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상대적으로 인식된다
⊙ 뫼비우스의 띠,인식의 상대성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쪽을 한 번 꼬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한쪽 면만을 지닌 소위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진다.
어느 쪽이 안쪽인지,바깥쪽인지 분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상대적인 속성을 언급할 때 자주 활용된다.
마치 장자의 호접몽처럼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차원을 뫼비우스의 띠가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뫼비우스의 띠는 인간의 인식과 경험이 대단히 상대적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시된 그림은 마그리트의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통해 마그리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결국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지각과 그 의미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림 안을 들여다보면 파이프가 왼쪽 윗부분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형상은 파이프지만 실상 그것이 공중에 떠 있다는 점에서 파이프라고 단정짓는 것은 오류가 된다.
한편으로 또 그것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일 뿐이지 실제의 파이프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을 특정한 의미로 규정짓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용감하고도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지역 도심 재개발을 두고 용산에서 끔찍한 일이 있어났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 사이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있었고 불행히도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혹자는 참사라고,혹자는 사태라고,혹자는 사건이라고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이런 식의 인식 태도 역시 인식의 상대성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조세희는 이러한 상대적인 인식,안이 겉이 되고,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식의 경험을 오래 전 우리에게 제시해 준 바가 있다.
그의 출세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연작 중 「뫼비우스의 띠」가 바로 그것이다.
⊙ 폭력의 이중주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은 1970년대 진행되었던 도시 재개발과 그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철거민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이 작품이 여전히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까닭은 철거민의 고단한 삶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적이라는 사실을 방증해준다.
「뫼비우스의 띠」는 12부분 중 첫 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겉 이야기'와 '안 이야기'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으면서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주제의식이 서로 연결돼 있다.
작품의 '겉 이야기'는 고교 졸업을 앞둔 3학년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수학교사가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그는 굴뚝청소를 하러 들어갔다 나온 얼굴이 까만 사람과 하얀 사람 중에 누가 얼굴을 씻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은 상식적인 수준으로 답을 하지만 수학교사는 뒤이어서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왜냐하면 똑같이 굴뚝청소를 했으므로 얼굴이 둘 다 까맣거나 둘 다 하얗거나 할 것이라는 것이다.
뒤이어 수학교사가 들려준 '안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철거민의 비극적인 삶에 관한 것이다.
'안 이야기'의 주인공은 꼽추와 앉은뱅이인데 모두 악덕 부동산업자에게 속아 헐값에 입주권을 넘기게 된 철거민들이다.
그들은 부동산업자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폐차장에서 망가진 승용차를 구입한 꼽추와 앉은뱅이는 그 안에 날카롭게 간 장검들과 단단한 돌,맥주병,긴 못을 실었고 끝내는 휘발유까지 마련해 복수를 준비하게 된다.
⊙ 구별할 수 없는 폭력
아래 장면은 꼽추와 앉은뱅이가 자신들의 입주권을 헐값에 사들인 부동산업자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이다.
앉은뱅이가 먼저 나섰다가 오히려 폭행을 당하자 꼽추가 그를 제압했던 것이다.
사나이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꼽추가 그의 입에 큰 반창고를 붙인 뒤였다.
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전깃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중략)
"통을 가져와."
앉은뱅이가 말했다.
그의 손에도 마지막 전깃줄이 들려 있었다.
밖으로 나온 꼽추는 콩밭에서 플라스틱통을 찾았다.
그 친구의 얼굴만 보았다.
그 이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는 승용차 옆을 떠나 동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다.
불빛 한 점 없어 동네가 어디쯤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앉은뱅이가 기어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앉은뱅이는 승용차 안에서 몸을 굴려 밖으로 떨어져 나올 것이다.
그는 문을 쾅 닫고 아주 빠르게 손을 놀려 어둠 깔린 황톳길 위를 기어올 것이다. (중략)
앉은뱅이의 몸에서는 휘발유 냄새가 났다.
꼽추가 펌프를 찧어 앉은뱅이의 얼굴을 씻어 주었다.
앉은뱅이는 얼굴이 쓰라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런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돈과 내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가 기어온 황톳길 저쪽 끝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는 일어서려는 친구를 잡아 앉혔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왔을 때 꼽추네 식구들은 정말 잘 참았다.
앉은뱅이네 식구는 꼽추네 식구들보다 대가 약했다.
앉은뱅이는 갑자기 일어서려고 한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폭발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앉은뱅이도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불길도 자고 폭발소리도 자 버렸다.
-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결국 앉은뱅이는 '사내'로 언급된 악덕 부동산업자를 차에 태운 채 휘발유로 불을 붙여 살해하기에 이른다.
약자이며,소수자로서 인식되던 철거민 앉은뱅이가 폭력적 살인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더 이상 약자와 강자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분명히 사건의 발단은 악덕 부동산업자의 부당한 이윤 추구와 폭행이었다.
그러나 그가 부당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살해를 정당화시켜주지는 못한다.
결국 앉은뱅이 역시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다.
굴뚝 안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누구는 깨끗하고 누구는 더러울 수 없듯이 두 사람 모두 폭력 앞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뫼비우스의 법칙이 이 안에도 존재하는 셈이다.
악덕을 몰아내는 폭력 역시 악덕임에는 분명한 것이지 않은가.
작가는 작품의 결말에서 앉은뱅이와 꼽추를 헤어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꼽추는 작가의식을 담아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악덕 부동산 업자나 돈을 돌려받고도 사내를 끝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앉은뱅이나 모두 꼽추에게는 문제적인 이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고정된 선이나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이 악이 되고,악이 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는 작품의 마지막 '겉 이야기' 부분에서 수학교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한마디를 추가한다.
그것은 앞으로 대학에서 배울 지식을 자신의 이익에만 맞추어 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지식은 자기 자신과 주변의 삶을 풍요롭게도 하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그것이 어느 순간 타인을 억압하고 지배하며 종국에는 자신에게 큰 해를 입힐 수도 있는 악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상대적 인식 속에 남아 있는 모순
올초 용산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에게 큰 혼란과 염려를 가져다 주었다.
누군가는 공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지 못했던 일로 해석하기도 하고,또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질서를 위협하는 불법 폭력 시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체는 하나지만 그것은 마치 안과 겉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식적인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실체를 해석하는 데 분명한 차이를 보이겠지만 이제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적인 현실 속에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실체적 진실이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서민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들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한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모를 또 다른 폭력적인 사태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적인 현실이 절대적인 모순을 은폐하는 데 활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
⊙ 뫼비우스의 띠,인식의 상대성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쪽을 한 번 꼬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한쪽 면만을 지닌 소위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진다.
어느 쪽이 안쪽인지,바깥쪽인지 분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상대적인 속성을 언급할 때 자주 활용된다.
마치 장자의 호접몽처럼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차원을 뫼비우스의 띠가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뫼비우스의 띠는 인간의 인식과 경험이 대단히 상대적인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시된 그림은 마그리트의 그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통해 마그리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결국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지각과 그 의미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림 안을 들여다보면 파이프가 왼쪽 윗부분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형상은 파이프지만 실상 그것이 공중에 떠 있다는 점에서 파이프라고 단정짓는 것은 오류가 된다.
한편으로 또 그것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린 그림일 뿐이지 실제의 파이프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이나 현상을 특정한 의미로 규정짓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용감하고도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지역 도심 재개발을 두고 용산에서 끔찍한 일이 있어났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 사이에서 물리적인 충돌이 있었고 불행히도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혹자는 참사라고,혹자는 사태라고,혹자는 사건이라고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마도 이런 식의 인식 태도 역시 인식의 상대성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조세희는 이러한 상대적인 인식,안이 겉이 되고,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식의 경험을 오래 전 우리에게 제시해 준 바가 있다.
그의 출세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연작 중 「뫼비우스의 띠」가 바로 그것이다.
⊙ 폭력의 이중주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은 1970년대 진행되었던 도시 재개발과 그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철거민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이 작품이 여전히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까닭은 철거민의 고단한 삶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적이라는 사실을 방증해준다.
「뫼비우스의 띠」는 12부분 중 첫 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겉 이야기'와 '안 이야기'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으면서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주제의식이 서로 연결돼 있다.
작품의 '겉 이야기'는 고교 졸업을 앞둔 3학년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수학교사가 이야기를 해주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그는 굴뚝청소를 하러 들어갔다 나온 얼굴이 까만 사람과 하얀 사람 중에 누가 얼굴을 씻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은 상식적인 수준으로 답을 하지만 수학교사는 뒤이어서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왜냐하면 똑같이 굴뚝청소를 했으므로 얼굴이 둘 다 까맣거나 둘 다 하얗거나 할 것이라는 것이다.
뒤이어 수학교사가 들려준 '안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철거민의 비극적인 삶에 관한 것이다.
'안 이야기'의 주인공은 꼽추와 앉은뱅이인데 모두 악덕 부동산업자에게 속아 헐값에 입주권을 넘기게 된 철거민들이다.
그들은 부동산업자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폐차장에서 망가진 승용차를 구입한 꼽추와 앉은뱅이는 그 안에 날카롭게 간 장검들과 단단한 돌,맥주병,긴 못을 실었고 끝내는 휘발유까지 마련해 복수를 준비하게 된다.
⊙ 구별할 수 없는 폭력
아래 장면은 꼽추와 앉은뱅이가 자신들의 입주권을 헐값에 사들인 부동산업자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이다.
앉은뱅이가 먼저 나섰다가 오히려 폭행을 당하자 꼽추가 그를 제압했던 것이다.
사나이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꼽추가 그의 입에 큰 반창고를 붙인 뒤였다.
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전깃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중략)
"통을 가져와."
앉은뱅이가 말했다.
그의 손에도 마지막 전깃줄이 들려 있었다.
밖으로 나온 꼽추는 콩밭에서 플라스틱통을 찾았다.
그 친구의 얼굴만 보았다.
그 이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는 승용차 옆을 떠나 동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다.
불빛 한 점 없어 동네가 어디쯤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앉은뱅이가 기어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앉은뱅이는 승용차 안에서 몸을 굴려 밖으로 떨어져 나올 것이다.
그는 문을 쾅 닫고 아주 빠르게 손을 놀려 어둠 깔린 황톳길 위를 기어올 것이다. (중략)
앉은뱅이의 몸에서는 휘발유 냄새가 났다.
꼽추가 펌프를 찧어 앉은뱅이의 얼굴을 씻어 주었다.
앉은뱅이는 얼굴이 쓰라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런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돈과 내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가 기어온 황톳길 저쪽 끝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는 일어서려는 친구를 잡아 앉혔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왔을 때 꼽추네 식구들은 정말 잘 참았다.
앉은뱅이네 식구는 꼽추네 식구들보다 대가 약했다.
앉은뱅이는 갑자기 일어서려고 한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폭발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앉은뱅이도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불길도 자고 폭발소리도 자 버렸다.
-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결국 앉은뱅이는 '사내'로 언급된 악덕 부동산업자를 차에 태운 채 휘발유로 불을 붙여 살해하기에 이른다.
약자이며,소수자로서 인식되던 철거민 앉은뱅이가 폭력적 살인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더 이상 약자와 강자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분명히 사건의 발단은 악덕 부동산업자의 부당한 이윤 추구와 폭행이었다.
그러나 그가 부당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살해를 정당화시켜주지는 못한다.
결국 앉은뱅이 역시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다.
굴뚝 안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누구는 깨끗하고 누구는 더러울 수 없듯이 두 사람 모두 폭력 앞에서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뫼비우스의 법칙이 이 안에도 존재하는 셈이다.
악덕을 몰아내는 폭력 역시 악덕임에는 분명한 것이지 않은가.
작가는 작품의 결말에서 앉은뱅이와 꼽추를 헤어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꼽추는 작가의식을 담아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악덕 부동산 업자나 돈을 돌려받고도 사내를 끝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앉은뱅이나 모두 꼽추에게는 문제적인 이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고정된 선이나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이 악이 되고,악이 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는 작품의 마지막 '겉 이야기' 부분에서 수학교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한마디를 추가한다.
그것은 앞으로 대학에서 배울 지식을 자신의 이익에만 맞추어 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지식은 자기 자신과 주변의 삶을 풍요롭게도 하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그것이 어느 순간 타인을 억압하고 지배하며 종국에는 자신에게 큰 해를 입힐 수도 있는 악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상대적 인식 속에 남아 있는 모순
올초 용산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에게 큰 혼란과 염려를 가져다 주었다.
누군가는 공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지 못했던 일로 해석하기도 하고,또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질서를 위협하는 불법 폭력 시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체는 하나지만 그것은 마치 안과 겉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상식적인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실체를 해석하는 데 분명한 차이를 보이겠지만 이제 그 안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상대적인 현실 속에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실체적 진실이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서민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그들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한 누가 옳은지 그른지 모를 또 다른 폭력적인 사태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적인 현실이 절대적인 모순을 은폐하는 데 활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전주 상산고 교사 etika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