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이 먼저인가, 본질이 먼저인가
⊙ 문제 해결
지난주 한국외대 논술의 전반적인 특성을 전략적으로 개괄한 데 이어 이번에는 문제 자체를 전술적으로 처리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구체적인 전술도는 제시문과 자료의 적나라한(?) 해부,그 해부 결과에 준거한 논제의 해결 방안 모색 정도로 크게 그려질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이 한국외대의 난이도 높은 논술 문제를 다룰 만한 것으로 다소나마 만만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은 없겠다.
1) 자료와 제시문 분석
제시문 A 일단 편의를 위해 영어 원문 번역을 싣는다. 다음과 같다.
사물이 호명된다는 것은 그 사물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호명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평,이름,외양,크기,무게,그리고 거의 항상 틀렸거나 불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많은 다른 것들과 연관된다.
이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그것들의 본성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이 그것들을 믿기 때문에 세대가 거듭될수록 그 믿음은 커져간다.
그 요소들은 서서히 사물의 일부가 되어가고 결국에는 그 사물 자체로 변화한다.
최초에 현상이었던 것이 종국에는 본질이 되는 것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으로부터 발췌된 이 제시문은 문제 전체를 이해하는 힘의 근원이다.
여타의 제시문과 자료들은 인용된 니체라는 이 내핵의 회전력에 힘입어 자전한다.
<제시문 A>의 이해는 그만큼 중요하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서양 철학의 파괴적인 분기점이다.
니체 이전과 이후의 철학적 판도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지만,이전의 2000년 이상과 이후의 고작 100여 년이라는 양적 시간의 비교는 니체라는 켜가 얼마나 거대한 지각 변동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수천 년을 지탱해 왔던 철학적 판(plate)이 이 켜로 인해 뒤틀리고 엎어졌던 바,그 압축적 양상을 우리는 위의 제시문으로부터 보고 있다.
사물을 무엇무엇으로 부르는 것이 그 사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보다 더 중요하다는 대목이 우선 눈에 띈다.
이는 상식의 선에서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가 '벽'이라고 부르는 사물은 그것을 부를 때 우리 안에서 연상되는 여러 요소들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벽'으로 이해된다.
어떤 벽이 무슨 색깔인지,그것에 기대었을 때 불편함이 없는지,기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두껍고 단단한지 하는 것들,곧 거칠게 통칭하여 일단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는 그 벽의 '외양'이 곧 우리에게 바로 그 '벽'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벽을 대했을 때 그 벽의 본질이나 불변하는 실체에 대하여 생각하고,그 생각의 결과로 정리된 어떤 관념을 '벽'이라고 정의하는 사람은 최소한 상식의 믿음 안에서는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
불변의 실체나 본질을 사물에 대한 이해의 유일한 준거로 사용하는 (혹시나 존재할지도 모를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거나 불필요하다고 간주'될지 모르겠으나,안타깝게도 벽의 외양을 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커져 간다.
더불어 그 믿음은 결국 '현상이 곧 본질'이라는 명제로 귀결된다.
니체 철학 혹은 니체의 형이상학이 지니는 파괴성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전통적 형이상학의 관념하에서 본질은 불변하는 것,유일한 것,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변화하는 것,다양한 것,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고 다른 것과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것,곧 위에서 본 바 '외양(또는 현상)'과 같은 것에 견주어 존재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종교적 신이나 철학적 실체와 같은 본질은 변화무쌍한 양태들에 항상 우선하며 항상 훌륭하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이런 방식의 형이상학은 인간적 삶의 다양성과 현재성을 부정하는 거짓된 관념 체계에 불과하다.
예컨대 플라톤의 경우와 같이 이데아의 세계를 실체로 대접하고 우리의 세계는 그것의 모사본에 불과한 것으로 하대할 때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부정되고 마는데,이는 사실 허구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데아도 유일신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트릭스적 현상계 너머에는 어떤 실재나 본체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힘이 스스로 수확한 성과를 우리의 위, 혹은 뒤의 어떤 곳에 존재한다고 오인되어 온 존재에게 양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부정과 자기 비하의 얼룩만을 남길 뿐이다.
인간적 삶 자체에서 발현되는 역능(puissance),그 힘을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형이상학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바람직한 '생(生) 철학'이라고 니체는 확신했다.
현상에 선행하는 본질은 없다. 현상이 곧 본질이다.
우리의 삶에 선행하는 실체는 없다. 삶이 곧 실체다.
삶을 긍정하면 삶이 즐거워진다. 학문도 즐거워진다. 즐거운 학문!
제시문 B 보는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에 대한 니체적 이해의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어떤 사물이 무엇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현상적 측면,곧 니체가 열거했던 사물에 속한 여러 요소들을 전적으로 배제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 사물의 우연적 속성일 뿐 필연적인 본질은 아니다.
벽은 흴 수도 있고 검을 수도 있으므로 색은 결코 그 벽의 본질일 수 없다.
인간의 외양 혹은 외향적 성질도 마찬가지다.
'교양이 있다'거나 '음악적이다'라는 속성은 어떤 인간에게나 고유한 본래적 면목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그 인간이 무엇임을 드러내는 표지일 수 없다.
본질은 고유하고 불변하며 본래적인 것으로 가변적인 현상의 국면 너머에(혹은 이면에)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와 같은 실체의 세계를 따로 상정하지 않고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 점에 있어서 플라톤과 구별되지만 불변적 본질을 현상과 구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전통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실체는 명제의 주어 자리에만 올 수 있으며 결코 술어의 자리에는 올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떤 대상이 그 자체로서 무엇인지를 말하는 진술"이라는 진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대상'은 주어 자리에서 항상 '무엇인지를 말하는' 술어를 통해 설명된다.
실체 혹은 본질은 항상 '어떤 대상'이 위치하는 자리에 와야지,'무엇인지를 말하는 진술'에 위치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
실체 혹은 본질은 언제나 주어의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본래적 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사물들의 니체적 다양성,그 다기한 차이는 존재론적으로 항상 무시될 수밖에 없다.
무수한 현상적 우연성들은 순수결정의 동질성에 묻어서 그것을 더럽히는 얼룩 혹은 더께로 간주되고 만다.
최소한 니체적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에 대한 니체적 관점과 대비시켜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료 1 발췌된 촘스키는 완벽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자료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언어학적 비전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
"언어학은 이상화된 '화자-청자'를 연구하는 학문","이상화된 화자-청자란 완전하게 균일한 언어사회의 구성원","실제 언어 수행의 이면에 있는 화자-청자의 언어능력은 하나일 뿐","언어학자는 실제의 언어 수행 자료에서 그 밑에 감춰져 있는 규칙 체계,즉 그 화자-청자가 완벽하게 습득해 실제 언어 수행에 사용하고 있는 규칙 체계를 찾아내야 한다","언어학은 실제 행위 밑에 있는 정신적인 실체를 발견해 가는 정신적인 것","타인의 말에 대한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향성,개인의 고유한 언어 습관,실제 언어 수행의 자료 등은 이러한 정신적 실체의 성격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있으나 그 자체가 언어학의 실제 연구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등등.
촘스키의 이른바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의 핵심은 인간의 '언어능력'이 실제 발화에서 수행되는 언어의 화용적 국면의 기저에 존재하는 '실체'라는 점을 논증한 데 있다.
언어능력은 본래적으로 습득된 언어 규칙 체계로서 발화상의 다양한 변칙과 변용,탈락과 왜곡,실수와 오류 등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언어 수행의 제양상에 존재론적으로 앞서는 언어적 '본질'이다.
따라서 언어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언어적 본질에 묻어 있는 더께와 얼룩을 제거하고 본질 자체의 고유한 법칙과 체계를 연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용한 바와 같이 그것은 오직 '하나일 뿐'인 '균일한' '정신적인 실체를 발견해 가는' 전통적 형이상학 연구방법론의 언어학 버전이다.
실제로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구조주의 언어학이 실제 발화의 국면만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현상적 한계(?)를 극복하고 '언어보편성'의 관점에서 언어적 본질 혹은 실체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제안되었다.
따라서 언어 현상의 다양체는 촘스키 안에서 항상 자기동일적인(self-identical) 실체로 환원된다.
자료 2 니체적인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의 대비는 이 대목에서 구체적 상황과 조우한다.
스타벅스의 판매 전략이 과연 니체적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가를 섣부르게 가늠하기에 앞서 일단 사물에 대한 이해를 두 사상가가 어떻게 달리 하고 있었던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어떤 사물이 무엇임을 정의하려면 그 사물에 속한 우연적 속성을 제거하고 그 자체로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곧 그 사물의 본질이므로 그 때 비로소 그 사물은 다른 사물이 아닌 바로 '그 사물'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커피의 경우,커피가 커피 그 자체로서 말해질 수 있는 커피의 본질이 커피를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커피'로 만든다.
따라서 커피의 본질 이외에 주어진 것들, 즉 커피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분위기,커피잔의 모양과 색깔,커피를 마실 때 흘러나오는 음악 등은 커피에 들러붙어(?) 있는 우연적 요소들일 뿐이다.
결국 어떤 우연적 속성들이 커피의 더께로 들러붙어 있든지 간에 '커피는 커피'일 뿐이며 따라서 어떤 커피는 그것이 어떠한 커피이든지 간에 본래적이고 불변하며 유일한 커피이다.
이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의 본질을 따지는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것임이 자명하다.
다음 니체의 경우. 어떤 사물이 무엇임을 정의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사물이 무엇이냐 하는 본질적 질문이 아니라 그 사물과 관계하고 있는 여타의 요소들이다.
그 요소들을 통칭하여 '현상(appearance)'이라고 할 때,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믿음 안에서 그 현상은 서서히 어떤 사물의 일부가 되어 가고 종국에는 그 사물 자체로 변화한다.
예컨대 커피의 경우,커피가 커피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커피의 본질은 무엇이다'라는 진술 속에서가 아니라 그 커피와 관계하고 있는 요소들 속에서,그 요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이다.
그 요소들은 서서히 커피의 일부가 되어 가고 종국에는 커피 자체로 변화한다.
따라서 커피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분위기,커피잔의 모양과 색깔,커피를 마실 때 흘러나오는 음악 등은 커피와 경계를 갖지 않는다.
결국 어떤 우연적 속성들이 '어떤 커피'를 바로 '그 커피'가 되게 하며 따라서 어떤 커피는 그것이 어떠한 커피이냐에 따라서 다른 커피가 아닌 오직 '그 커피'로 되는 것이다.
'오직 그 커피'는 무수히 많으며 모든 커피는 '커피'라고 말해지는 순간 이미 '그 커피'로서 말해지는 것이다.
이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의 본질을 따지는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것임이 자명하다.
소개된 스타벅스의 판매 전략은 이제 분명해졌다.
스타벅스는 결코 커피의 본래적 면목,그 고유한 본질을 팔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것을 팔 생각이라면 이름부터 '별 다방'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스타벅스는 커피 자체보다는 '스타벅스다움',그 스타일과 공감각적 자극의 특별함을 팔고 싶어 한다.
스타벅스의 '커피'는 '스타벅스의'라는 형용사를 제거해버린 진술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획득하지 못한다.
그런 커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시는 커피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니체가 마시는 커피를 팔고 싶은 것이다.
자료 3 소설 속의 화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줄기차게 매달린다.
기억이 상실된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의 비의와 신성은 과거로부터 온다."
나는 누구임,그 본질적 정의의 결론이 '과거'라는 시간의 켜로 내려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자료의 중핵을 파악한 셈이 된다.
과거란 무엇인가? 특정한 개인의 과거란 어떤 성질의 시간들인가? 그것은 우연과 돌발과 차이와 특이함으로 축적된 오직 그에게만 고유한 시간이 아닐 것인가?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오로지 특정한 그에게만 들러붙어 있는 더께의 시간이 곧 과거인 것이다.
그 더께들,얼룩들이 혼재됨으로써 비로소 '그'라는 어떤 사람이 생성되어 가며,역으로 '어떤 그'는 그의 과거적 더께들,얼룩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기억을 상실한 소설 속의 화자가 자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 결핍된 시간적 조건들에 매달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만일 어떠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인간의 본래적 면목,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을 '나는 누구임'의 해답으로 채택할 요량이었다면 그는 자신만의 과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어떠한 시간적 조건이나 개인의 특유한 경험치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고유한 본래성을 자기의 '자기다움'으로 정의내리면 될 테니까.
그렇게 하면 그는 내친 김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과하여 데카르트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놀라운 기량을 뽐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는 니체적 걸음걸이로 영원회귀와 긍정의 삶 속으로 활기차게 걸어 들어가기로 한다.
인생에 대한 "용기 있는 질문에서부터" "까짓 것,다시 시작해 보기"로 한 그는 "지금 이 순간 나에 관해서 오직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있음"을 긍정하며 인생을 "어여쁜 여인처럼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고유한 유일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여하는 현재적 조건에 대한 긍정,그것이 그로 하여금 삶을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자료 4 사랑 혹은 '사랑'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강요하는 어떤 순수함이나 지고지순함이 바르트의 이 글에서는 전혀 목격되지 않는다.
대신 욕망의 특이함과 초췌함,페티쉬(fetish)적인 숭배와 육체의 주름들과 같은 단편적이고 찰나적인 항목들이 사랑의 이유와 근거에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의 본래적 면목,다분히 플라토닉한 미덕과 가치를 향해 있는 그 무엇과는 등을 돌린 채 정반대편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어떤 사람에게만 고유한 특정 요소,요컨대 '손톱을 자른 모양,약간 비스듬하게 깨진 이,흘러내린 머리카락,말하거나 담배 피우면서 손가락을 벌리는 모양'이 사랑이라는 '유니크(unique)'한(결코 유니버설(universal)하지 않은) 감정을 유발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유니크함은 '유니크함' 자신을 본래성으로 가질 뿐이다.
따라서 사랑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다양하게 그 유니크함을 뿜어낼 수 있다.
사랑은 결코 고정불변의 유일성 속에 스스로를 얽어매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표되기 힘들다. 매사에 유니크하므로.
자료 5 근래 보기 드물게 지고지순하기 짝이 없는 여자친구의 진부한 멘트에 대한 '갑'의 태도는 바르트의 입장에 따르는 것으로 논제에서 제한되었으므로,설명은 논제 분석에서 대신하기로 한다.
2) 논제 분석
[문제1] 앞선 제시문 분석에서 내용적으로 이미 분석된 바와 다름 없으므로 논제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개략적인 수준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문제1]의 경우 문제 전체를 아우르는 두 제시문의 대비를 공통적 핵심어를 통해 기술해 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먼저 공통어를 찾으라는 요구는 영어 제시문에 대한 해석 여부를 가늠해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뒤 해석의 결과를 다른 하나의 한글 제시문과 비교해서 어떤 단어가 공통 분모인지를 찾아 그것을 기준으로 두 제시문의 차이를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논술자는 '본질(essence)'과 같은 단어를 중심으로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각자의 입장을 피력하는지를 논술해야 한다.
[문제2] 두 제시문의 논지 차이는 [문제1]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질에 대한 두 사상가의 입장 차이가 전부다.
따라서 세 자료들이 본질과 현상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구체적 응용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때,그 구체성들이 역시 본질과 현상에 대한 니체적 추상성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추상성 가운데 어떤 것과 함수 관계를 갖는지 밝혀 주면 될 것이다.
그 내용은 이미 제시문 분석에서 다루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문제3] <자료 4>의 요지는,사랑을 유발하는 동인 혹은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 자체가 가지는 유니크함이라는 것으로,제시문 분석에서 논의한 바와 같다.
같은 맥락에서 '갑'은 바르트적인 유니크함에 제한받으므로 사랑의 불변성을 강변하는 여자친구의 메시지에 대하여 사랑의 '가변적 유니크함'으로 항변할 것이다.
사랑은,그것이 미덕으로 강요하는 대상의 유일성,불변성,항구성 등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특별하게 관계하는 특이성,찰나성,우연성 등을 오히려 그 본질로 갖는다는 식으로.
그 본질이란 대상의 실루엣,형체,분위기나 그것들보다 훨씬 작은 육체의 한 요소들의 발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들은 항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들로부터 촉발되는 사랑이나 욕망 역시 항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사랑도 변할 수 있다는 나의 선택은 따라서,사물의 본래적 본성과는 무관한 현상적 조건들이 결국에는 그 사물 자체로 변화하며,당연한 귀결로서 현상적 조건들이 변화하면 그 사물도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니체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라는 식으로.
진리영 S · 논술 선임연구원 furyfury13@naver.com
⊙ 문제 해결
지난주 한국외대 논술의 전반적인 특성을 전략적으로 개괄한 데 이어 이번에는 문제 자체를 전술적으로 처리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구체적인 전술도는 제시문과 자료의 적나라한(?) 해부,그 해부 결과에 준거한 논제의 해결 방안 모색 정도로 크게 그려질 것이다.
이로써 학생들이 한국외대의 난이도 높은 논술 문제를 다룰 만한 것으로 다소나마 만만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다행은 없겠다.
1) 자료와 제시문 분석
제시문 A 일단 편의를 위해 영어 원문 번역을 싣는다. 다음과 같다.
사물이 호명된다는 것은 그 사물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호명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평,이름,외양,크기,무게,그리고 거의 항상 틀렸거나 불필요하다고 간주되는 많은 다른 것들과 연관된다.
이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그것들의 본성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단지 사람들이 그것들을 믿기 때문에 세대가 거듭될수록 그 믿음은 커져간다.
그 요소들은 서서히 사물의 일부가 되어가고 결국에는 그 사물 자체로 변화한다.
최초에 현상이었던 것이 종국에는 본질이 되는 것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으로부터 발췌된 이 제시문은 문제 전체를 이해하는 힘의 근원이다.
여타의 제시문과 자료들은 인용된 니체라는 이 내핵의 회전력에 힘입어 자전한다.
<제시문 A>의 이해는 그만큼 중요하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서양 철학의 파괴적인 분기점이다.
니체 이전과 이후의 철학적 판도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지만,이전의 2000년 이상과 이후의 고작 100여 년이라는 양적 시간의 비교는 니체라는 켜가 얼마나 거대한 지각 변동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수천 년을 지탱해 왔던 철학적 판(plate)이 이 켜로 인해 뒤틀리고 엎어졌던 바,그 압축적 양상을 우리는 위의 제시문으로부터 보고 있다.
사물을 무엇무엇으로 부르는 것이 그 사물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보다 더 중요하다는 대목이 우선 눈에 띈다.
이는 상식의 선에서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예컨대 우리가 '벽'이라고 부르는 사물은 그것을 부를 때 우리 안에서 연상되는 여러 요소들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벽'으로 이해된다.
어떤 벽이 무슨 색깔인지,그것에 기대었을 때 불편함이 없는지,기대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충분히 두껍고 단단한지 하는 것들,곧 거칠게 통칭하여 일단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는 그 벽의 '외양'이 곧 우리에게 바로 그 '벽'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벽을 대했을 때 그 벽의 본질이나 불변하는 실체에 대하여 생각하고,그 생각의 결과로 정리된 어떤 관념을 '벽'이라고 정의하는 사람은 최소한 상식의 믿음 안에서는 없다고 단언해도 좋다.
불변의 실체나 본질을 사물에 대한 이해의 유일한 준거로 사용하는 (혹시나 존재할지도 모를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거나 불필요하다고 간주'될지 모르겠으나,안타깝게도 벽의 외양을 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커져 간다.
더불어 그 믿음은 결국 '현상이 곧 본질'이라는 명제로 귀결된다.
니체 철학 혹은 니체의 형이상학이 지니는 파괴성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전통적 형이상학의 관념하에서 본질은 불변하는 것,유일한 것,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것은 변화하는 것,다양한 것,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고 다른 것과 필연적으로 관계하는 것,곧 위에서 본 바 '외양(또는 현상)'과 같은 것에 견주어 존재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종교적 신이나 철학적 실체와 같은 본질은 변화무쌍한 양태들에 항상 우선하며 항상 훌륭하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이런 방식의 형이상학은 인간적 삶의 다양성과 현재성을 부정하는 거짓된 관념 체계에 불과하다.
예컨대 플라톤의 경우와 같이 이데아의 세계를 실체로 대접하고 우리의 세계는 그것의 모사본에 불과한 것으로 하대할 때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부정되고 마는데,이는 사실 허구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데아도 유일신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트릭스적 현상계 너머에는 어떤 실재나 본체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힘이 스스로 수확한 성과를 우리의 위, 혹은 뒤의 어떤 곳에 존재한다고 오인되어 온 존재에게 양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부정과 자기 비하의 얼룩만을 남길 뿐이다.
인간적 삶 자체에서 발현되는 역능(puissance),그 힘을 인간에게 되돌려주는 형이상학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긍정하는 바람직한 '생(生) 철학'이라고 니체는 확신했다.
현상에 선행하는 본질은 없다. 현상이 곧 본질이다.
우리의 삶에 선행하는 실체는 없다. 삶이 곧 실체다.
삶을 긍정하면 삶이 즐거워진다. 학문도 즐거워진다. 즐거운 학문!
제시문 B 보는 바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에 대한 니체적 이해의 정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어떤 사물이 무엇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현상적 측면,곧 니체가 열거했던 사물에 속한 여러 요소들을 전적으로 배제해야만 한다.
그것은 그 사물의 우연적 속성일 뿐 필연적인 본질은 아니다.
벽은 흴 수도 있고 검을 수도 있으므로 색은 결코 그 벽의 본질일 수 없다.
인간의 외양 혹은 외향적 성질도 마찬가지다.
'교양이 있다'거나 '음악적이다'라는 속성은 어떤 인간에게나 고유한 본래적 면목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그 인간이 무엇임을 드러내는 표지일 수 없다.
본질은 고유하고 불변하며 본래적인 것으로 가변적인 현상의 국면 너머에(혹은 이면에)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와 같은 실체의 세계를 따로 상정하지 않고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본 점에 있어서 플라톤과 구별되지만 불변적 본질을 현상과 구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전통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실체는 명제의 주어 자리에만 올 수 있으며 결코 술어의 자리에는 올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떤 대상이 그 자체로서 무엇인지를 말하는 진술"이라는 진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떤 대상'은 주어 자리에서 항상 '무엇인지를 말하는' 술어를 통해 설명된다.
실체 혹은 본질은 항상 '어떤 대상'이 위치하는 자리에 와야지,'무엇인지를 말하는 진술'에 위치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
실체 혹은 본질은 언제나 주어의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본래적 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사물들의 니체적 다양성,그 다기한 차이는 존재론적으로 항상 무시될 수밖에 없다.
무수한 현상적 우연성들은 순수결정의 동질성에 묻어서 그것을 더럽히는 얼룩 혹은 더께로 간주되고 만다.
최소한 니체적 관점에서 볼 때는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에 대한 니체적 관점과 대비시켜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료 1 발췌된 촘스키는 완벽하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이다.
자료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의 언어학적 비전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
"언어학은 이상화된 '화자-청자'를 연구하는 학문","이상화된 화자-청자란 완전하게 균일한 언어사회의 구성원","실제 언어 수행의 이면에 있는 화자-청자의 언어능력은 하나일 뿐","언어학자는 실제의 언어 수행 자료에서 그 밑에 감춰져 있는 규칙 체계,즉 그 화자-청자가 완벽하게 습득해 실제 언어 수행에 사용하고 있는 규칙 체계를 찾아내야 한다","언어학은 실제 행위 밑에 있는 정신적인 실체를 발견해 가는 정신적인 것","타인의 말에 대한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향성,개인의 고유한 언어 습관,실제 언어 수행의 자료 등은 이러한 정신적 실체의 성격에 대한 증거는 될 수 있으나 그 자체가 언어학의 실제 연구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등등.
촘스키의 이른바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의 핵심은 인간의 '언어능력'이 실제 발화에서 수행되는 언어의 화용적 국면의 기저에 존재하는 '실체'라는 점을 논증한 데 있다.
언어능력은 본래적으로 습득된 언어 규칙 체계로서 발화상의 다양한 변칙과 변용,탈락과 왜곡,실수와 오류 등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언어 수행의 제양상에 존재론적으로 앞서는 언어적 '본질'이다.
따라서 언어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언어적 본질에 묻어 있는 더께와 얼룩을 제거하고 본질 자체의 고유한 법칙과 체계를 연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용한 바와 같이 그것은 오직 '하나일 뿐'인 '균일한' '정신적인 실체를 발견해 가는' 전통적 형이상학 연구방법론의 언어학 버전이다.
실제로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구조주의 언어학이 실제 발화의 국면만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현상적 한계(?)를 극복하고 '언어보편성'의 관점에서 언어적 본질 혹은 실체를 확보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제안되었다.
따라서 언어 현상의 다양체는 촘스키 안에서 항상 자기동일적인(self-identical) 실체로 환원된다.
자료 2 니체적인 것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의 대비는 이 대목에서 구체적 상황과 조우한다.
스타벅스의 판매 전략이 과연 니체적인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가를 섣부르게 가늠하기에 앞서 일단 사물에 대한 이해를 두 사상가가 어떻게 달리 하고 있었던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어떤 사물이 무엇임을 정의하려면 그 사물에 속한 우연적 속성을 제거하고 그 자체로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곧 그 사물의 본질이므로 그 때 비로소 그 사물은 다른 사물이 아닌 바로 '그 사물'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커피의 경우,커피가 커피 그 자체로서 말해질 수 있는 커피의 본질이 커피를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커피'로 만든다.
따라서 커피의 본질 이외에 주어진 것들, 즉 커피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분위기,커피잔의 모양과 색깔,커피를 마실 때 흘러나오는 음악 등은 커피에 들러붙어(?) 있는 우연적 요소들일 뿐이다.
결국 어떤 우연적 속성들이 커피의 더께로 들러붙어 있든지 간에 '커피는 커피'일 뿐이며 따라서 어떤 커피는 그것이 어떠한 커피이든지 간에 본래적이고 불변하며 유일한 커피이다.
이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의 본질을 따지는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것임이 자명하다.
다음 니체의 경우. 어떤 사물이 무엇임을 정의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사물이 무엇이냐 하는 본질적 질문이 아니라 그 사물과 관계하고 있는 여타의 요소들이다.
그 요소들을 통칭하여 '현상(appearance)'이라고 할 때,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믿음 안에서 그 현상은 서서히 어떤 사물의 일부가 되어 가고 종국에는 그 사물 자체로 변화한다.
예컨대 커피의 경우,커피가 커피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커피의 본질은 무엇이다'라는 진술 속에서가 아니라 그 커피와 관계하고 있는 요소들 속에서,그 요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이다.
그 요소들은 서서히 커피의 일부가 되어 가고 종국에는 커피 자체로 변화한다.
따라서 커피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분위기,커피잔의 모양과 색깔,커피를 마실 때 흘러나오는 음악 등은 커피와 경계를 갖지 않는다.
결국 어떤 우연적 속성들이 '어떤 커피'를 바로 '그 커피'가 되게 하며 따라서 어떤 커피는 그것이 어떠한 커피이냐에 따라서 다른 커피가 아닌 오직 '그 커피'로 되는 것이다.
'오직 그 커피'는 무수히 많으며 모든 커피는 '커피'라고 말해지는 순간 이미 '그 커피'로서 말해지는 것이다.
이는 커피를 마시는 행위의 본질을 따지는 경우에도 다르지 않을 것임이 자명하다.
소개된 스타벅스의 판매 전략은 이제 분명해졌다.
스타벅스는 결코 커피의 본래적 면목,그 고유한 본질을 팔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것을 팔 생각이라면 이름부터 '별 다방'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스타벅스는 커피 자체보다는 '스타벅스다움',그 스타일과 공감각적 자극의 특별함을 팔고 싶어 한다.
스타벅스의 '커피'는 '스타벅스의'라는 형용사를 제거해버린 진술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획득하지 못한다.
그런 커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시는 커피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니체가 마시는 커피를 팔고 싶은 것이다.
자료 3 소설 속의 화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줄기차게 매달린다.
기억이 상실된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의 비의와 신성은 과거로부터 온다."
나는 누구임,그 본질적 정의의 결론이 '과거'라는 시간의 켜로 내려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자료의 중핵을 파악한 셈이 된다.
과거란 무엇인가? 특정한 개인의 과거란 어떤 성질의 시간들인가? 그것은 우연과 돌발과 차이와 특이함으로 축적된 오직 그에게만 고유한 시간이 아닐 것인가?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오로지 특정한 그에게만 들러붙어 있는 더께의 시간이 곧 과거인 것이다.
그 더께들,얼룩들이 혼재됨으로써 비로소 '그'라는 어떤 사람이 생성되어 가며,역으로 '어떤 그'는 그의 과거적 더께들,얼룩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기억을 상실한 소설 속의 화자가 자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임을 확인하기 위해 결핍된 시간적 조건들에 매달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만일 어떠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인간의 본래적 면목,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을 '나는 누구임'의 해답으로 채택할 요량이었다면 그는 자신만의 과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어떠한 시간적 조건이나 개인의 특유한 경험치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고유한 본래성을 자기의 '자기다움'으로 정의내리면 될 테니까.
그렇게 하면 그는 내친 김에 아리스토텔레스를 경과하여 데카르트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놀라운 기량을 뽐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화자는 니체적 걸음걸이로 영원회귀와 긍정의 삶 속으로 활기차게 걸어 들어가기로 한다.
인생에 대한 "용기 있는 질문에서부터" "까짓 것,다시 시작해 보기"로 한 그는 "지금 이 순간 나에 관해서 오직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있음"을 긍정하며 인생을 "어여쁜 여인처럼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 고유한 유일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여하는 현재적 조건에 대한 긍정,그것이 그로 하여금 삶을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자료 4 사랑 혹은 '사랑'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강요하는 어떤 순수함이나 지고지순함이 바르트의 이 글에서는 전혀 목격되지 않는다.
대신 욕망의 특이함과 초췌함,페티쉬(fetish)적인 숭배와 육체의 주름들과 같은 단편적이고 찰나적인 항목들이 사랑의 이유와 근거에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의 본래적 면목,다분히 플라토닉한 미덕과 가치를 향해 있는 그 무엇과는 등을 돌린 채 정반대편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어떤 사람에게만 고유한 특정 요소,요컨대 '손톱을 자른 모양,약간 비스듬하게 깨진 이,흘러내린 머리카락,말하거나 담배 피우면서 손가락을 벌리는 모양'이 사랑이라는 '유니크(unique)'한(결코 유니버설(universal)하지 않은) 감정을 유발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유니크함은 '유니크함' 자신을 본래성으로 가질 뿐이다.
따라서 사랑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다양하게 그 유니크함을 뿜어낼 수 있다.
사랑은 결코 고정불변의 유일성 속에 스스로를 얽어매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표되기 힘들다. 매사에 유니크하므로.
자료 5 근래 보기 드물게 지고지순하기 짝이 없는 여자친구의 진부한 멘트에 대한 '갑'의 태도는 바르트의 입장에 따르는 것으로 논제에서 제한되었으므로,설명은 논제 분석에서 대신하기로 한다.
2) 논제 분석
[문제1] 앞선 제시문 분석에서 내용적으로 이미 분석된 바와 다름 없으므로 논제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개략적인 수준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문제1]의 경우 문제 전체를 아우르는 두 제시문의 대비를 공통적 핵심어를 통해 기술해 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먼저 공통어를 찾으라는 요구는 영어 제시문에 대한 해석 여부를 가늠해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뒤 해석의 결과를 다른 하나의 한글 제시문과 비교해서 어떤 단어가 공통 분모인지를 찾아 그것을 기준으로 두 제시문의 차이를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논술자는 '본질(essence)'과 같은 단어를 중심으로 니체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게 각자의 입장을 피력하는지를 논술해야 한다.
[문제2] 두 제시문의 논지 차이는 [문제1]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질에 대한 두 사상가의 입장 차이가 전부다.
따라서 세 자료들이 본질과 현상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구체적 응용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때,그 구체성들이 역시 본질과 현상에 대한 니체적 추상성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추상성 가운데 어떤 것과 함수 관계를 갖는지 밝혀 주면 될 것이다.
그 내용은 이미 제시문 분석에서 다루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문제3] <자료 4>의 요지는,사랑을 유발하는 동인 혹은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 자체가 가지는 유니크함이라는 것으로,제시문 분석에서 논의한 바와 같다.
같은 맥락에서 '갑'은 바르트적인 유니크함에 제한받으므로 사랑의 불변성을 강변하는 여자친구의 메시지에 대하여 사랑의 '가변적 유니크함'으로 항변할 것이다.
사랑은,그것이 미덕으로 강요하는 대상의 유일성,불변성,항구성 등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특별하게 관계하는 특이성,찰나성,우연성 등을 오히려 그 본질로 갖는다는 식으로.
그 본질이란 대상의 실루엣,형체,분위기나 그것들보다 훨씬 작은 육체의 한 요소들의 발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들은 항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들로부터 촉발되는 사랑이나 욕망 역시 항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사랑도 변할 수 있다는 나의 선택은 따라서,사물의 본래적 본성과는 무관한 현상적 조건들이 결국에는 그 사물 자체로 변화하며,당연한 귀결로서 현상적 조건들이 변화하면 그 사물도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니체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라는 식으로.
진리영 S · 논술 선임연구원 furyfury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