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다리 짚지 말고 써달라는 내용을 써야”

⊙ 주제 설명과 출제의도

범죄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는 철학의 오래된 논쟁 주제이자 항존하는 정책적 고민거리이다.

범죄의 원인을 진단하고 범죄인을 평가하는 데에는 다양한 접근방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범죄 책임'의 문제를 둘러싸고는 무수한 격론이 오갔다.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그 책임 소재를 어떻게 파악해야 옳은가,범죄인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을 어떠한 식으로 물어야 하는가를 두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어 왔는데,각각의 논자들마다 세세한 차이는 있지만 크게 양 갈래로 논의를 묶으면 비결정론(非決定論)과 결정론(決定論)의 두 입장으로 나눌 수가 있다.

비결정론(非決定論)은 인간에게는 의지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인간이 어떠한 행위를 이행하였을 때 그 행위를 하기로 계획 ·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당사자에게 엄격한 행위 책임을 묻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행위를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특정 행위란 행위 주체의 순수한 의지적 선택이 아니라,비록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범위까지는 필연적으로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게끔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러한 경향성(傾向性)은 행위자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변의 환경적 요인일 수도 있다.

이러한 기본 관점을 범죄에 그대로 적용하면 '범죄 책임'에 대한 양대산맥이 이해가 될 것이다.

비결정론자들은 범죄가 발생한 경우,이는 범죄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자발적 선택이라고 파악한다.

하지만 결정론자들은 범죄가 범죄인의 순수의지에 의한 선택적 행위가 아니라,오히려 범죄인이 제어할 수 없는 요인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비결정론자들은 범죄인에게 발생범죄에 대한 엄격한 책임을 묻지만,결정론자들은 범죄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고 가혹한 일이라 생각하여 주변의 여건이나 요인을 고려하고자 한다.

현재 주어진 제시문 [가]는 이와같은 형사정책적 담론을 전개하기 위해 논의의 전반적인 체계를 잡는 글이다.

[가]는 자유와 책임의 상관성을 설명하면서,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자유 여부를 우선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는 '근본적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각각 나누어서,만약 근본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행위주체에게 엄격한 책임귀속이 있지만,그렇지 않다면 우리 삶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환경들'이라고 말하며 행위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타당하지 못함을 상술한다.

제시문 [가]에서 명확히 설명된 '자유'와 '책임'의 관계를 논리적 틀로 삼아서 다른 제시문들을 차근차근히 독해하면,범죄의 해석과 처벌에 관한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대립이 더욱 명쾌하게 두드러진다.

제시문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강조하는 칸트의 글로,비결정론적 입장에서 범죄를 이해한다.

"도덕적 행동은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 없이 그 자체만으로 선한 선의지의 지배를 받는다" 라든가,"인간에게는 도덕 법칙에 따라서 행위할 수 있는 자율의지가 있다"는 표현을 통해 칸트가 인간의 자율성과 의지를 주축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 범죄는 수많은 대안 가운데 범죄라는 선택을 자발적,의지적으로 고른 것이므로 범죄인은 엄정한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설령 사회가 붕괴되더라도 "감옥에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의 살인자만은 미리 처형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을 펼친 것이다.

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칸트에게 형벌은 범죄에 대한 '응징'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는 반대로 제시문 [다]는 결정론의 입장에서 범죄가 발생한 경우 여러 환경적 요인 및 행위자를 둘러싼 주변의 영향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범죄 발생의 책임을 범죄인에게만 전적으로 묻기는 곤란하며,범죄가 일어난 데에는 사회의 책임 역시 일정 부분 존재한다는 논리이다.

"사회정의가 실종된 데에도 범죄발생의 책임의 일단이 있는 것"이라든가,"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다"는 [나]의 문장을 통해 이러한 입장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제시문 [다]는 사회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는 갈등과 불안의 심화로 자살과 범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다른 국가의 범죄 통계를 인용하면서 결정론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제시문 [나]는 주장이 명확한 글이므로 논지 파악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며,기고문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수험생의 이해를 돕고자,'사회정책은 최선의 형사정책'이라는 리스트의 발언을 추가하였기 때문에 [나]의 주장은 한층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제시문 [라]는 개념적 설명을 시도하거나,특정한 논지를 전개하는 글은 아니다.

다만 현재 시행되고 있는 개방형 교도소를 보여주고 있다.

[라]에 설명된 개방형 교도소는 재소자의 사회복귀와 적응을 돕는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도 평가되지만,잘못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지나치게 유화적인 시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일고 있다.

사실 죄인을 가둔다는 '감옥(監獄)'이라는 용어 대신,'교도소(矯導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수형자의 교정교화(矯正敎化)를 목표를 한다는 행형이념(行刑理念)을 표방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제시문 [마]는 형사정책학의 태두 체사레 베카리아의 글로서,범죄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범죄인에 대한 온정적 접근만을 호소한다고 분석해서는 [마]의 독해과정에서 단편적 정보만을 일부 습득한 것이다.

형사정책에 관한 베카리아의 주된 특색은 '예방주의'에 있다.

아무리 엄중한 처벌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후 처벌이 "시계를 되돌려 이미 저질러진 행위를 이전의 원상태로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말한다.

베카리아가 생각하는 형벌의 목적은 범죄인이 재차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억제하고,또한 아직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향후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사회 구성원들,즉 잠재적인 범죄자들에게 기완(旣完)의 범죄를 처벌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저 보복이나 응징이 아니라 사회정책적 관점에서 범죄예방을 꾀하기 위함이다.

⊙ 논제 분석

논술은 기본적으로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문장이 유려하고 표현이 세련되었다거나,관련 배경지식을 풍부하게 나열하는 것으로 논술의 고득점을 보장할 수는 없다.

물론 자연스러운 문장을 통한 정확한 의미전달,관련 지식의 이해 및 적합한 활용도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논술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충족되고 나서 차후에 살필 조건들이다.

무엇보다도 논술답안의 우선적 평가기준은 '논제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관한 답안을 작성하였는가'이다.

즉,'헛다리를 짚으면 안 된다',내지는 '써달라는 내용을 쓰라'는 것이다.

이는 아주 단순한 원칙임에도 많은 학생들이 논제의 초점에서 벗어난 엉뚱한 답안을 작성하곤 한다.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출제자의 까다로운 '질문'에 대한 글쓴이의 논리적 '답변'이 논술이기 때문에,질문과 무관한 엉뚱한 답안인 이상 아무리 희대의 명문이 등장하거나 깜짝 놀랄 만큼 심오한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의사소통의 기초가 안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제자가 요구한 바를 답안에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논제 분석을 통해 각 문항의 요구조건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무엇을 묻는지를 알아야 그에 대한 답을 쓸 수 있기 때문에 논제의 요구조건을 간과하면 안 된다.

또한 요구조건마다 일정 점수가 배점되어 있으므로,조건을 충실히 반영하지 못한 답안은 일정 수준 이상의 득점을 하기가 힘들다.


(논제 1) 제시문 [가]의 논의를 참고로,제시문 [나]와 [다]는 각각 어떻게 '범죄 책임'을 파악하고 있는지 정리하시오.

☞ 출제의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제시문 [나]와 [다]가 각각 상정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 전모와 그에 따른 범죄 책임을 비결정론과 결정론의 입장에서 정리한다.

(논제 2) 제시문 [나]와 제시문 [다]의 두 입장 중 하나의 관점을 선택하여,제시문 [라]에 등장하는 개방형 교도소에 대해서 평가하시오.

☞ 제시문 [나]의 입장에서 개방형 교도소는 인정할 수 없는 시설이다.

자발적으로 악한 선택을 한 범죄자에게 응징적 처벌을 해야 하는 마당에,편안하고 쾌적한 시서을 제공한다는 것은 [나]의 논리적 체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환경이나 주변 여건이 범죄의 원인이라는 제시문 [다]의 입장에서는 개방형 교도소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 입장에서는 범죄가 발생했다는 것은 곧 그 사회가 구성원의 '사회화'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범죄자를 성공적으로 '재사회화'하기 위한 개방형 교도소는 [다]의 관점에서는 환영할 시설이다.

(논제 3) 주어진 제시문들의 주장을 근거로,최근 우리사회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흉악범들을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 자신의 생각을 밝히시오.

☞ '주어진 제시문들의 주장을 근거로' 활용하여 본인의 주관을 논리적으로 밝히라는 문제이다.

현재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여러 범죄들이 언론매체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적절한 현실적 예시를 활용하여,'관찰력이 우수'한 예리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현실을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이지 않고,비판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범죄 행위자의 자유 여부 및 책임을 논하고,범죄에 대한 처벌이 '응보'에 있는지 '예방'과 '교화'에 있는지를 짚어가면서 범죄의 원인을 어떻게 파악하고,범죄를 저지를 범죄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본인의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담겨 있고,그 내용이 논리적으로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성범죄자 전자발찌(bracelet)제도,범죄자 신상공개 제도,사형제 존폐 논란,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논의되어 온 유전자정보은행 등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