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나 돼지고기 소비 급감을 막기 위해 조류독감과 돼지독감을 각각 우리나라에서만 AI,SI로 줄여 쓰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 지금은 '신종 플루'로 통용되는 '돼지 인플루엔자(SI)'가 전 세계적으로 한창 퍼져나갈 때 한국의 전병률 질병관리본부 전염병대응센터장이 한 말이다.
그의 얘기는 우리 사회의 언어 현실 하나를 무심코 전하고 있지만 사실 그 말 속엔 언어학적으로 '약어'에 관한 중요한 이론 하나가 담겨 있다.
약어가 어휘화하는 순간 그 약어는 실체를 가리고,내용보다는 그 말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AI(avian influenza)가 그런 경우다.
2008년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해 맹위를 떨친 '조류 인플루엔자(鳥類-)'는 '닭,오리 따위와 같은 가금류와 야생 조류 등이 걸리는 급성 바이러스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판에 단어로 올랐다.
우리에게 이미 낯익은 이 AI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7년께,초기에는 '조류독감'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가금 인플루엔자'란 말이 함께 쓰이다가 '가금(家禽: 닭,오리,거위 등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이란 단어 자체가 요즘 잘 쓰지 않을뿐더러 어려운 한자어이다 보니 2004년께부터 자연스레 '조류 인플루엔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닭,오리 등의 소비가 급감하면서 양계농가의 피해가 막심해졌다.
그래서 주로 쓰이기 시작한 게 영문 약어 AI다.
이 말이 주는 효과는 외형적으로 조류나 인플루엔자를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실제 내용인 병든 닭이나 오리 등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켜주는 데 있다.
이번 '신종 플루'도 AI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지만 막판에 한 단계 더 나아감으로써 언어로서의 '생존'이란 측면에서 장래가 불투명해졌다.
지난 4월 하순 외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지기 시작한 이 질병은 초기에는 '돼지독감'으로 시작했다.
이어 '독감'이란 어감을 순화한 '돼지 인플루엔자(Swine Influenza)' 또는 그냥 SI로 불리던 와중에 국내 농협 · 양돈업계에 의해 '멕시코 인플루엔자(MI)' 또는 '북미 인플루엔자'가 대두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양돈업계의 극심한 피해 우려가 있었다.
그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미양돈업자위원회(NPPC) 데이브 워너 대변인이 "불행한 단어의 선택이었다. 돼지 인플루엔자라는 말이 사람들을 호도하고 있다"고 말한 데 이어 리처드 베서 미 질병통제센터 소장 직무대행도 "더 나은 표현을 찾아보기 위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급기야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5월1일 공식적으로 이름을 '2009 인플루엔자A(H1N1)'로 정정 발표했다.
한국에서도 이를 수용했으나 다만 이 이름이 부르기 어려워 보건복지부는 국내에서 통용하는 말로 '신종 인플루엔자A'를 선정했다.
언론에선 다시 이를 약칭 '신종 플루'라 통일해 부르기로 했다.
'플루'는 인플루엔자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WHO에서 정한 공식이름보다 쉬운 표현을 찾은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언론에서 '신종 플루'라 줄여 쓰는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특정 질병을 가리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신종 플루'는 미완의 이름이고,유사한 과정을 거친 '조류 인플루엔자'가 벌써 사전에 오른 것과는 달리 쉽게 단어로 대접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물의 질병으로 이미 사전에 오른 말에는 이 밖에도 '구제역(口蹄疫)'이 있다.
소나 돼지 따위의 동물이 잘 걸리며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병이다.
구제역은 '입 구,발굽 제,돌림병 역'이다.
전문용어로 출발해 웬만큼 일반화가 된 단어지만 여전히 한자어로는 어렵다.
하지만 특정 질병을 가리키는 이름은 다소 어렵다고 해도 병의 특성을 나타내 변별성을 갖추려면 그대로 쓰는 수밖에 없다.
소에서 발생하는 '광우병'도 사전에 오른 말이며 '사스'로 알려진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은 2003년 국립국어원 '신어자료집'에 '사스'와 함께 단어로 올랐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역시 보통명사들로 구성된 말이라는 점에서는 이번의 '신종 플루'와 다를 바 없지만 그보다는 영문 약칭인 '사스'로 더 많이 불려 고유명사처럼 굳은 경우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
지난달 말 지금은 '신종 플루'로 통용되는 '돼지 인플루엔자(SI)'가 전 세계적으로 한창 퍼져나갈 때 한국의 전병률 질병관리본부 전염병대응센터장이 한 말이다.
그의 얘기는 우리 사회의 언어 현실 하나를 무심코 전하고 있지만 사실 그 말 속엔 언어학적으로 '약어'에 관한 중요한 이론 하나가 담겨 있다.
약어가 어휘화하는 순간 그 약어는 실체를 가리고,내용보다는 그 말 자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AI(avian influenza)가 그런 경우다.
2008년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해 맹위를 떨친 '조류 인플루엔자(鳥類-)'는 '닭,오리 따위와 같은 가금류와 야생 조류 등이 걸리는 급성 바이러스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인터넷판에 단어로 올랐다.
우리에게 이미 낯익은 이 AI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7년께,초기에는 '조류독감'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가금 인플루엔자'란 말이 함께 쓰이다가 '가금(家禽: 닭,오리,거위 등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이란 단어 자체가 요즘 잘 쓰지 않을뿐더러 어려운 한자어이다 보니 2004년께부터 자연스레 '조류 인플루엔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닭,오리 등의 소비가 급감하면서 양계농가의 피해가 막심해졌다.
그래서 주로 쓰이기 시작한 게 영문 약어 AI다.
이 말이 주는 효과는 외형적으로 조류나 인플루엔자를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실제 내용인 병든 닭이나 오리 등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켜주는 데 있다.
이번 '신종 플루'도 AI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지만 막판에 한 단계 더 나아감으로써 언어로서의 '생존'이란 측면에서 장래가 불투명해졌다.
지난 4월 하순 외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지기 시작한 이 질병은 초기에는 '돼지독감'으로 시작했다.
이어 '독감'이란 어감을 순화한 '돼지 인플루엔자(Swine Influenza)' 또는 그냥 SI로 불리던 와중에 국내 농협 · 양돈업계에 의해 '멕시코 인플루엔자(MI)' 또는 '북미 인플루엔자'가 대두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양돈업계의 극심한 피해 우려가 있었다.
그것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미양돈업자위원회(NPPC) 데이브 워너 대변인이 "불행한 단어의 선택이었다. 돼지 인플루엔자라는 말이 사람들을 호도하고 있다"고 말한 데 이어 리처드 베서 미 질병통제센터 소장 직무대행도 "더 나은 표현을 찾아보기 위해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급기야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5월1일 공식적으로 이름을 '2009 인플루엔자A(H1N1)'로 정정 발표했다.
한국에서도 이를 수용했으나 다만 이 이름이 부르기 어려워 보건복지부는 국내에서 통용하는 말로 '신종 인플루엔자A'를 선정했다.
언론에선 다시 이를 약칭 '신종 플루'라 통일해 부르기로 했다.
'플루'는 인플루엔자를 줄여 이르는 말이다.
WHO에서 정한 공식이름보다 쉬운 표현을 찾은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언론에서 '신종 플루'라 줄여 쓰는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특정 질병을 가리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신종 플루'는 미완의 이름이고,유사한 과정을 거친 '조류 인플루엔자'가 벌써 사전에 오른 것과는 달리 쉽게 단어로 대접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동물의 질병으로 이미 사전에 오른 말에는 이 밖에도 '구제역(口蹄疫)'이 있다.
소나 돼지 따위의 동물이 잘 걸리며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병이다.
구제역은 '입 구,발굽 제,돌림병 역'이다.
전문용어로 출발해 웬만큼 일반화가 된 단어지만 여전히 한자어로는 어렵다.
하지만 특정 질병을 가리키는 이름은 다소 어렵다고 해도 병의 특성을 나타내 변별성을 갖추려면 그대로 쓰는 수밖에 없다.
소에서 발생하는 '광우병'도 사전에 오른 말이며 '사스'로 알려진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은 2003년 국립국어원 '신어자료집'에 '사스'와 함께 단어로 올랐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역시 보통명사들로 구성된 말이라는 점에서는 이번의 '신종 플루'와 다를 바 없지만 그보다는 영문 약칭인 '사스'로 더 많이 불려 고유명사처럼 굳은 경우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