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싱가포르보다 조금 이르게 1960년대 초부터 경제 개발에 착수하였다.

자본 축적이 없는 상태에서 외자 조달은 필수적이었는데 한국은 외국인 직접투자보다는 차관 도입을 선택하였다.

일제 식민지의 체험이 뼈저린지라 우리 땅에서 외국인,특히 일본인 사장이 한국인 종업원을 부리는 기업 방식을 수용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외자를 도입하더라도 외국 기업을 국내에 유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내 기업이 외국 돈을 빌리는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유능한 기업가들이 크게 부족한 개도국 한국의 국내 기업들에 산업화 주도는 벅찬 과제였다.

우선 1960년대 초반 국내 기업가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들만의 힘으로 필요한 외자와 기술을 조달해올 능력을 갖추지 못한 수준이었다.

외국인 투자를 거부하고 차관으로 외자를 조달하려는 경제개발계획은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정부는 한편으로는 한 · 일 국교를 정상화시켜 대일 경제협력의 길을 트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기업들의 차관 도입 계획을 심의한 다음 유망해 보이는 차관사업에 대해서는 국가가 해당 차관의 원리금 상환을 보증하기로 하였다.

물론 실제 보증 주체는 시중은행이었지만 당시에는 국가가 모든 시중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국가지급보증이었다.

나중에는 은행이 직접 차입해 온 외화자금을 국내 기업들에 대출해 주기도 하였다.

정부지급보증의 후광 속에서 선별된 기업들은 차관을 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은행이 도입한 외화자금도 경제개발계획상의 필요에 따라서 정부가 선정한 기업들에 대출되었다.

당시 현대적 제조업체를 설립하여 운영하려면 외화자금이 필수적이었던 만큼 정부의 차관 지급보증과 외화자금 대출을 받지 못하면 산업활동 참여 자체가 어려웠다.

결국 정부는 산업화에 참여할 기업을 일일이 심사하여 선발한 셈이다.

당연히 정경유착의 추문이 그치지 않았고 실제로 부패사건이 터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산업국가 한국은 이렇게 선발된 기업들이 주도하여 이룩한 성과이니 결과적으로 정부의 기업 선발은 성공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시장이 선택한 기업은 살아남아 번영하고 거부한 기업은 소멸한다.

정부가 아무리 면밀하게 검토하여 기업을 심사하더라도 실패하는 기업은 나오기 마련이었다.

경제 개발 과정에서 있었던 수차례의 부실기업 정리는 이렇게 실패한 기업을 처리하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기업 선택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정부가 성과주의 원칙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한번 사업을 실패로 이끈 기업에는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지만 사업을 성공시킨 기업가에게는 거듭 새로운 사업의 기회가 주어졌다.

부실기업 정리도 실패한 사업들을 성공한 기업가들에게 떠맡기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성공한 기업가들은 수많은 기업을 거느리는 재벌 총수로 성장하였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shoonlee@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