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는 유전자를 운반하고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다?

[실전 고전읽기] 33. 에드워드 윌슨「사회생물학」
세대를 거듭하면서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은 던질 때마다 그 답이 알려 주는 인간의 지위는 계속해서 강등하였다.

창조주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우주의 으뜸 생명체 인간은,"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린 소심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살았던 때를 즈음해서 우주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추방된다.

자존심이 팍 상해 한동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 무리들을 화형시킨다 어쩐다 하면서 우주의 중심축을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써봤지만 결국 인간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한낱 행성 위에 발을 디디고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겨우 자존심을 추스를 무렵이 되자 이제는 비실비실하게 생긴 찰스 다윈이 병치레를 끝내고 '종의 기원'이니 뭐니 하는 책을 출판하면서 인간을 원숭이의 사촌으로 둔갑시켰다.

그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자 세상의 오롯한 주인 자리를 내놓고 지구의 변방 모퉁이로 쫓겨나갔다.

이거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벌떼 같은 비난을 빗발치면서 갈라파고스라는 이상한 섬을 구경하고 온 다윈이라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쯤 되니 뭐 이제는 더 이상 자존심 상할 일도 없겠다 싶었다.

그냥 우리 안에는 태초의 원시 해양을 누볐던 물고기가 살아 숨쉰다는 것을 속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다.

다시 또 새로운 무리가 등장했는데,이네들은 주로 '생물학'을 전공하였다면서 '생물학적 인간학'이라는 이상한 해석을 펼쳐놓았다.

이 일군의 무리가 생물학적 인간학을 창시하자 이제 인간의 모든 것은 생물학적 특징으로 '환원'되어 버렸다.

특히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팔린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1929~)의 주장에 따르자면,'인간의 행위는 유전자의 명령'이란다.

에드워드 윌슨은 원래 개미를 연구하던 생물학자라니 그냥 계속 곤충이나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코 호락호락 물러날 상대가 아니다.

개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에 머물지 않고 '통섭(統攝: Consilience)'이라는 책까지 펴내며 자연과학과 인문 · 사회과학을 연결하는 통합 학문이론을 전개하면서 지식의 통합을 부르짖는다.

결론인즉슨,인문 · 사회학에 관해서 생물학자인 자기도 엄연히 할 말이 있다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윌슨에게 인류가 향유하고 발전시켜온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의 하위 학문 내지는 파생 학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Sociobiology; The New Synthesis,1975년)'이라는 방대한 책에서 윌슨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모두 호모 사피엔스라는 영장류에 관한 사회생물학에 불과하며,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사회생물학적 방법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회생물학은 다윈의 진화생물학에 뿌리를 두고,동물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진화와 유전자의 영향력에 주목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유전자로 하여금 더 많은 복사체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형질은 성공적으로 살아 남아 현존하며 그렇지 못했던 특성들은 모두 소멸된다.

이 논리에 입각하여 윌슨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사회적 행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사회생물학을 창시하면서,인간의 특성 모두가 필연적으로 진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윌슨은 사회생물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으며,생명체의 모든 행동은 모두 그 내면에는 자신이 소유하는 유전자를 보다 많이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전략전술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체의 모든 행위는 유전자에 의해서 발현되거나 제어되는 등 유전자가 각 개체를 조절한다.

그래서 동물행동학의 근원은 유전자에 있으며,인간의 행위 역시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유전자 속에 각인된 본능적 행동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시 말해,생명의 주체는 '유전자'이며,사람들은 비록 자유의지를 가지고 결정권을 행사하지만,그 선택의 기저에는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유전자의 지향성이 관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윌슨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닭(개체)은 달걀(유전자)이 더 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해 한시적으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

우리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 개체는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이며,생물학적 측면에서 고찰한 유일한 존재 의의는 영속적인 유전자를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뿐이다.

윌슨이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책의 제목으로 삼았던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라는 신조어가 유명해지게 되자,더 이상 자존심 상할 것도 없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또 한차례 놀라움과 충격에 빠져들었다.

자,그럼 다음 기출 제시문을 함께 읽으면서 윌슨의 파격적 주장을 음미해보기로 하자.

☞ 기출 제시문(성균관대학교 2006학년도 수시 2 기출)

카뮈(A.Camus)는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유일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의도한 엄격한 뜻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결코 옳은 말은 아니다.

생리학과 진화의 문제에 관심있는 생물학자는 자의식은 뇌의 시상하부(視床下部)와 대뇌변연계(大腦邊緣系)에 있는 정서중추에 의해 제어되고 형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중추들은 우리의 의식을 미움,사랑,죄의식,공포 등의 모든 감정으로 채우고 있고 윤리철학자들은 이러한 감정에 의존하여 선악의 기준을 직관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이 시상하부와 대뇌변연계를 만들어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자아의 존재나 이 자아를 종식시키는 자살은 결코 철학의 중심과제는 아닌 것이다.

시상하부와 대뇌변연계 복합체는 자연히 이러한 논리적 환원을 부인하고,자살을 죄의식과 이타성의 감정으로 본다.

이 점에서는 진화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볼 때 개개의 생물이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 철학자 자신의 정서적 중추가 그의 유아론자(唯我論者)로서의 자각보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윈주의(Darwinism)의 의미에서 볼 때 생물은 그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생물의 주요 기능은 결코 다른 생물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유전자를 재생산하는 것이며,따라서 생물은 유전자의 임시 운반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성생식으로 만들어진 생물은 각기 특유의 존재로서 그 종을 구성하는 모든 유전자를 기초로 하여 우연하게 구성된 유전자 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자연선택 과정에서 어떤 유전자들을 그 다음 세대에 더 높은 비율로 물려줄 수 있는 어떤 장치가 생긴다면 그것이 어떤 장치이건 결국 그 종으로 하여금 어떤 특징을 갖도록 해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부류의 장치는 개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가 하면 다른 장치는 우수한 교미행동과 그 결과 생기는 자식의 보호를 촉진하기도 할 것이다.

생물의 복잡한 사회행동이 유전자들의 자기복제 기술에 첨가되면 이타성은 보다 증가되어 결국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정의상으로 개체의 적응도를 감소시킨다고 하는 이타성이 과연 어떻게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사회생물학의 중심적 이론문제가 된다.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혈연적 이유이다.

즉 이러한 이타성을 유도하는 유전자를 같은 혈통의 두 개체가 공유하고 또 그 가운데 한 개체의 이타행동이 이러한 유전자들의 그 다음 세대에 대한 공동의 공헌을 증대시킨다면 이타성의 경향은 그 유전자 풀(gene pool)에 널리 확산될 것이다.

까뮈는 그 자신에 대한 질문,즉 "부조리는 죽음을 명하는가?"에 대해서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가 이미 인간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데 충분하다고 답하고 있다.

이 무미건조한 판단은 아마 맞을지도 모르나 이 말은 진화론에 비춰 면밀히 검토되지 않는 한 어떤 의미도 거의 갖지 못할 것이다.

사람과 같이 고도로 사회성이 있는 종(種)의 시상하부-대뇌변연계의 복합체는 그에게 잠재해 있는 유전자들이 개체의 생존,번식 그리고 이타성을 능률적으로 발현시키는 행동반응들로 편성될 때에만 최대로 번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거나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마치 아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생물이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에 놓이게 되면 뇌의 이 중추복합체는 의식으로 하여금 그 생물을 상반감정의 공존상태로 몰아넣는다.

애정이 증오에 섞이고,공격성은 두려움에,확장은 후퇴에 합쳐져 이들의 혼합은 개체의 행복과 생존을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들 감정을 조절하는 유전자들의 전달을 최대한으로 돕게 된다.

홍보람 S · 논술 선임연구원 nikehbr@nons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