없다. 미래도 없다. 그저 현재의 기다림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기다려도 그 고도는 오지 않는다.
우리를 편하고 안전하게 해주리라 믿었던 것들이 무너진 시대에,인간은 결국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톨이가 되고,부조리한 상황에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고도를 기다렸던 인간들에게 닥친 재앙만큼이나 큰 행운이 과연 찾아올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도가 가져다 줘야 하는데 오질 않으니~!)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두 인물들에게 그 어떠한 즐거운 일도 행복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그저 기다림을 습관처럼 반복하며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질문은 실존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과학의 발달과 그로부터 얻어진 삶의 편리함으로 인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대'라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런 발전은 이미 역사를 통해 거듭되고 있었으며,항상 좋았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항상 나쁘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그저 그것들은 그렇게 계속될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처럼 말이다.
결국,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변화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존재의 이유이자,작동의 원리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계속되어왔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왜 살아가는지,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마땅한 해답 없이 기다리고 있다. 외톨이로 말이다.
☞ 관련 기출 제시문 보기
<2010학년도 서강대 수시2-1 문학부/커뮤니케이션학부 기출문제 중에서>
그로부터 2세기 뒤에,베케트는 비코가 어거스틴의 내러티브적 실재론을 이성적으로 거부한 것을 지지하고 루소의 왜곡된 회의주의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내러티브를 삶의 초월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한다.
실제로,그는 어떤 초월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철저한 허구주의(fictionalism)이며,그의 사명은 삶에 대해 글을 쓰는 것―문학만이 아니라―을 그 내러티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삶은 문제적인 것으로서,관습적인 장르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강현정 S · 논술 선임연구원 basekanggun@lycos.co.kr
⊙ 철학이 남겨준 과제 인류가 시작되고,철학이 생겨났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다른 동물들과는 무언가 다른 자각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자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했다.
학문의 왕이었던 철학은 그렇게 인간의 호기심과 '가상한 용기'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간은 점점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000년을 넘게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온갖 해석을 쏟아냈지만,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게 세상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었다.
카뮈(Albert Camus)의 '그런 문제는 뒤로 제쳐놓고라도, 우선 인간은 왜 살아가는지도 모르지 않는가?'라는 강한 의문은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밖에 없다.
태어난 이유도 모른 채 습관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나약하고 근거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지도 않고,그저 세상이 어떻느니 떠드는 것은 '결코' 무의미할 뿐이라는 주장에 우리의 가슴은 뻥하니 뚫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더라도,그닥 이유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행복 때문일까? 그렇다면 불행한 삶은 결코 살 가치가 없다고 해야 하나?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인 주제에,무슨 이유를 찾는 것은 다소 어리석을 수 있다.
그저 동물처럼 종족보존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기엔 우린 또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지 않은가.
먼저 결론을 말하자면,새뮤얼 베켓이 보기에 인간은 고도(Godot)를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고도를 말이다. 그런데 고도가 누구지?
⊙ 내러티브의 상실,부조리극의 원조
부조리(l'absurde) 문학의 시작은 바로 이 작품이었다.
부조리란 말 그대로 '말이 되지 않음' '이치에 맞지 않음'이란 뜻이다. 즉,온전한 인식이 가능한 전제와 그에 합당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고 모두 책을 읽는다면 바로 파악할 수 있겠지만,베켓은 굉장히 심오한 메시지를 친절하게 담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해 말하려다보니,결국 이해할 수 없는 형식을 띄게 된 것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만을 반복하는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역시 알 수 없는 주종관계에 놓여있는 포조와 럭키, 고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년,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작 5명이다.
이 다섯 명은 시간과 공간이 파괴되어 있는 '알 필요가 없는 공간,시골길'에서 단순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겪는다.
그 에피소드는 하나의 결론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고,그저 단발적으로,산발적으로 펼쳐진다.
잠시 전의 이야기는 잠시 후의 이야기와 전혀 관련이 없다. 그저 이런저런 지루한 대사만이 그들 사이에 나눠진다.
큰 액션이 있거나 큰 사건이 있지도 않다. 의미 없는 대사 사이에,그들의 관계와 의중 사이에서 관객들과 독자들이 메시지를 각자 찾아내어 조립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해석은 무수하게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부조리 문학에 대한 조리있는 해석이 무수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할 뿐이다.
⊙ 인간은 왜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가?
우리가 현대 문명이라고 부르는 바로 이것. 우리를 둘러싼 온갖 문명의 가지가지들은 사실상 서양문명을 지칭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서양문명을 진보로 알고,그렇게 따라왔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를 겪은 것은 문명개화가 늦어서였으며,그런 덕에 힘없는 종속국가의 운명 속에 한국전의 비극을 겪었다고 평가하곤 한다.
굳이 틀린 말이 아니다. 동양의 전통이 말그대로 지나온 것의 재발견에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서양에서는 새로운 기술과 사상이 등장하고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힘을 지니게 되었고,동양을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서양적인 힘과 우위,진보를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피상적으로 드러난 기술의 진보와 발명에 집중했을 뿐이지,그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심장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진 못했다.
서구의 근대화를 이끌어냈던 혈류를 몸 구석구석 뻗치게 해주었던 그 핵심으로서의 서양정신을 알지 못한 채,눈에 보이는 '신기함'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근대 유럽,아니 서양의 모든 역사를 지배했던 두 개의 정신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다.
그것은 기독교정신과 그리스정신이며,종교와 철학(논리성을 지닌 학문 혹은 과학)이며,성과 속(성스러움과 속됨)이다.
그들의 기술을 가능하게 했던 이성적인 능력(철학,과학)과 더불어 그들의 정신을 지탱해주었던 기독교정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성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려 하고 있을 때,한편으로는 지금의 생에 도덕을 제공하고 후세의 삶에 천국을 제공해주었던 기독교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이 양축이 항상 사이좋게 나아갔던 것은 아니다.
중세시절에 종교는 철학과 과학을 그저 신학의 시녀로 만들었으며,근대에는 과학이 그 모든 것을 앞질렀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 균형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양축을 중심으로 조율할 수 있는 중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성과 종교로부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받았던 인간들이,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불안해진 시기는 바로 그때였다.
살아있는 동안 인간을 도와줄 기술(이성)이 오히려 인간을 죽이고,인간에게 선과 악을 정해주고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루어주신다는 신이 두 번의 전쟁을 눈감아주신 것이었다.
인간은 불안해졌다.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모든 시선은 부정과 불안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신의 존재는 니체에 의해 이미 산산조각나 부정되어 버렸고,인과율로 대표되는 이성의 능력은 오히려 시시각각 우리들의 목숨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성능력이 알아낸 것은 다만,세상의 확대하여 바라볼 수 있는 솜씨 좋은 시력뿐이었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고,삶의 동아줄을 붙잡고 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그 어떤 메시지를 보내주진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고,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자기관찰의 시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 인간은 외톨이로 남게 되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두 명의 어머니는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은 어리석게도 고도(Godot)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었던 모든 것에 대한 의심
이 작품은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교훈적인 목적으로 쓰여졌을리 만무하다.
메시지를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자기가 아는 만큼 얻어낼 뿐이다.
이 작품은 현대인을,혹은 근대인을 형성해주었던 온갖 토대들에 대해 공격하고,조롱하고 폐기시켜 버린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었던 합리성과 신에 대한 믿음을 비웃으며,의미 없이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 두 인물,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에게는 과거가 없다. 미래도 없다. 그저 현재의 기다림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기다려도 그 고도는 오지 않는다.
우리를 편하고 안전하게 해주리라 믿었던 것들이 무너진 시대에,인간은 결국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톨이가 되고,부조리한 상황에 허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고도를 기다렸던 인간들에게 닥친 재앙만큼이나 큰 행운이 과연 찾아올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고도가 가져다 줘야 하는데 오질 않으니~!)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두 인물들에게 그 어떠한 즐거운 일도 행복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그저 기다림을 습관처럼 반복하며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질문은 실존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과학의 발달과 그로부터 얻어진 삶의 편리함으로 인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대'라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런 발전은 이미 역사를 통해 거듭되고 있었으며,항상 좋았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항상 나쁘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그저 그것들은 그렇게 계속될 뿐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처럼 말이다.
결국,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변화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존재의 이유이자,작동의 원리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계속되어왔다.
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왜 살아가는지,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마땅한 해답 없이 기다리고 있다. 외톨이로 말이다.
☞ 관련 기출 제시문 보기
<2010학년도 서강대 수시2-1 문학부/커뮤니케이션학부 기출문제 중에서>
그로부터 2세기 뒤에,베케트는 비코가 어거스틴의 내러티브적 실재론을 이성적으로 거부한 것을 지지하고 루소의 왜곡된 회의주의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내러티브를 삶의 초월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한다.
실제로,그는 어떤 초월적인 질서가 존재한다고 하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철저한 허구주의(fictionalism)이며,그의 사명은 삶에 대해 글을 쓰는 것―문학만이 아니라―을 그 내러티브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삶은 문제적인 것으로서,관습적인 장르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다.
강현정 S · 논술 선임연구원 basekanggun@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