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코앞에 두고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민심 수습 나서

경제력 앞세워 철저한 대비… 아이티보다 피해 크게 줄여
[Global Issue] 대지진 재앙 속에 빛난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의 ‘리더십’
남미 칠레에 지난달 27일 리히터 규모 8.8의 강진이 발생했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연안의 아이티가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지 한 달 반 만에 벌어진 일이다.

지진 피해는 칠레 중부 도시들에 집중됐으며 특히 67만명이 살고 있는 제2의 도시 콘셉시온의 피해가 컸다.

콘셉시온에서는 200명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무너지고 15층짜리 건물이 붕괴됐다.

중부의 소도시 파랄과 탈카의 피해도 심각하다.

생필품 약탈자들도 크게 늘어 치안에도 비상이 걸렸다.

칠레 정부는 교통 및 통신 복구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이번 지진의 희생자가 최고 1500명까지 늘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의 신속하고 침착한 태도가 화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바첼레트 대통령은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6개 피해 도시를 돌아보며 시민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아이티 지진 후 무단 이탈한 것이나 다름없던 르네 프레발 대통령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지난 1월 강진으로 폐허가 된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외면하고 행방이 묘연했다가 지진 발생 며칠 뒤에야 이웃 도미니카공화국 비행기를 타고 나타난 프레발 대통령과 극명히 대조된다는 설명이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지진 발생 직후부터 매일 TV에 출연해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침착한 대응을 주문했다.

정부 각 부처의 재난 대응 상황을 챙기는 등 퇴임(3월10일)을 코앞에 둔 대통령이라고 믿기 힘든 자세로 재난에 대처해나갔다.

지진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마울레와 콘셉시온 지역에서 생필품 부족으로 약탈이 발생하자 대형 슈퍼마켓 체인과 협상을 통해 지진 피해자들에게 물품을 공짜로 공급하면 추후 정부가 보상하기로 협의하는 등 치안을 유지하는 기민함도 보였다.

이달 중순 취임 예정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 당선자도 지진이 나면서 사실상 대통령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바첼레트 대통령과 함께 강진 피해 복구 및 피해지역 재건을 위해 가능한 모든 지원을 실시할 것"이라면서 올해 예산의 2%를 강진에 따른 피해 복구와 재건 활동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세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인 바첼레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여론조사에서 70%에 달하는 지지율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는 2002년부터 2년간 칠레 첫 여성 국방장관직을 맡았을 때도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수도 산티아고에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을 때 직접 장갑차를 타고 구호작업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이번 칠레 지진은 지난 1월12일 발생했던 아이티 지진과 여러 면에서 크게 대비됐다.

특히 지진의 강도가 아이티의 약 800~1000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 지진의 희생자 수가 30만명에 이른 데 비해 칠레는 1500여명으로 추정돼 상대적으로 피해 규모가 작았다는 데 가장 크게 주목되고 있다.

우선 전문가들은 "칠레는 운이 좋았다"고 지적한다.

아이티의 경우 인구가 밀집된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강타했다. 진앙은 도심에서 불과 16㎞ 떨어져 있었고,지표면에서 10㎞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칠레 지진은 수도 산티아고에서 325㎞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진앙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 콘셉시온도 115㎞ 떨어져 있다.

진앙이 지하 34㎞로 아이티에서보다 깊이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지질도 칠레가 아이티보다 더 단단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칠레가 지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주도의 철저한 지진 대비 훈련 및 재해 방지 대책에 있었다.

칠레는 '불의 고리'라 불리는 환태평양 지진대 한가운데 있어 지진이 매우 잦다.

칠레는 진동을 느끼기 어려운 규모 3.0 이하의 무감(無感)지진을 포함해 연 200만번의 지진이 일어나며, 1960년엔 기록상 세계 최고치인 규모 9.5의 지진도 겪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평소 지진 대비 훈련을 철저히 받고, 건물의 내진설계 법규도 다른 나라보다 훨씬 엄격하다.

칠레 건물들은 지진이 일어날 경우 버티다가 무너지기보다는 진동에 따라 휘어지도록 설계돼 있다.

영국 BBC는 "지진 발생 후 여진이 11차례에 달하고 이 가운데 규모 6.0 이상이 다섯차례가 넘었는데도 집들이 팬케이크처럼 무너져내리지 않은 것은 칠레 방재건축의 승리"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비영리기구 지오해저드의 브라이언 터커는 "건축 법규가 엄격할 뿐 아니라 인구 대비 지진 전문가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이 칠레"라고 말했다.

이에 반면 아이티엔 내진 설계를 갖춘 건물이 단 세 채뿐이었다.

칠레가 남미 유일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로서 남미 최고의 경제력을 인정받는다는 점도 아이티와는 큰 차이점이었다.

아울러 공직사회의 청렴도 또한 아이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에서 칠레는 프랑스와 미국,벨기에에 이어 22위다. 하지만 아이티는 168위로 꼴찌 수준에 머물렀다.

남미 국가들은 칠레 지원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자신과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 부통령의 월급 절반을 지진 성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는 '칠레와 아이티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구호 아래 '칠레와 아이티 연대'라는 창구를 개설,6일까지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볼리비아 정부 장 · 차관들도 월급 30%를 성금으로 내게 된다"며 "전 국민과 기업,사회단체도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도 칠레 지원에 적극적이다.

아르헨티나 군은 지난 1일 외과 의료진과 의료장비,발전기,정수장비 3개 등을 실은 공군기를 칠레에 파견한 데 이어 2일에도 비행기 5대 분량의 구호물자를 칠레에 보냈다.

또 1일 칠레를 방문했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도 구호물자를 긴급 지원했다.

브라질은 또 군 의료진을 칠레에 파견,야전병원을 설치해 부상자 치료작업 등을 도울 계획이다.

페루 역시 의료진을 파견하는 한편 텐트와 담요 등 구호물자 15t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미아 한국경제신문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