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비 길이 7㎝×20개비×4갑=560㎝,이것이 하루치 길이요. 560㎝×365일-2044m,이것이 또 1년치 길이요. 2044m×70년=14만3080m,즉 143㎞. "선생님,이건 서울은커녕 추풍령에도 못 미치겠는데요."

(구상 편,<시인 공초 오상순>,자유문학사)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공초 오상순의 ‘담배 아홉 갑’
1920년 창간된 <폐허>는 이듬해 2호로 단명했지만 <창조> <백조>와 더불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퇴폐주의 문예 동인지이다.

그 <폐허>를 이끈 이 중의 한 명인 공초 오상순은 각종 기행으로 당대에 숱한 일화를 남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담배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붙이기 시작한 담배를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놓지 않았다는 오상순을 앞에 두고 부산 피란 시절 어느 물리학자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계산을 했다.

평생 피우는 담배 길이가 얼마나 될지가 화제가 돼 나온 일화다.

그런데 실은 그의 하루 흡연량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그의 제자 중 한 명이 <시인 공초 오상순>에서 회고한 대로라면 그는 보통 하루에 180여 개비를 태웠다는 것이다.

20개비들이 담배 아홉 갑을 피웠으니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안 될 정도이다.

돌아가시기 전 반년 정도를 함께 기거하며 모신 제자가 직접 목격담을 풀어놓은 것이니 믿을 만한 수치인 셈이다.

하기야 오상순이 <폐허> 동인이자 당대의 주당이었던 수주 변영로와 어느 날 밤 한강에 뱃놀이를 갔는데 손에 쥔 것은 단지 술 몇 병과 담배 두 보루(20갑)였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일화다.

이들은 그렇게 술에 취하고 담배에 전 채 휘영청 밝은 달을 벗 삼아 밤새워 문학을 논했다고 한다.

오상순의 담배에 얽힌 일화를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이 얘기 속에 우리말을 쓰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오상순이 하루에 피운 담배는 '아홉 갑'이었을까 '아홉 곽'이었을까.

우리말에서 '물건을 담는 작은 상자 또는 그 단위'를 가리키는 말은 '갑'이라 한다.

그래서 '성냥곽'이라 하면 틀리고 '성냥갑'이라 해야만 맞는다.

비눗곽,담뱃곽,분필곽도 마찬가지로 모두 비눗갑,담뱃갑,분필갑이라 해야 한다.

'갑'은 한자 匣에서 온 말이니 형태를 바꿀 이유는 없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곽'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는 본래 '주로 물기 없는 물건을 넣어 두는,뚜껑을 덮게 돼 있는 작은 그릇'을 말하는 것이다.

한자어 '곽(槨)'과는 달리 한글로만 쓰는 이 '곽'은 북한 사전의 풀이로 보면 '갑'과 미세한 의미 차이를 띠면서 함께 널리 쓰이던 말로 보인다.

이는 북한에서 남한의 도시락에 해당하는 '곽밥(곽에 담은 밥)'이 널리 쓰이는 데서도 확인된다.

물론 도시락이란 말도 함께 사용한다.

북한에서는 이 밖에도 밥곽(간편하게 먹을 수 있게 만든 밥그릇),과자곽,점심곽 같은 말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북한의 문화어(남한의 표준어에 해당)에서는 '갑'과 '곽'을 모두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곽'을 버리고 '갑'만을 표준어로 인정했다.

따라서 아쉽지만 남한에서는 성냥곽이란 말은 안 되고 성냥갑만 가능할 뿐이다.

성냥갑인지 성냥곽인지 헷갈리는 사람은 '지갑'을 떠올리면 쉽게 알아둘 수 있다.

'돈이나 주민등록증 같은 증명서 따위를 넣을 수 있도록 가죽이나 헝겊 따위로 만든 자그마한 물건'을 지갑이라 하지 절대 지곽이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갑은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라 한자 의식이 흐려져서 그렇지 실은 한자 '紙匣'이다.

'갑'이 비교적 작은 물건을 담는 상자라면,비슷한 말에 함(函)이 있는데 이는 '갑'보다 사이즈가 좀 더 큰 것을 말한다.

옷이나 물건 따위를 넣을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통을 말한다.

성냥갑,비눗갑,담뱃갑,분필갑 등에 비해 사물함,패물함 식으로 구별해 말한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