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에서 오는 무질서를 다스리는 국가는 필요악”
다음 두 전략의 차이점을 맞춰보라.
'만족스러운(satisfying)' 전략과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누군가 당신이 한 일을 두고 '만족스럽다(satisfying)'고 평하는 것과 '만족할 만하다(satisficing)'고 말하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할까?
간략히 설명하자면 '만족스러운(satisfying)' 전략은 작업 결과가 기꺼워할 만큼의 흡족한 수준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인데 반해,'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은 작업 결과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면 된다는 전략이다.
그래서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은 크게 무리가 없다면 뭐 그리 나쁘지 않다는 태도라서 이 방식을 따를 경우 타협과 양보가 많이 일어난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어도 괜찮고,최악만 피한다면 좋지 않냐는 방식 때문이다.
둘 중 어느 방식을 취할지는 구체적인 정황에 맞춰 당사자들이 선택할 것이지만,현재 많은 분야에서 '만족스러운(satisfying)' 전략보다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이 활용되고 있다.
아무래도 제약이 많은 현실에서 마음에 쏙 드는 목표만 추구하기란 이래저래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러한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을 취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국가가 썩 맘에 드는 조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꽤 쓸 만하다는 논리를 펼친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 하나로 바로 눈치채리라 생각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대목을 듣는 순간 머리 속에 바로 '홉스'라는 이름이 떠오르면서 '필요악으로서의 국가'라든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수사들 역시 함께 튀어나왔을 것이다.
런던 교외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홉스(Thomas Hobbes · 1588~1679)는 이기적 동물인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한창이던 1651년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출판했고,여기서 인간의 본성에서 연유하는 어쩔 수 없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각자의 자유를 '인간적 신'인 국가에 헌납하는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래서 홉스를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과 정부 구성의 원리를 사회계약론 위에 세운 최초의 근대 정치 철학자로 평가하는 의견도 많다.
그런데 홉스가 상정하는 국가의 성격과 사회계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홉스는 인간은 타고난 경쟁심과 소심함,그리고 명예욕으로 인해 자율적으로는 평화롭게 살기 힘들다고 겁을 주면서 사회계약의 체결을 유도한다.
그가 국가론을 펼치기 위한 논리적 가설로 제시한 자연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이다.
홉스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주권을 확립해야 하며,이것은 통일된 단일한 권력만이 개인 의지의 충돌이 빚어내는 무정부 상태를 견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초적 자연상태의 아비규환보다는 아무리 불편하고 성가시더라도 평화를 가져오는 국가의 존재가 '필요악'으로서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힘이 있는 존재에게 넘겨주라는 홉스의 주장이 지나치게 전제적인 통치질서를 가능케 한다든가,절대군주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하지만 홉스가 주장하는 주권의 절대성은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홉스는 이러한 논리적 바탕을 통해 국가의 권위가 한편으로는 절대적이지만 결국에는 조건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국가의 권위는 국가 스스로의 의무를 완수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실제적 힘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정치철학이다.
덕분에 홉스는 '새로운 철학의 빛나는 땅을 개척한 위대한 콜럼버스'라는 찬사와 동시에 '최고의 무신론자이며 맘스베리의 악마'라는 비난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인간의 안전에 대한 욕망과 통치 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명쾌하게 설파한 홉스의 사회계약 사상은 이후 전개되는 정치철학의 큰 물꼬를 터 놓았으며,그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리바이어던'은 이제 사람들에게 '성서의 괴물'보다는 '국가통치론'으로 더 각인되어 있다.
☞ 기출 제시문 (고려대학교 1998학년도 정시 논술,서강대학교 2004학년도 논술모의고사,경희대학교 2007학년도 정시 논술,부산대학교 2007학년도 논술모의고사)
인간의 본성에는 싸움을 불러일으키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경쟁심이고,두 번째는 소심함이며,세 번째는 명예욕이다.
경쟁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득을 보기 위해,소심함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명예욕은 좋은 평판을 듣기 위해 남을 해치도록 유도한다.
경쟁심은 타인과 그 처,자식과 가축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소심함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명예욕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가족 · 동료 · 민족 · 직업 또는 이름에 간접적으로 먹칠을 하는 말,비웃음,상이한 견해뿐만 아니라 경멸의 몸짓 등과 같은 하찮은 일에도 인간으로 하여금 폭력을 사용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강력한 국가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갈 때 인간은 '전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놓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전쟁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노동의 결실을 누릴 수 없는 불확실성이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노동할 이유가 없다.
그 결과 토지의 경작,항해의 필요성,해외로부터 수입되는 물건의 가치,널찍한 건물,물건을 이동시키고 옮겨 주는 운송의 수단,지구가 어떠한 모습인가에 대한 지식,시간에 대한 계산,예술이나 문학,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그 무엇보다 나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감이고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위험성이다.
전쟁상태에서 인간은 고립되고 비참하고 험악하며 단명하고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국가가 등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성적으로 자유를 사랑하는 동시에 타인을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국가의 구속 아래 살아가고 자기 자신에게 제약과 통제를 가하는 것에 동의하게 되는 궁극적 원인이나 목적 및 동기는,그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 결과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려는 인간 자신의 통찰력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위에 무서운 존재로 군림하고 그들에게 처벌에 대한 공포감을 불어넣어 옭아매는 가시적 권력이 없을 때,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열망에 의하여 빚어질 수밖에 없는 처참한 전쟁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인간 자신이 국가에 의한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으로 하여금 그들 모두의 권력과 힘을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양도하고 그들 모두의 의지를 다수결에 따라 그 사람이나 그 집단의 의지로 축소 · 대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인간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을 지명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를 송두리째 양도하고,만인의 공동 평화와 안전에 관련되는 사안에서 그 사람이나 그 집단이 취하거나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 바로 개개인 자신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만인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전쟁 상태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결국 만인은 그들 자신을 그의 의지에 복종시키고 그의 판단에 맡기는 셈이다.
이러한 행위는,만인에 대한 만인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단일한 권력체인 국가 내로 만인을 끌어넣는 것으로,만인의 진정한 통일을 의미한다.
마치 만인이 만인에게,"당신이 그 권력체에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모든 행동과 조치를 승인한다는 조건하에 나 역시 내 자신에 대한 나의 지배권을 그 권력체에 포기하고 그 행동과 조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식의 선언을 동시에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보다 경건한 자세에서 말한다면) 인간적 신(神)인 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인은 불멸하는 유일신과 가호 아래 자신들의 평화와 보호를 인간적 신인 국가에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손에 무한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욕망과 격정에 이리저리 시달릴 신민(神民)의 상태는 대단히 비참할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어떠한 형태로든 불편함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상황이라는 점,국가 형태가 무엇이든간에 그 안에서 인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해악은 내전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비참함과 가공할 재난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점,그리고 약탈과 복수를 못하도록 만인의 손을 묶어두는 법과 강제력에서 벗어날 때,그 상전 없는 인간이 처하게 되는 상태란 혼란뿐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
다음 두 전략의 차이점을 맞춰보라.
'만족스러운(satisfying)' 전략과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누군가 당신이 한 일을 두고 '만족스럽다(satisfying)'고 평하는 것과 '만족할 만하다(satisficing)'고 말하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존재할까?
간략히 설명하자면 '만족스러운(satisfying)' 전략은 작업 결과가 기꺼워할 만큼의 흡족한 수준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인데 반해,'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은 작업 결과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면 된다는 전략이다.
그래서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은 크게 무리가 없다면 뭐 그리 나쁘지 않다는 태도라서 이 방식을 따를 경우 타협과 양보가 많이 일어난다.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어도 괜찮고,최악만 피한다면 좋지 않냐는 방식 때문이다.
둘 중 어느 방식을 취할지는 구체적인 정황에 맞춰 당사자들이 선택할 것이지만,현재 많은 분야에서 '만족스러운(satisfying)' 전략보다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이 활용되고 있다.
아무래도 제약이 많은 현실에서 마음에 쏙 드는 목표만 추구하기란 이래저래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러한 '만족하는(satisficing)' 전략을 취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국가가 썩 맘에 드는 조직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꽤 쓸 만하다는 논리를 펼친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 하나로 바로 눈치채리라 생각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대목을 듣는 순간 머리 속에 바로 '홉스'라는 이름이 떠오르면서 '필요악으로서의 국가'라든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수사들 역시 함께 튀어나왔을 것이다.
런던 교외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홉스(Thomas Hobbes · 1588~1679)는 이기적 동물인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한창이던 1651년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출판했고,여기서 인간의 본성에서 연유하는 어쩔 수 없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각자의 자유를 '인간적 신'인 국가에 헌납하는 사회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래서 홉스를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과 정부 구성의 원리를 사회계약론 위에 세운 최초의 근대 정치 철학자로 평가하는 의견도 많다.
그런데 홉스가 상정하는 국가의 성격과 사회계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홉스는 인간은 타고난 경쟁심과 소심함,그리고 명예욕으로 인해 자율적으로는 평화롭게 살기 힘들다고 겁을 주면서 사회계약의 체결을 유도한다.
그가 국가론을 펼치기 위한 논리적 가설로 제시한 자연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이다.
홉스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주권을 확립해야 하며,이것은 통일된 단일한 권력만이 개인 의지의 충돌이 빚어내는 무정부 상태를 견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원초적 자연상태의 아비규환보다는 아무리 불편하고 성가시더라도 평화를 가져오는 국가의 존재가 '필요악'으로서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힘이 있는 존재에게 넘겨주라는 홉스의 주장이 지나치게 전제적인 통치질서를 가능케 한다든가,절대군주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하지만 홉스가 주장하는 주권의 절대성은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홉스는 이러한 논리적 바탕을 통해 국가의 권위가 한편으로는 절대적이지만 결국에는 조건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국가의 권위는 국가 스스로의 의무를 완수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실제적 힘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정치철학이다.
덕분에 홉스는 '새로운 철학의 빛나는 땅을 개척한 위대한 콜럼버스'라는 찬사와 동시에 '최고의 무신론자이며 맘스베리의 악마'라는 비난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인간의 안전에 대한 욕망과 통치 권력의 정당성 문제를 명쾌하게 설파한 홉스의 사회계약 사상은 이후 전개되는 정치철학의 큰 물꼬를 터 놓았으며,그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리바이어던'은 이제 사람들에게 '성서의 괴물'보다는 '국가통치론'으로 더 각인되어 있다.
☞ 기출 제시문 (고려대학교 1998학년도 정시 논술,서강대학교 2004학년도 논술모의고사,경희대학교 2007학년도 정시 논술,부산대학교 2007학년도 논술모의고사)
인간의 본성에는 싸움을 불러일으키는 세 가지의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경쟁심이고,두 번째는 소심함이며,세 번째는 명예욕이다.
경쟁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득을 보기 위해,소심함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명예욕은 좋은 평판을 듣기 위해 남을 해치도록 유도한다.
경쟁심은 타인과 그 처,자식과 가축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소심함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해,명예욕은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가족 · 동료 · 민족 · 직업 또는 이름에 간접적으로 먹칠을 하는 말,비웃음,상이한 견해뿐만 아니라 경멸의 몸짓 등과 같은 하찮은 일에도 인간으로 하여금 폭력을 사용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강력한 국가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갈 때 인간은 '전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놓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전쟁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노동의 결실을 누릴 수 없는 불확실성이 삶을 지배하기 때문에 노동할 이유가 없다.
그 결과 토지의 경작,항해의 필요성,해외로부터 수입되는 물건의 가치,널찍한 건물,물건을 이동시키고 옮겨 주는 운송의 수단,지구가 어떠한 모습인가에 대한 지식,시간에 대한 계산,예술이나 문학,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그 무엇보다 나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공포감이고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위험성이다.
전쟁상태에서 인간은 고립되고 비참하고 험악하며 단명하고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국가가 등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성적으로 자유를 사랑하는 동시에 타인을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국가의 구속 아래 살아가고 자기 자신에게 제약과 통제를 가하는 것에 동의하게 되는 궁극적 원인이나 목적 및 동기는,그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 결과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려는 인간 자신의 통찰력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위에 무서운 존재로 군림하고 그들에게 처벌에 대한 공포감을 불어넣어 옭아매는 가시적 권력이 없을 때,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열망에 의하여 빚어질 수밖에 없는 처참한 전쟁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인간 자신이 국가에 의한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만인으로 하여금 그들 모두의 권력과 힘을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양도하고 그들 모두의 의지를 다수결에 따라 그 사람이나 그 집단의 의지로 축소 · 대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인간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을 지명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를 송두리째 양도하고,만인의 공동 평화와 안전에 관련되는 사안에서 그 사람이나 그 집단이 취하거나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 바로 개개인 자신의 행동이라는 사실을 만인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전쟁 상태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결국 만인은 그들 자신을 그의 의지에 복종시키고 그의 판단에 맡기는 셈이다.
이러한 행위는,만인에 대한 만인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단일한 권력체인 국가 내로 만인을 끌어넣는 것으로,만인의 진정한 통일을 의미한다.
마치 만인이 만인에게,"당신이 그 권력체에 당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모든 행동과 조치를 승인한다는 조건하에 나 역시 내 자신에 대한 나의 지배권을 그 권력체에 포기하고 그 행동과 조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식의 선언을 동시에 하는 것과 같다.
이는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보다 경건한 자세에서 말한다면) 인간적 신(神)인 국가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인은 불멸하는 유일신과 가호 아래 자신들의 평화와 보호를 인간적 신인 국가에 의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손에 무한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욕망과 격정에 이리저리 시달릴 신민(神民)의 상태는 대단히 비참할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어떠한 형태로든 불편함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상황이라는 점,국가 형태가 무엇이든간에 그 안에서 인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해악은 내전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비참함과 가공할 재난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점,그리고 약탈과 복수를 못하도록 만인의 손을 묶어두는 법과 강제력에서 벗어날 때,그 상전 없는 인간이 처하게 되는 상태란 혼란뿐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