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굴뚝산업이란 표현을 쓰지 말아주세요."
2000년 4월. 당시는 벤처 열풍이 한창 불던 때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펴 온 정보기술(IT)산업 육성책에 힘입어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벤처기업이 태어날 정도로 모든 게 '벤처'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 방송 등 언론사 앞으로 한국기계산업진흥회 명의의 협조문 한 통이 날아들었다.
'기계 산업인 일동'이란 이름으로 보내 온 협조문의 요지는 한마디로 '굴뚝산업'이란 용어가 산업현장의 경영자와 근로자들을 힘 빠지게 하고 있으니 다른 표현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 "국민 여러분,OIE에서는 멕시코인플루엔자(MI)가 돼지와 전혀 무관하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돼지 인플루엔자(SI)가 아닙니다. 멕시코인플루엔자(MI)로 불러주십시오."
2009년 4월30일.
멕시코에서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가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이날 한국의 농협중앙회 및 대한양돈협회 등은 공동으로 이 인플루엔자의 이름이 잘못 알려졌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 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두 경우는 모두 말에 담긴 이데올로기의 힘이 실제 우리 언어생활에서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굴뚝산업'이든 '돼지 인플루엔자'든 사람들은 '말'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데,그것이 가능한 것은 언어에 담긴 '관점(point of view)' 때문이다.
당시 기계산업진흥회 측이 주장한 '굴뚝산업'이란 말의 문제점은 벤처 산업에 비해 뒤처진 산업,환경을 오염시키는 산업,내실이 없고 덩치만 큰 산업,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산업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굴뚝산업'이란 2000년 당시 붐을 이루던 벤처업종 등의 첨단산업에 대해 그동안 산업의 중심이 돼 온 전통적인 제조업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증시에선 그러한 업종의 주식을 가리켜 '굴뚝주(株)'라 칭하기도 한다.
진흥회 측은 '굴뚝산업'을 대신할 용어로 '전통제조업'을 써달라고 주문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첨단'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의 '굴뚝'이 담고 있는 특징적 어감을 일반 명사로 이뤄진 '전통제조업'이 살려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굴뚝산업'이 갖고 있는 언어적 긴장감도 이 말을 다른 대체어에 비해 힘 있게 만든 요인이다.
'굴뚝산업'은 수사학적으론 비유 중에서도 환유에 해당한다.
'굴뚝'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전통적인 제조업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에서 수사학적 기법은 일단 성공만 하면 직설적인 표현보다 훨씬 설득력을 더한다.
그 자체가 강력한 언어적 힘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굴뚝산업'은 살아남은 것이고 지금도 흔히 쓰이는 용어로 굳어져 가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 정식 단어로 사전에 오른 말은 아니다.
이에 비해 '돼지독감'으로 시작한 최근의 '신종 인플루엔자'는 짧은 기간 안에 언어를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 생명력은 불투명하다.
이 용어는 국내 언론에 처음 보도되기 시작한 지난 4월 하순 이후 '돼지독감→돼지 인플루엔자(SI)→SI→인플루엔자A(H1N1)→신종 인플루엔자A(신종 플루)'로 불과 10여일 사이에 빠른 변화와 정착의 과정을 거쳤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최종적으로 '인플루엔자A(H1N1)'로 정해지기 전엔 발생한 지역 이름을 따 '북미 인플루엔자' 또는 '멕시코 인플루엔자(MI)'란 명칭까지 더해져 '관점'에 따른 언어적 세력 다툼이 매우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신종 인플루엔자(신종 플루)'란 명칭은 그리 잘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 자체로 언어적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인식하고,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동시에 다른 것과의 관계를 구분하고,때로는 한쪽으로 의식화 고착화(stereotyping)하는 효과도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또는 신종 인플루엔자A,약칭으로 신종 플루)'는 바로 이 점에서 앞에서 살핀 '굴뚝산업'과는 다른,매우 취약한 상태의 말이다.
새로 나타난 인플루엔자의 특성을 반영한 고유 명칭이 아니라 언제든지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일반 명칭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동안 없었던 것이 나타났을 때는 그것이 곧 '신종 인플루엔자'였을 터이고 앞으로도 새로운 인플루엔자가 출현하면 그 역시 '신종 인플루엔자'일 것이므로 이름의 특성인 고유성, 변별성을 담아내지 못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
2000년 4월. 당시는 벤처 열풍이 한창 불던 때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펴 온 정보기술(IT)산업 육성책에 힘입어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벤처기업이 태어날 정도로 모든 게 '벤처'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 방송 등 언론사 앞으로 한국기계산업진흥회 명의의 협조문 한 통이 날아들었다.
'기계 산업인 일동'이란 이름으로 보내 온 협조문의 요지는 한마디로 '굴뚝산업'이란 용어가 산업현장의 경영자와 근로자들을 힘 빠지게 하고 있으니 다른 표현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 "국민 여러분,OIE에서는 멕시코인플루엔자(MI)가 돼지와 전혀 무관하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돼지 인플루엔자(SI)가 아닙니다. 멕시코인플루엔자(MI)로 불러주십시오."
2009년 4월30일.
멕시코에서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가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이날 한국의 농협중앙회 및 대한양돈협회 등은 공동으로 이 인플루엔자의 이름이 잘못 알려졌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 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두 경우는 모두 말에 담긴 이데올로기의 힘이 실제 우리 언어생활에서 어떻게 표출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굴뚝산업'이든 '돼지 인플루엔자'든 사람들은 '말'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데,그것이 가능한 것은 언어에 담긴 '관점(point of view)' 때문이다.
당시 기계산업진흥회 측이 주장한 '굴뚝산업'이란 말의 문제점은 벤처 산업에 비해 뒤처진 산업,환경을 오염시키는 산업,내실이 없고 덩치만 큰 산업,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산업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굴뚝산업'이란 2000년 당시 붐을 이루던 벤처업종 등의 첨단산업에 대해 그동안 산업의 중심이 돼 온 전통적인 제조업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증시에선 그러한 업종의 주식을 가리켜 '굴뚝주(株)'라 칭하기도 한다.
진흥회 측은 '굴뚝산업'을 대신할 용어로 '전통제조업'을 써달라고 주문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첨단'에 대응하는 개념으로서의 '굴뚝'이 담고 있는 특징적 어감을 일반 명사로 이뤄진 '전통제조업'이 살려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굴뚝산업'이 갖고 있는 언어적 긴장감도 이 말을 다른 대체어에 비해 힘 있게 만든 요인이다.
'굴뚝산업'은 수사학적으론 비유 중에서도 환유에 해당한다.
'굴뚝'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전통적인 제조업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글쓰기에서 수사학적 기법은 일단 성공만 하면 직설적인 표현보다 훨씬 설득력을 더한다.
그 자체가 강력한 언어적 힘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굴뚝산업'은 살아남은 것이고 지금도 흔히 쓰이는 용어로 굳어져 가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 정식 단어로 사전에 오른 말은 아니다.
이에 비해 '돼지독감'으로 시작한 최근의 '신종 인플루엔자'는 짧은 기간 안에 언어를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 생명력은 불투명하다.
이 용어는 국내 언론에 처음 보도되기 시작한 지난 4월 하순 이후 '돼지독감→돼지 인플루엔자(SI)→SI→인플루엔자A(H1N1)→신종 인플루엔자A(신종 플루)'로 불과 10여일 사이에 빠른 변화와 정착의 과정을 거쳤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최종적으로 '인플루엔자A(H1N1)'로 정해지기 전엔 발생한 지역 이름을 따 '북미 인플루엔자' 또는 '멕시코 인플루엔자(MI)'란 명칭까지 더해져 '관점'에 따른 언어적 세력 다툼이 매우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신종 인플루엔자(신종 플루)'란 명칭은 그리 잘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 자체로 언어적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인식하고,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동시에 다른 것과의 관계를 구분하고,때로는 한쪽으로 의식화 고착화(stereotyping)하는 효과도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또는 신종 인플루엔자A,약칭으로 신종 플루)'는 바로 이 점에서 앞에서 살핀 '굴뚝산업'과는 다른,매우 취약한 상태의 말이다.
새로 나타난 인플루엔자의 특성을 반영한 고유 명칭이 아니라 언제든지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일반 명칭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동안 없었던 것이 나타났을 때는 그것이 곧 '신종 인플루엔자'였을 터이고 앞으로도 새로운 인플루엔자가 출현하면 그 역시 '신종 인플루엔자'일 것이므로 이름의 특성인 고유성, 변별성을 담아내지 못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