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역설
거의 반 세기 전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신화적 은유 형식을 통해 설파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 다음과 같다.
"사이렌(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요정으로,그녀의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들으면 유혹에 이끌려 물에 빠져 죽게 됨)의 노래를 들은 자는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다. …중략…
죽음에 대해서나 행복에 대해서나 적대적인 오디세우스는 그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가능성만이 있음을 안다.
그 중 하나의 가능성을 그는 선원들에게 지시한다.
그는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봉하고는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갈 것을 명령한다.
살아남고 싶은 자는 되돌릴 수 없는 유혹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들을 수 없을 때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몸과 집중된 마음으로 앞만을 보아야 하며 옆에 있는 것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충동마저 그들은 긴장을 풀지 않고 새로운 여분의 노력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오디세우스는 다른 가능성을 택한다. 그는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돛대에 묶게 하고,그렇게 무력한 상태에서만 들을 수 있다.
유혹이 클수록 그는 더욱 더 강하게 묶도록 만든다." (2008학년도 서강대 수시2-2)
그들이 오래전 신화 형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인용된 다음 문장이다.
"죽음에 대해서나 행복에 대해서나 적대적인 오디세우스는 그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가능성만이 있음을 안다."
두 개의 가능성. 이 가능성들은 오디세우스의 적대적인 목표(?)인 죽음과 행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성은 적대성이 배태한,혹은 필연적으로 배태할 수밖에 없는 '수동태'적 가능태다.
이 수동적 가능태의 구체적 양상은 언급한 바와 같이 사이렌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오디세우스의 노력으로 드러난다.
그 노력의 첫 번째 양상은 노동자들의 무조건적인 노동이다.
밀랍으로 귀를 막은 노동자들은 사이렌의 노랫소리,즉 노동 이외의 유혹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차단한 상태에서 행하는 노동 행위에 맹목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만 삶을 보전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오디세우스 자신이 감당한,사이렌의 노래에 노출되는 대신 스스로를 결박함으로써 능동성을 자가박탈하는 행위로 발현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간파해야 할 핵심은 신화적 은유가 지적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 상황이다.
죽음과 행복에 대한 오디세우스의 적대성,그 적대성을 격파해 나가고자 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과연 우리 사회의 어떤 국면들에 대한 허무주의적 일갈인지 간파하는 것이 일단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적 과제다.
결론부터 말하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고 싶었던 해당 주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화적 은유를 통해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행복할 수도 없는 현대 자본주의적 인간의 삶의 모순성이다.
밀랍으로 귀를 막거나 스스로를 결박하는 행위는 결코 극복과 성취의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결핍일 수밖에 없는 현실적 표지들이다.
귀를 막은 채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노동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간들,스스로를 결박한 채 달콤한 노랫소리에 취해 삶의 무기력함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런 인간군상의 부조리한 국면들이 바로 오디세우스적 적대성의 은유이며,자본주의적 현실이 표상하는 원관념이다.
결국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고,죽지 않으므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사이렌과 마주친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사이렌과 마주친 인간이 구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 시대의 현실태를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현대인의 본성이 황폐하게 된 것은 사회의 진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경제적 생산성의 증가는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 장치와 이를 운용하는 집단에 그렇지 못한 다수에 대해 엄청난 우월감을 갖게 해 주었다. 개인은 경제 권력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며,이 권력은 인간 본성에 대한 사회의 폭력을 일찍이 예견하지 못했을 정도까지 밀고 나간다.
개인은 그가 사용하는 기술 장치 앞에서 사라지지만,그 대가로 이 장치에 의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받는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에게 분배되는 재화의 양이 증가할수록 대중은 무기력해지고 조종될 가능성이 커진다. 물질적으로는 괄목할 만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보잘것없는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은 천박한 정신의 확산에서 잘 나타난다.
정신의 진정한 속성은 물신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정신이 문화 상품으로 고정되고 소비를 위한 목적으로 팔아넘겨질 때 정신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와 유치한 오락의 범람은 인간을 계몽하면서 동시에 바보로 만든다." (숙명여대 2007학년도 수시1)
경제적 생산성의 증가는 결국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다시 사이렌 앞의 오디세우스로 인간을 전락시키고 만다.
경제적 향락,그 사이렌적 노랫소리 앞에서 인간은 결박당한 행복,조종당하는 경제적 향응을 누릴 수밖에 없다.
노랫소리는 커지고 재화의 양은 증대하지만 그에 비례해 무기력함도 역시 증대한다.
죽음과 행복을 모두 결박당한 상황. 향락과 향응 앞에서 과감하게 밀랍과 결박을 던져 버릴 엄두를 우리는 감히 내지 못한다.
그 중 어느 하나만 실천해도 우리는 자의성을 상실한 죽음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정신은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경제적 굴레에 예속되고 만다.
물신주의,그 경제적 사이렌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정신은 이미 밧줄로 결박되거나 밀랍으로 봉인된 사물(혹은 재화)에 다름 아니다.
정신이 경제적 질서 속의 사물로 재편돼 편입할 경우 당연한 결과이지만,그것은 '문화 상품으로 고정되고 소비를 위한 목적으로 팔아넘겨'진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인간적 정신이 문화 상품으로 고정돼 버리는 구체적 양상은,예컨대 저급한 대중문화로 드러난다.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반복성(혹은 재연성),정형성,표준성 등으로 규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일한 요소의 반복,형식의 정형성,반응의 표준성 등은 상품 또는 재화의 생산 과정에서 드러나는 경제적 특징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경우 그것은 고전음악의 구체적 전체성(세부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변증법적 관계)과 대체 불가능성(부분 함몰이 곧 전체 함몰)이나 형식의 다기함,그리고 비표준화된 수용자의 반응 등과는 전혀 반대되는 특질들을 보인다.
유사한 마디의 지속적인 반복과 표절,세부성과 전체성의 비유기적 결합,어떤 것으로 대체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음악적 전체성,음악적 형식의 천편일률성,음악적 결과에 대한 대중의 표준화된 반응. 이러한 대중문화적 특질들은 물적 상품들이 표상하는 경제적 질서를 결코 어그러뜨리는 바 없이 반복성,정형성,표준성 등의 상품성을 선전하면서 소비된다.
물적 상품과 예술적(?) 상품의 등질적 질서.
문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판하고자 했던 현실태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 내지는 경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실제로 비판적 인식의 문제를 실천의 영역으로 급선회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의 문제 인식과 비판적 일갈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난제는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진 형국이다.
비판 없는 현실 자체를 비판해 보려는 공허한 비판의 움직임도 맥 빠지긴 마찬가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입시 목적으로 논술을 해야 하는 학생이든,학교 선생님이든,정치인이든,현실 상황에 대한 비판 이외에 명쾌한 실천의 방안을 내놓기는 힘들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보드리야르적 '내파'의 개념을 거론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내파(implosion)'란 말 그대로 내적으로 파열(혹은 파괴)한다는 의미다.
보드리야르에게 내파는 이른바 과잉실재,곧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혹은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지배하는 현실을 돌파하는 하나의 출구전략으로 사용되고 있지만,이와 같은 의미를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해(실제로 보드리야르의 내파 개념도 광범위한 차원까지 확대된다) 현실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거론해볼 수도 있다.
사실 내파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전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언가 대단히 정격화된 내용으로 말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내파는,저항적인 극복의 전략 대신 자본주의 현실이 원하는 방법론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결국에는 자본주의 내부(혹은 핵심)에서 자본주의적 현실이 자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예컨대 TV(라는 과잉실재)를 보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TV에 저항하기 위해서는,TV를 아예 보지 않거나 가끔씩 보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전략보다는 차라리 TV를 지속적으로 쉴 새 없이 봄으로써(지속적으로 TV를 보면 TV를 보는 시간 이외의 시간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므로) 노동의 질서와 생산의 질서가 내적으로 파멸하도록 만드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파의 전략은 허무의 전략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허무의 전략까지 왜 이론화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1세대로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영 S · 논술 선임연구원 furyfury13@naver.com
거의 반 세기 전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신화적 은유 형식을 통해 설파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 다음과 같다.
"사이렌(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요정으로,그녀의 노래가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들으면 유혹에 이끌려 물에 빠져 죽게 됨)의 노래를 들은 자는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다. …중략…
죽음에 대해서나 행복에 대해서나 적대적인 오디세우스는 그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가능성만이 있음을 안다.
그 중 하나의 가능성을 그는 선원들에게 지시한다.
그는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봉하고는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갈 것을 명령한다.
살아남고 싶은 자는 되돌릴 수 없는 유혹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는 들을 수 없을 때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은 건강한 몸과 집중된 마음으로 앞만을 보아야 하며 옆에 있는 것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 충동마저 그들은 긴장을 풀지 않고 새로운 여분의 노력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오디세우스는 다른 가능성을 택한다. 그는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돛대에 묶게 하고,그렇게 무력한 상태에서만 들을 수 있다.
유혹이 클수록 그는 더욱 더 강하게 묶도록 만든다." (2008학년도 서강대 수시2-2)
그들이 오래전 신화 형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인용된 다음 문장이다.
"죽음에 대해서나 행복에 대해서나 적대적인 오디세우스는 그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가능성만이 있음을 안다."
두 개의 가능성. 이 가능성들은 오디세우스의 적대적인 목표(?)인 죽음과 행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성은 적대성이 배태한,혹은 필연적으로 배태할 수밖에 없는 '수동태'적 가능태다.
이 수동적 가능태의 구체적 양상은 언급한 바와 같이 사이렌적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오디세우스의 노력으로 드러난다.
그 노력의 첫 번째 양상은 노동자들의 무조건적인 노동이다.
밀랍으로 귀를 막은 노동자들은 사이렌의 노랫소리,즉 노동 이외의 유혹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차단한 상태에서 행하는 노동 행위에 맹목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만 삶을 보전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오디세우스 자신이 감당한,사이렌의 노래에 노출되는 대신 스스로를 결박함으로써 능동성을 자가박탈하는 행위로 발현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간파해야 할 핵심은 신화적 은유가 지적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 상황이다.
죽음과 행복에 대한 오디세우스의 적대성,그 적대성을 격파해 나가고자 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과연 우리 사회의 어떤 국면들에 대한 허무주의적 일갈인지 간파하는 것이 일단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적 과제다.
결론부터 말하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고 싶었던 해당 주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신화적 은유를 통해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행복할 수도 없는 현대 자본주의적 인간의 삶의 모순성이다.
밀랍으로 귀를 막거나 스스로를 결박하는 행위는 결코 극복과 성취의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결핍일 수밖에 없는 현실적 표지들이다.
귀를 막은 채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노동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간들,스스로를 결박한 채 달콤한 노랫소리에 취해 삶의 무기력함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런 인간군상의 부조리한 국면들이 바로 오디세우스적 적대성의 은유이며,자본주의적 현실이 표상하는 원관념이다.
결국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고,죽지 않으므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인,사이렌과 마주친 인간들이다.
그렇다면 사이렌과 마주친 인간이 구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 시대의 현실태를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현대인의 본성이 황폐하게 된 것은 사회의 진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경제적 생산성의 증가는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 장치와 이를 운용하는 집단에 그렇지 못한 다수에 대해 엄청난 우월감을 갖게 해 주었다. 개인은 경제 권력 앞에서 완전히 무기력해지며,이 권력은 인간 본성에 대한 사회의 폭력을 일찍이 예견하지 못했을 정도까지 밀고 나간다.
개인은 그가 사용하는 기술 장치 앞에서 사라지지만,그 대가로 이 장치에 의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을 제공받는다.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에게 분배되는 재화의 양이 증가할수록 대중은 무기력해지고 조종될 가능성이 커진다. 물질적으로는 괄목할 만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보잘것없는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은 천박한 정신의 확산에서 잘 나타난다.
정신의 진정한 속성은 물신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정신이 문화 상품으로 고정되고 소비를 위한 목적으로 팔아넘겨질 때 정신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와 유치한 오락의 범람은 인간을 계몽하면서 동시에 바보로 만든다." (숙명여대 2007학년도 수시1)
경제적 생산성의 증가는 결국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면서 다시 사이렌 앞의 오디세우스로 인간을 전락시키고 만다.
경제적 향락,그 사이렌적 노랫소리 앞에서 인간은 결박당한 행복,조종당하는 경제적 향응을 누릴 수밖에 없다.
노랫소리는 커지고 재화의 양은 증대하지만 그에 비례해 무기력함도 역시 증대한다.
죽음과 행복을 모두 결박당한 상황. 향락과 향응 앞에서 과감하게 밀랍과 결박을 던져 버릴 엄두를 우리는 감히 내지 못한다.
그 중 어느 하나만 실천해도 우리는 자의성을 상실한 죽음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정신은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경제적 굴레에 예속되고 만다.
물신주의,그 경제적 사이렌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정신은 이미 밧줄로 결박되거나 밀랍으로 봉인된 사물(혹은 재화)에 다름 아니다.
정신이 경제적 질서 속의 사물로 재편돼 편입할 경우 당연한 결과이지만,그것은 '문화 상품으로 고정되고 소비를 위한 목적으로 팔아넘겨'진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인간적 정신이 문화 상품으로 고정돼 버리는 구체적 양상은,예컨대 저급한 대중문화로 드러난다.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반복성(혹은 재연성),정형성,표준성 등으로 규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일한 요소의 반복,형식의 정형성,반응의 표준성 등은 상품 또는 재화의 생산 과정에서 드러나는 경제적 특징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예컨대 대중음악의 경우 그것은 고전음악의 구체적 전체성(세부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의 변증법적 관계)과 대체 불가능성(부분 함몰이 곧 전체 함몰)이나 형식의 다기함,그리고 비표준화된 수용자의 반응 등과는 전혀 반대되는 특질들을 보인다.
유사한 마디의 지속적인 반복과 표절,세부성과 전체성의 비유기적 결합,어떤 것으로 대체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음악적 전체성,음악적 형식의 천편일률성,음악적 결과에 대한 대중의 표준화된 반응. 이러한 대중문화적 특질들은 물적 상품들이 표상하는 경제적 질서를 결코 어그러뜨리는 바 없이 반복성,정형성,표준성 등의 상품성을 선전하면서 소비된다.
물적 상품과 예술적(?) 상품의 등질적 질서.
문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판하고자 했던 현실태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 내지는 경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실제로 비판적 인식의 문제를 실천의 영역으로 급선회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들의 문제 인식과 비판적 일갈에도 불구하고 현실적 난제는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진 형국이다.
비판 없는 현실 자체를 비판해 보려는 공허한 비판의 움직임도 맥 빠지긴 마찬가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입시 목적으로 논술을 해야 하는 학생이든,학교 선생님이든,정치인이든,현실 상황에 대한 비판 이외에 명쾌한 실천의 방안을 내놓기는 힘들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보드리야르적 '내파'의 개념을 거론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내파(implosion)'란 말 그대로 내적으로 파열(혹은 파괴)한다는 의미다.
보드리야르에게 내파는 이른바 과잉실재,곧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복제(혹은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지배하는 현실을 돌파하는 하나의 출구전략으로 사용되고 있지만,이와 같은 의미를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해(실제로 보드리야르의 내파 개념도 광범위한 차원까지 확대된다) 현실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거론해볼 수도 있다.
사실 내파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전략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언가 대단히 정격화된 내용으로 말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내파는,저항적인 극복의 전략 대신 자본주의 현실이 원하는 방법론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결국에는 자본주의 내부(혹은 핵심)에서 자본주의적 현실이 자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전략이다.
예컨대 TV(라는 과잉실재)를 보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 TV에 저항하기 위해서는,TV를 아예 보지 않거나 가끔씩 보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전략보다는 차라리 TV를 지속적으로 쉴 새 없이 봄으로써(지속적으로 TV를 보면 TV를 보는 시간 이외의 시간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므로) 노동의 질서와 생산의 질서가 내적으로 파멸하도록 만드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파의 전략은 허무의 전략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허무의 전략까지 왜 이론화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는 것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1세대로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영 S · 논술 선임연구원 furyfury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