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게으름뱅이 데카르트

[실전 고전읽기] 55. 데카르트「방법서설」「성찰」
그는 자신의 딸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 좋아하던 소녀의 이름- 그 소녀는 사시(斜視)였기 때문에,그는 평생동안 사시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고 살았다- 을 붙여주었다.

프랑신느(francine)라는 이름의 딸은 지극한 정성을 받으며 컸다.

비록 결혼을 한 부부사이에서 낳은 딸은 아니었지만 평생 처음 얻은 자식이었기에 애정이 남달랐다.

하지만 프랑신느는 아쉽게도 다섯살이 되던 해,1640년 9월 7일에 성홍열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서럽게 울었다고 전해진다.

한편,어린 시절 몸이 몹시 약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아침 늦잠을 허용받았고,이것이 습관이 되어 평생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잤다고 알려져 있다.

본인말로는 몸상태를 고려하여 1년중 아주 적은 시간만을 이성적인 활동에 투자하고,나머지를 오로지 휴식을 취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적은 시간을 투자하여 몇 권의 책을 썼는데,그것들이 훗날 조금은(?) 유명해졌다고 한다.

책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서설> <제1철학에 관한 성찰 : 하느님의 현존 및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실재적 구별을 논증함> <정념론> <철학의 원리>.

이미 눈치챈 독자도 있겠지만,그는 르네 데카르트이다.

평범한 수준의 고등학생이라면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 소개된,무려 10줄(!)에 이르는 그의 이론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가!

그는 한국에서 논술시험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요긴하게 인용된 학자 중 한 명임이 분명하다.

⊙ 왜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나?

이 코너에 소개되는 무거운 이름들의 고전들이 대개 안정적인 두께를 자랑하는 책들로서 실제로 읽기에 부담이 큰 반면,<방법서설>과 <성찰>은 각각 6부로 이루어진 논문형태의 짧은 글이라서 읽기에 한결 부담이 없다.

물론 낯선 철학단어나 의학용어들이 속독을 방해하지만,<방법서설>의 경우 1인칭의 시점에서 마치 소설처럼 쓰여졌기 때문에 읽기에 큰 부담이 없다.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코기토 명제(cogito ergo sum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도 방법서설 4부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이미 윤리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다시피,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이자 근대 합리론의 상징으로 손꼽히고 있다.

소위 <하느님의 시대 끝,인간의 시대 시작>의 신호를 쏘아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실제로 방법서설이나 성찰을 읽어보면,온통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되어있는 것을 넘어,성찰의 경우 머리글을 아예 ‘가장 현명하고 가장 고명하고 신성한 파리 신학부의 학부장 및 박사님들께’라고 적고 있다.

갈릴레이가 이단재판을 받던 당시의 엄혹한 상황임을 감안했을 때,또한 태어나 자라난 주변환경의 시공간적 조건이 오로지 종교적 도그마로 완성된 세계에서 살았다는 것을 고려해보았을 때,충분히 수긍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서 중세철학의 문을 닫을 수 있었던 것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몰고 몰아간 진리의 결정판인 코기토 명제의 주인공이 인간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감각들이 인간의 올바른 인식을 제 아무리 방해한다고 하더라도,결국 ‘내’가 생각한다는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확고부동한 제1의 원리가 도출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수학이나 기하학과 같은 엄밀하고 명확한 철학을 기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듯,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기획을 시도한 데카르트는 신의 질서속에서 자연적 질서를 부여받던 인간의 지위를,사유를 바탕으로 한 진리의 확신자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완전무결한 이성을 소유한 하느님과,그 하느님의 대리자인 성직자들만이 휘두르던 이성의 빛이 드디어 일반인(?)에게도 쥐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 이후로 주변 세계를 탐구하며,바라보기만 하던 인간을 드디어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변신시킨 것이었다.

‘바라본다’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것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인식론적 전환(Epistemic Turn)이다.

⊙ 왜 다시 데카르트인가?

하지만,이를 지나다보면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의 빛은 ‘인간에게만’ 부여된 빛으로 바뀐다.

이미 육체의 불완전한 감각을 불신했듯,육체의 물리적·기계적인 운동에 대한 불신은 육체를 소유한 존재들에 대한 우열식으로 바뀌게 된다.

즉,빛나는 이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 그렇지 못한 존재들과 극명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하느님이라는 직공이 직접 만든 인간이야말로 비슷하게나마 이성(영혼)을 소유했지만,그 외의 동물들은 그저 자동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기계론적 사고방식은 21세기의 다원화된 사고방식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몸짱’이라는 단어를 떠나서 생각하더라도,이미 현대인들은 육체적 조건들이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얼마만큼 중요한 지를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과학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영혼의 지위는 점점 육체의 지위에 의해 밀려나고 있으며,피터 싱어의 <동물해방>(1975)을 기점으로 하여 데카르트가 단순히 자극에만 반응한다는 동물들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

여기에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휴머노이드와 같은 개념들이 생겨나면서 데카르트는 더욱 더 궁지에 몰리고 있다.

중세의 시대를 넘어 인간의 시대를 견인해 냈지만,다시 이분법의 시대가 끝나면서 그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조류 속에서 논술 문제들은 데카르트가 처한 지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데카르트는 최근의 문제에서 이 쪽 편이 아닌 ‘저 쪽 편’에 서있곤 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현대 철학을 위해 몸소 굳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이다.

☞ 관련 기출 제시문 보기

2010학년도 한국외대 수시2차 기출문제 중에서 <성찰>

나는 꿈속에서 많은 것을 감각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나중에 실제로 감각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유(思惟)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만이 나와 분리될 수 없다.

나는 분명 있다,나는 존재한다.그러나 얼마 동안?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나는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res cogitans)이다.즉 정신,영혼 또는 이성일 따름이다.

그리고 사유하는 것만이 내 본성 혹은 본질에 속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내 본질이 오직 사유하는 것임을 정당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나와 결합되어 있는 신체를 갖고 있을지라도,한편으로 내가 오직 사유하는 것이고 연장(延長)된 것이 아닌 한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고 있고,다른 한편으로 물체가 오직 연장된 것이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 한에서 물체에 대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나는 내 신체와는 다르고,신체 없이 현존할 수 있다고 단언하게 되는 것이다.

☞ 2006학년도 한양대 정시기출문제 / 2009년 서강대 모의논술 중에서 <방법서설>

지금까지 나는 만약에 원숭이 또는 이성이 없는 다른 동물의 모양과 기관을 가진 기계가 있다면,이 기계가 동물이 아니라고 말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가능한 한 우리의 행동을 모방하는 기계가 있다면,이런 기계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확실한 방법이 있다.

첫째,기계는 우리가 하듯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기 위해 말이나 신호를 사용할 수 없다.

물론 말하는 기계를 만들 수도 있고,기계에 가해진 물리적 행위에 적절한 말로 대응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기계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고,다쳤다고 울거나 그 비슷한 일을 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계도 인간처럼 상황에 맞게 말을 바꾸지는 못한다.

둘째,비록 그 기계가 인간만큼,또는 더 잘,많은 일을 할 수 있어도,기계는 인간처럼 이성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내부 장치의 배치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모든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도구인 반면에,기계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일에 따라 특정한 배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이,기계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처할 만큼 많은 장치를 가지고 작동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용준 S·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