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규 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경제교육연구소장>


☞ 한국경제신문 7월 7일자 A38면

프랜시스 골턴은 다윈의 사촌이다.

진화론을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우생학(eugenics)이라는 용어도 '본성과 양육'(nature and nurture)이라는 관용어도 그가 만들어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그는 대중이 어느 정도 우매한지를 궁금해했다.

그는 우연히 도축장에서 벌어지는 소 무게 알아맞히기 게임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이 게임은 살찐 소 한마리를 무대에 올려놓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추정치를 적어낸 다음 실제 무게에 가장 가깝게 맞힌 사람이 상금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참가자 800여명 대부분은 거리의 보통 사람들이었다.

골턴은 기록지를 넘겨받아 통계를 냈다.

대중이 써낸 추정치의 평균값은 1197파운드였다.

실제 무게는 얼마였을까.

놀랍게도 1198파운드였다.

800명이 써낸 평균값은 도축 전문가들의 추정치보다 훨씬 정확했다.

골턴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대중이 옳았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제임스 서로워키라는 저널리스트는 침몰된 핵 잠수함의 위치를 추정하는데 이 분야 전문가들보다는 다수의 아마추어들이 제멋대로 찍은 중간 지점이 침몰지점에 가까웠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소비 대중이 역으로 전문가들의 과업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레고 등 장난감 회사에서부터 최근에는 첨단 제품의 제조 과정에까지 적용되고 있는 새로운 방식이다.

위키피디아도 그런 사례다.

바로 이것이 국내 좌파 그룹에서 입술이 마르도록 선전하고 있는 소위 대중의 지혜 혹은 집단 지성론이다.

집단지성론은 작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일단의 좌파 교수들에 의해 공론에 올랐고 정치 집회가 열릴 때마다 싸구려 시위를 정당화하는 그럴싸한 논리로 둔갑해 확성기를 타고 있다.

그러나 웃기는 이야기다.

착각에도 분수가 있고 억지논리에도 한계가 있다.

지혜로운 대중은 열정으로 들끓는 시위 현장이나 슬로건으로 뒤덥힌 군중집회에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집단 지성론을 전파하는 교수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뜨거운 시위현장이 아니라 조용한 투표소야말로 집단 지성의 정치적 출생 장소이며 개인들이 이익을 다투는 시장이야말로 대중의 지혜가 응집되어 나타나는 장소다.

대중의 선택이 지혜롭기 위해서는 다수를 이루는 개인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신의 선호를 표현해야 하고 충분히 분산되어 있어야 하는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위군중의 그 어디에서도 독립적이며 분산적이어야 한다는 지혜의 조건을 찾을 수 없다.

하나의 의견만이 지배하는 곳이며 선동과 흥분 속에 열정적 동의만이 거품처럼 부풀려 올려지는 곳에 대중의 지혜라니 당치 않다.

나 혼자만의 장소인 투표소에 들어가 조용히 한표씩을 던질 때 우리는 그것의 중앙값을 통해 비로소 대중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다.

수많은 개인들이 치열하게 이익을 다투는 시장도 마찬가지다.

특정 기업의 주식가격을 사회적 합의나 시위를 통해 결정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특정 상품의 가격을 집회 아닌 선택들을 통해 만들어 내는 것처럼 분산 고립된 개인들이 의심과 회의 속에서 내리는 선택들이 종합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대중의 지혜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투표소와 시장에 존재하는 집단 지성을 집회현장에 있는 것처럼 둔갑시키는 것은 놀라운 재주요 지적 허무주의를 실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투표소와 시장을 군중시위로 점령하고자 하면서 민주주의를 내거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자신의 상품을 소리 높여 외치는 남대문 시장에서조차 결코 다른 상인의 좌판을 뒤엎지는 않는다.

지금 일부 과격세력의 집회나 시위는 남의 좌판을 깨부수고 자신의 상품만 강매하자는 반지성적 행패다.

지성을 독점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실로 우습다.

희한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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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과격 집단행동은 反지성적 행위… 민주 질서로 돌아가야

'대중'이라는 말은 대중의 광기 또는 대중의 열광,대중 심리,대중의 우매함 등처럼 부정적 단어와 쉽게 연결됐지만 최근 정보통신과 인터넷의 발달을 통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대중의 지혜, 집단 지성이라는 말도 나왔다.

집단지성은 보통사람들도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며 집단은 개인이 가진 능력의 합이나 똑똑한 소수의 전문가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최근에는 촛불 시위나 당시 인터넷상에 널리 퍼진 광우병 이야기,또는 시청광장에서의 시위를 두고 직접 민주주의의 재생이라든지 대중의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라고들 한다.

필자는 그러나 시위군중 어디에서도 지혜의 조건을 찾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독립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의견만이 지배하는 곳이며 선동과 동의만이 존재하는 그런 장소라는 것이다.

집단지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집단 구성이 다양해야 하고,권한이 분산돼야 하며,구성원이 상호독립적이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구성원의 의견이 정리되고 모아져 하나의 결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론도 있어야 한다.

필자는 혼자만의 장소인 투표소에 들어가 조용히 한 표씩을 던질 때 그것의 중앙값을 통해 비로소 대중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전체의 의견을 가장 잘 결집하는 것은 선거 과정이라는 것이다.

광장에서의 시위는 집단 구성이 다양하지도 않고 구성원의 의견을 모아 하나의 결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수많은 개인이 치열하게 이익을 다투는 시장에서도 분산 고립된 개인들이 의심과 회의 속에서 내리는 선택들이 종합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대중의 지혜를 마주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때 고립이나 회의라는 말은 죄수의 딜레마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투표소와 시장에 존재하는 집단 지성을 집회현장에 있는 것처럼 둔갑시키는 것은 놀라운 재주요 지적 허무주의를 실토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는 과격 집회는 자신의 상품만 강매하자는 반지성적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민주적 질서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다.

정재형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