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부터 '나의 대통령'인 부시 당선자와 함께 이번 선거로 인한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부시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신의 가호를…."
2000년 12월13일 미국 제4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앨 고어는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한 시간 뒤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조지 W 부시 당선자 측에선 "고어에게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앞으로 정치권과 미국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두 후보 간 '고부갈등'이 한방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우리 언론들도 '고부갈등 접고 부시호(號) 출범' 식으로 이를 전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고부갈등'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부갈등은 아니었다.
우리 언어체계에서 '고부갈등'이라고 하면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 위치와 견해,이해 차이 등으로 인해 생기는 충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우리 언론은 미국에서 일어난 '고부갈등'을 '고어와 부시 간의 갈등'을 줄인 말로 썼다.
개표 과정과 결과의 신뢰성을 두고 두 후보 간에 법원 판결까지 가는 반목이 일어나자 말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우리 신문들이 이를 '고부갈등'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예전부터 써오던 '고부(姑婦) 갈등'에 빗대 '고어와 부시 간의 갈등'에서 머리글자만 따서 새로 만든 말이다.
물론 우리 언론은 이미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고어와 부시의 대결'이란 의미에서 '고부대결'이란 말을 만들어 써왔다.
수사학적으로는 절묘한 동음이의어 수법인데,글쓰기에서도 이런 수사학적 표현은 글에 '긴장감'을 가져와 설득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고부갈등'이나 '고부대결' 같은 말 비틀기는 넓게 보면,우리말에서 점차 늘고 있는 약어(略語)를 만드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 생긴 말이 우리말 속에서 정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기는 어렵다.
그 효과가 언론의 의도적이고 일시적인 '눈길 끌기'에 그칠 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사용에 의해 언중의 선택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허용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사적 기법에 의한,저널리즘 언어의 특수성이 반영된 표현이란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글쓰기나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런 식의 일탈적 말 만들기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매스미디어가 다양한 형태의 말이 생성 소멸하는 언어의 시장이자 실험실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유의 약어 사용이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약어가 갖는 특유의 '힘' 때문에 매스미디어 언어에서 약어가 점차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09년 4월 초 영국 런던에서 중국과 미국의 정상이 만났을 때 국내 언론에 소개된 '후오회(胡奧會)'도 그 중 하나이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열린 G20회의에서 중국 국가 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奧巴馬 : 오바마의 중국식 표기)가 따로 만났는데,두 사람의 만남을 중국 신문들은 '후오회'란 신조어로 전했다.
후진타오야 성이 '후'이니 이상할 것 없지만 오바마를 가리켜 '오'로 칭하는 것은 마치 클린턴 전 대통령을 '클'씨로,그의 부인 힐러리를 '힐'씨로 부르는 것만큼 어색한 표현이다.
우리가 지난 4월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간 회담을 '이오회'라 불렀다면 매우 낯설어했을 것이다.
우리말의 진화 과정을 보면 오바마를 오씨로,클린턴을 클씨 식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온도 단위인 섭씨,화씨는 우리말 속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 지금은 그 말의 정체도 모를 정도로 익숙한 단어가 됐다.
'섭씨'와 '화씨'는 각각 고안자인 스웨덴과 독일의 셀시우스,파렌하이트의 중국 음역어인 '섭이사(攝爾思)'와 '화륜해(華倫海)'에서 온 말이다.
각각 첫 글자 '섭'과 '화'를 성(姓)처럼 떼어내 '씨(氏)'를 붙여 만든 것이 섭씨와 화씨이다.
본래는 고안자의 이름을 단위로 해 '셀시우스 온도''파렌하이트 온도'라 적어야 하지만 섭씨,화씨란 말이 이미 역사적으로 굳어져 새삼스레 바꿀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 같은 외래어 표기법이 없던,그래서 외래 인명이나 지명을 주로 한자로 차음해 적던 시절에서 넘어 온 잔재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상회담을 '이-팔 정상회담' 식으로 줄여 적는 것도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비정상적 말 비틀기일 뿐이다.
요즘은 현지음에 가깝게 한글로 적는 방식이 외래어 표기의 규범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므로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는 그대로 따르면 된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
2000년 12월13일 미국 제4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앨 고어는 깨끗하게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한 시간 뒤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조지 W 부시 당선자 측에선 "고어에게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앞으로 정치권과 미국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두 후보 간 '고부갈등'이 한방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우리 언론들도 '고부갈등 접고 부시호(號) 출범' 식으로 이를 전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벌어진 '고부갈등'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고부갈등은 아니었다.
우리 언어체계에서 '고부갈등'이라고 하면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 위치와 견해,이해 차이 등으로 인해 생기는 충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우리 언론은 미국에서 일어난 '고부갈등'을 '고어와 부시 간의 갈등'을 줄인 말로 썼다.
개표 과정과 결과의 신뢰성을 두고 두 후보 간에 법원 판결까지 가는 반목이 일어나자 말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우리 신문들이 이를 '고부갈등'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다.
예전부터 써오던 '고부(姑婦) 갈등'에 빗대 '고어와 부시 간의 갈등'에서 머리글자만 따서 새로 만든 말이다.
물론 우리 언론은 이미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고어와 부시의 대결'이란 의미에서 '고부대결'이란 말을 만들어 써왔다.
수사학적으로는 절묘한 동음이의어 수법인데,글쓰기에서도 이런 수사학적 표현은 글에 '긴장감'을 가져와 설득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고부갈등'이나 '고부대결' 같은 말 비틀기는 넓게 보면,우리말에서 점차 늘고 있는 약어(略語)를 만드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 생긴 말이 우리말 속에서 정상적인 단어로 자리 잡기는 어렵다.
그 효과가 언론의 의도적이고 일시적인 '눈길 끌기'에 그칠 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사용에 의해 언중의 선택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허용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사적 기법에 의한,저널리즘 언어의 특수성이 반영된 표현이란 데 있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글쓰기나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런 식의 일탈적 말 만들기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매스미디어가 다양한 형태의 말이 생성 소멸하는 언어의 시장이자 실험실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유의 약어 사용이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약어가 갖는 특유의 '힘' 때문에 매스미디어 언어에서 약어가 점차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09년 4월 초 영국 런던에서 중국과 미국의 정상이 만났을 때 국내 언론에 소개된 '후오회(胡奧會)'도 그 중 하나이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열린 G20회의에서 중국 국가 주석인 후진타오(胡錦濤)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奧巴馬 : 오바마의 중국식 표기)가 따로 만났는데,두 사람의 만남을 중국 신문들은 '후오회'란 신조어로 전했다.
후진타오야 성이 '후'이니 이상할 것 없지만 오바마를 가리켜 '오'로 칭하는 것은 마치 클린턴 전 대통령을 '클'씨로,그의 부인 힐러리를 '힐'씨로 부르는 것만큼 어색한 표현이다.
우리가 지난 4월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간 회담을 '이오회'라 불렀다면 매우 낯설어했을 것이다.
우리말의 진화 과정을 보면 오바마를 오씨로,클린턴을 클씨 식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온도 단위인 섭씨,화씨는 우리말 속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 지금은 그 말의 정체도 모를 정도로 익숙한 단어가 됐다.
'섭씨'와 '화씨'는 각각 고안자인 스웨덴과 독일의 셀시우스,파렌하이트의 중국 음역어인 '섭이사(攝爾思)'와 '화륜해(華倫海)'에서 온 말이다.
각각 첫 글자 '섭'과 '화'를 성(姓)처럼 떼어내 '씨(氏)'를 붙여 만든 것이 섭씨와 화씨이다.
본래는 고안자의 이름을 단위로 해 '셀시우스 온도''파렌하이트 온도'라 적어야 하지만 섭씨,화씨란 말이 이미 역사적으로 굳어져 새삼스레 바꿀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 같은 외래어 표기법이 없던,그래서 외래 인명이나 지명을 주로 한자로 차음해 적던 시절에서 넘어 온 잔재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상회담을 '이-팔 정상회담' 식으로 줄여 적는 것도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비정상적 말 비틀기일 뿐이다.
요즘은 현지음에 가깝게 한글로 적는 방식이 외래어 표기의 규범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므로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는 그대로 따르면 된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