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vs 사회주의…세계와 역사의 발전을 보는 엇갈린 관점
제시문 (나)는 조셉지프슘페터(Joseph Schumpeter)의 책 Capitalism,Socialism,and Democracy(1943)에서 발췌한 것이다.
슘페터 역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니체의 주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시문 (나)에서 슘페터가 말하는 세계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이 변화의 동인은 새로운 상품,새로운 생산 방식 또는 수송 수단,새로운 시장,자본주의 기업이 창조해 낸 새로운 산업 조직의 구성 등"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경쟁과 기술혁신이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동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기를 파괴하고 창조해 나가면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이것을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본다면 니체와는 생각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니체의 세계는 아무런 목적없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계이지만,슘페터의 세계,즉 자본주의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정체되어 있을 수도 없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진보하는 지향점에 대해서는 명확히 제시문에서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갖는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인류가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자본주의의 목적임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행복하고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진보,발전의 방향성이 무엇인지,그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인지,자본주의가 인류 전체의 물질적 풍요를 담보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제시문 (나)에서 학생들이 읽어야 할 것은 "경쟁과 기술혁신이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발전시키며,따라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지만 니체와는 달리 순환이 아닌 발전을 위한 창조적 파괴가 진행되는 세계"라는 점이다.
제시문 (다)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1848)에서 발췌한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세계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통해 변화해 나간다고 보고 있다.
마르크스는 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중세 봉건사회와의 투쟁을 통해 봉건사회를 붕괴시켰다고 보고 있다.
즉,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중세 봉건사회를 파괴시키고 근대 사회를 창조시켰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계급투쟁의 일면을 제시문 (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제시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제시문의 "이러한 봉건사회의 붕괴를 통해서 출현한 근대 부르주아 사회 역시 계급 대립을 해소한 것은 아니었고,다만 과거를 대체할 새로운 종류의 계급,새로운 억압 조건,그리고 새로운 투쟁 형태를 선보였을 뿐이다. (중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 역시 새로운 계급 투쟁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에 대한 계급투쟁의 주체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로 보고 있고 이들의 승리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곧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공동체"가 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르크스가 보는 세계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통해 변화해 나가고 진보하는 세계이다.
마르크스의 세계는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세계가 아닌 발전하고 진보하는 세계라는 니체의 세계와는 다르며,동시에 슘페터의 세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슘페터의 세계는 자본주의이며,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발전,진보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즉, 슘페터의 진보하고 발전하는 세계는 자본주의를 의미하지만,마르크스의 세계는 자본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진보의 동인을 경쟁과 기술혁신이라는 창조적 파괴로 보았다면,마르크스는 세계 발전의 동인은 계급투쟁인 것이다.
마르크스 세계의 발전,진보의 방향,목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공동체, 즉 사회주의이다.
이렇게 봤을 때,마르크스의 세계는 끝나는 지점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슘페터의 세계와도 다른 점을 보인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역사의 발전,세계의 발전은 끝이 나는 것이다.
슘페터는 세계의 발전,역사의 발전에 종료지점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지점은 분명하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면,역사가 종료된다는 그의 주장은 그 이상의 발전과 진보를 담보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역사가 그곳에서 종료된다면,세계와 인간은 정체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료된 역사에 살고 있는 인간은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결국 다시 사회주의는 다른 어떤 것으로 전복되어 역사는 계급투쟁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제시문 (다)에서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것은 계급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세계가 창조되고 파괴되지만,세계가 발전해 나가야 하는 지점이 설정되어 언젠가는 발전이 종료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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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1] ‘창조’와 ‘파괴’의 관점에서 제시문 (가),(나),(다)를 비교하시오. (800자 내외)
위에서 밝힌 대로 〔문제 1〕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시문을 분석하는 능력,즉 독해력을 묻고 있다.
따라서 제시문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제시문을 각각 자세히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800자 내외이므로 3단락 정도로 개요를 구성하면 되겠다.
단락 1에서는 제시문 (가),(나),(다)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제시문 (가)에서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하고 파괴되면서 변화해 나가며,이는 순환적인 양상을 띤다고 주장한다. 반면,(나)와 (다)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되고 파괴되고 변화해 나가면서도 발전한다고 주장한다"고 정리하고 각각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간략하게 서술해 주면 된다.
요약이므로 제시문의 핵심 요지를 밝히고 저자가 이 요지를 밝히기 위해 어떤 논리로 근거를 들어 설명하는지를 재구성해서 써야 한다.
요약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제시문을 복사해서 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이 이해한 바를 글로 풀어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락 2에서는 제시문 (가)와 (나),(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것으로 서술하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제시문 (가)의 순환적인 세계,역사관과 제시문 (나)와 (다)의 발전하고 진보하는 세계,역사관의 차이점을 밝히면 될 것이다.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1번 문제에서 어떤 세계,역사관이 더 타당한지를 밝히는 것보다는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지를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이 더 좋다.
단락 3에서는 제시문 (나)와 (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면 될 것이다.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면서 발전하고 진보해 나가지만,제시문 (나)의 경쟁과 기술혁신이라는 동인을 통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할 것이라는 주장과 제시문 (다)의 계급투쟁이라는 동인을 통해 역사는 발전하지만,세계와 역사 발전의 종료 지점이 설정되어 있는 폐쇄적인 역사관이라는 차이를 부각시키면 될 것이다.
여기서도 어떤 역사관이 더 타당한지를 밝히는 것보다는 차이점과 공통점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문제2] 제시문 (가)와 (나) 가운데 역사 해석의 관점으로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 하나를 선택하고,그 입장에서 다른 제시문의 주장을 비판하시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의하시오. (800자 내외)
앞에서 밝힌 대로 〔문제 2〕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각각 제시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먼저 제시문 (가)와 (나)의 논지를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단락 1에서 제시문 (가)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하고 파괴되면서 변화해 나가며,이는 순환적인 양상을 띤다고 주장하고,(나)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되고 파괴되고 변화해 나가면서도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이 후 학생들은 입장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약 200자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단락 2에서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제시문을 비판하는 단락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①반대 의견이 왜 틀렸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맞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②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지점이 왜 논리적으로 틀렸는지를 보여 줘야 한다.
제시문 (가)를 선택했다면 제시문 (나)를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
먼저,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보가 도달하려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경쟁과 기술혁신으로 물질적 풍요가 담보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부문에서 창조적 파괴가 이뤄지는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창조적 파괴가 이뤄지는 것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효율성을 전제하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삶까지 효율성으로 창조적 파괴되는 사실을 비판의 초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나)의 주장을 따를 경우 인간의 행복을 담보하지도 못한다는 것으로 비판의 초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발전지향적이고 상승지향적인 역사관은 발전과 진보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그로 인해 소외되는 계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경제 발전이라는 창조적 파괴의 큰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채,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외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나)의 주장을 따른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제시문 (나)의 입장을 선택했다면 제시문 (가)를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제시문 (가)의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세계,역사관을 취한다면,현재 인류가 이루어낸 모든 성과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낸 경제 발전,과학 발전,수명연장과 같은 성과는 발전과 진보를 향한 인류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제시문 (가)의 세계관에서는 단지 세계와 역사는 반복되고 순환될 뿐 인류의 노력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세계와 역사에서 인간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발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유지는커녕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락 3에서는 이러한 비판을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들면 된다.
제시문 (가)의 입장에서 제시문 (나)의 입장을 비판하는 학생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소외현상과 관련된 사례를 들면 될 것이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워낭소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 혁신을 통해 농산품의 생산량이 늘수는 있겠지만,그로 인한 전통의 상실과 생태계의 파괴 등을 놓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시문 (나)의 입장에서 제시문 (가)의 입장을 비판하는 학생은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과 동시에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해 삶이 윤택해진 사례를 들면 될 것이다.
[문제 3] 제시문 (나)와 (다)의 주장에 근거하여 제시문 (라)의 그림을 해석하시오. (1,000자 내외)
먼저 제시문 (라)에 나와있는 자료를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림 1과 2에서 학생들은 1947~73년과 1974~2004년 사에에 보이는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에 대한 비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전하기 시작한 그림2의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을 그림 1과 비교해 본다면 최하위 20%층은 오히려 거의 증가하지 못하고 오히려 최상위 20%층은 압도적으로 증가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쉽게 계층별 부의 분배가 1970년대 후반부터 눈에 띄게 불평등해지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본다면,왜 그림 1의 기간 동안의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의 평균이 그림 2의 그것보다 더 높은 것을 보이는 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혁신이나 경쟁은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발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동인이 경쟁과 기술혁신이라는 동인,즉 창조적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제시문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1970년 후반의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이 1947~73년의 그것보다 높게 나와야 하는데 반대로 나온 것이다.
이는 물론 과거 발전의 정도가 현재보다 더 미흡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계층별 부의 분배가 심화된 것의 또다른 방증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1947년도보다 1973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살게 되었지만,1974~2004년도에는 잘 사는 사람만 더 잘 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하위 층은 2004년에도 1973년도 정도의 소득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최상위층은 계속해서 더욱 더 높은 소득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 3을 통해서 학생들은 시간당 생산량이 1970년대 후반부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지만,시간당 실질임금은 1950년도부터 보여 오는 증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읽어내야 한다.
즉 시간당 생산량과 시간당 실질임금간에 보이는 잉여량이 점점 증가하고 있고,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림 1,2의 분석 내용과 연결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시간당 생산량은 제시문 (나)의 입장처럼 경쟁과 기술혁신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는 갈수록 더 불평등해지고 있다는 점,발전 혹은 진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제시문 (라)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문 (라)에 대한 분석을 단락 1에서 보여주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입장을 정하는 것인데,만약 제시문 (나)의 입장을 취한다면,시간당 생산량의 증가를 들면서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음을 근거로 삼아 분배의 문제만 해결하면 자본주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음을 주장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제시문 (다)의 입장에 대한 비판을 겸해주면 좋을 것이다.
즉 제시문 (다)의 입장을 취한다면,분배의 문제가 해결되겠지만,전체 세계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즉 제시문 (다)처럼 발전의 종료지점을 설정하면 전체 세계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분배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발생될 수 밖에 없게 되므로 따라서 경쟁과 기술혁신을 통한 세계의 발전이 우선이고 분배 문제의 해결을 차선을 삼아서 해결하자고 주장하면 된다.
분배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는 롤스의 정의론을 들면 될 것이다.
반면 제시문 (다)의 입장을 취한 학생이라면,세계의 양적인 발전보다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면 될 것이다.
즉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전한다는 것은 부분적인 사실임을 밝혀 제시문 (나)를 비판해야 한다.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전하는 것은 양적인 부분만을 의미하지 모든 사람들이 발전 혹은 행복해진다는 주장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정확한 방향과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세계관 역사관에서는 언제나 희생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현상 역시 최상위층이 더 잘살기 위한 창조적 파괴가 최하위층의 경제적 궁핍을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하위층의 희생을 통해 세계가 발전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를 선한 세계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종료지점을 설정하거나 폐쇄적인 역사관을 취해 발전을 제한해서도 안되겠지만,진보와 발전의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자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더디가더라도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가자는 대안을 내놓아도 될 것이다.
속도와 경쟁을 강조하고 물질적인 풍요만을 강조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마무리 지어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제 3〕에서는 (나)와 (다)의 입장에 근거해 (라)를 해석하시오라고 제시했다고 해서 해석에서만 멈추지 말고,제시문의 논리를 확장시켜서 글을 전개해야 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
제시문 (나)는 조셉지프슘페터(Joseph Schumpeter)의 책 Capitalism,Socialism,and Democracy(1943)에서 발췌한 것이다.
슘페터 역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니체의 주장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시문 (나)에서 슘페터가 말하는 세계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이 변화의 동인은 새로운 상품,새로운 생산 방식 또는 수송 수단,새로운 시장,자본주의 기업이 창조해 낸 새로운 산업 조직의 구성 등"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경쟁과 기술혁신이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동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기를 파괴하고 창조해 나가면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이것을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본다면 니체와는 생각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니체의 세계는 아무런 목적없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세계이지만,슘페터의 세계,즉 자본주의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정체되어 있을 수도 없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진보하는 지향점에 대해서는 명확히 제시문에서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갖는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인류가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자본주의의 목적임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가 행복하고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진보,발전의 방향성이 무엇인지,그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인지,자본주의가 인류 전체의 물질적 풍요를 담보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제시문 (나)에서 학생들이 읽어야 할 것은 "경쟁과 기술혁신이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발전시키며,따라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지만 니체와는 달리 순환이 아닌 발전을 위한 창조적 파괴가 진행되는 세계"라는 점이다.
제시문 (다)는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1848)에서 발췌한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세계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통해 변화해 나간다고 보고 있다.
마르크스는 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중세 봉건사회와의 투쟁을 통해 봉건사회를 붕괴시켰다고 보고 있다.
즉,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중세 봉건사회를 파괴시키고 근대 사회를 창조시켰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그 유명한 계급투쟁의 일면을 제시문 (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제시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제시문의 "이러한 봉건사회의 붕괴를 통해서 출현한 근대 부르주아 사회 역시 계급 대립을 해소한 것은 아니었고,다만 과거를 대체할 새로운 종류의 계급,새로운 억압 조건,그리고 새로운 투쟁 형태를 선보였을 뿐이다. (중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 역시 새로운 계급 투쟁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에 대한 계급투쟁의 주체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로 보고 있고 이들의 승리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곧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공동체"가 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르크스가 보는 세계는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통해 변화해 나가고 진보하는 세계이다.
마르크스의 세계는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세계가 아닌 발전하고 진보하는 세계라는 니체의 세계와는 다르며,동시에 슘페터의 세계와는 동일하다.
그러나 슘페터의 세계는 자본주의이며,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발전,진보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즉, 슘페터의 진보하고 발전하는 세계는 자본주의를 의미하지만,마르크스의 세계는 자본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진보의 동인을 경쟁과 기술혁신이라는 창조적 파괴로 보았다면,마르크스는 세계 발전의 동인은 계급투쟁인 것이다.
마르크스 세계의 발전,진보의 방향,목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는 공동체, 즉 사회주의이다.
이렇게 봤을 때,마르크스의 세계는 끝나는 지점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슘페터의 세계와도 다른 점을 보인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역사의 발전,세계의 발전은 끝이 나는 것이다.
슘페터는 세계의 발전,역사의 발전에 종료지점을 설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지점은 분명하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면,역사가 종료된다는 그의 주장은 그 이상의 발전과 진보를 담보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역사가 그곳에서 종료된다면,세계와 인간은 정체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료된 역사에 살고 있는 인간은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결국 다시 사회주의는 다른 어떤 것으로 전복되어 역사는 계급투쟁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제시문 (다)에서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것은 계급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세계가 창조되고 파괴되지만,세계가 발전해 나가야 하는 지점이 설정되어 언젠가는 발전이 종료된다는 점이다.
⊙ 답안 작성
[문제1] ‘창조’와 ‘파괴’의 관점에서 제시문 (가),(나),(다)를 비교하시오. (800자 내외)
위에서 밝힌 대로 〔문제 1〕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시문을 분석하는 능력,즉 독해력을 묻고 있다.
따라서 제시문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제시문을 각각 자세히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800자 내외이므로 3단락 정도로 개요를 구성하면 되겠다.
단락 1에서는 제시문 (가),(나),(다)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제시문 (가)에서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하고 파괴되면서 변화해 나가며,이는 순환적인 양상을 띤다고 주장한다. 반면,(나)와 (다)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되고 파괴되고 변화해 나가면서도 발전한다고 주장한다"고 정리하고 각각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간략하게 서술해 주면 된다.
요약이므로 제시문의 핵심 요지를 밝히고 저자가 이 요지를 밝히기 위해 어떤 논리로 근거를 들어 설명하는지를 재구성해서 써야 한다.
요약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제시문을 복사해서 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이 이해한 바를 글로 풀어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락 2에서는 제시문 (가)와 (나),(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는 것으로 서술하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제시문 (가)의 순환적인 세계,역사관과 제시문 (나)와 (다)의 발전하고 진보하는 세계,역사관의 차이점을 밝히면 될 것이다.
분량이 많지 않으므로 1번 문제에서 어떤 세계,역사관이 더 타당한지를 밝히는 것보다는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지를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이 더 좋다.
단락 3에서는 제시문 (나)와 (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면 될 것이다.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면서 발전하고 진보해 나가지만,제시문 (나)의 경쟁과 기술혁신이라는 동인을 통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진보할 것이라는 주장과 제시문 (다)의 계급투쟁이라는 동인을 통해 역사는 발전하지만,세계와 역사 발전의 종료 지점이 설정되어 있는 폐쇄적인 역사관이라는 차이를 부각시키면 될 것이다.
여기서도 어떤 역사관이 더 타당한지를 밝히는 것보다는 차이점과 공통점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문제2] 제시문 (가)와 (나) 가운데 역사 해석의 관점으로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 하나를 선택하고,그 입장에서 다른 제시문의 주장을 비판하시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의하시오. (800자 내외)
앞에서 밝힌 대로 〔문제 2〕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각각 제시문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먼저 제시문 (가)와 (나)의 논지를 정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단락 1에서 제시문 (가)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하고 파괴되면서 변화해 나가며,이는 순환적인 양상을 띤다고 주장하고,(나)는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되고 파괴되고 변화해 나가면서도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이 후 학생들은 입장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약 200자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단락 2에서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제시문을 비판하는 단락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①반대 의견이 왜 틀렸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맞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②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지점이 왜 논리적으로 틀렸는지를 보여 줘야 한다.
제시문 (가)를 선택했다면 제시문 (나)를 어떻게 비판할 수 있을까?
먼저,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보가 도달하려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경쟁과 기술혁신으로 물질적 풍요가 담보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부문에서 창조적 파괴가 이뤄지는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창조적 파괴가 이뤄지는 것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효율성을 전제하는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관계와 인간의 삶까지 효율성으로 창조적 파괴되는 사실을 비판의 초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나)의 주장을 따를 경우 인간의 행복을 담보하지도 못한다는 것으로 비판의 초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발전지향적이고 상승지향적인 역사관은 발전과 진보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그로 인해 소외되는 계층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경제 발전이라는 창조적 파괴의 큰 흐름에 따라가지 못한 채,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외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시문 (나)의 주장을 따른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제시문 (나)의 입장을 선택했다면 제시문 (가)를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제시문 (가)의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세계,역사관을 취한다면,현재 인류가 이루어낸 모든 성과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낸 경제 발전,과학 발전,수명연장과 같은 성과는 발전과 진보를 향한 인류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제시문 (가)의 세계관에서는 단지 세계와 역사는 반복되고 순환될 뿐 인류의 노력은 필요없게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세계와 역사에서 인간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발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유지는커녕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락 3에서는 이러한 비판을 설명할 수 있는 사례를 들면 된다.
제시문 (가)의 입장에서 제시문 (나)의 입장을 비판하는 학생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소외현상과 관련된 사례를 들면 될 것이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워낭소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 혁신을 통해 농산품의 생산량이 늘수는 있겠지만,그로 인한 전통의 상실과 생태계의 파괴 등을 놓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제시문 (나)의 입장에서 제시문 (가)의 입장을 비판하는 학생은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과 동시에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해 삶이 윤택해진 사례를 들면 될 것이다.
[문제 3] 제시문 (나)와 (다)의 주장에 근거하여 제시문 (라)의 그림을 해석하시오. (1,000자 내외)
먼저 제시문 (라)에 나와있는 자료를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림 1과 2에서 학생들은 1947~73년과 1974~2004년 사에에 보이는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에 대한 비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전하기 시작한 그림2의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을 그림 1과 비교해 본다면 최하위 20%층은 오히려 거의 증가하지 못하고 오히려 최상위 20%층은 압도적으로 증가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쉽게 계층별 부의 분배가 1970년대 후반부터 눈에 띄게 불평등해지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본다면,왜 그림 1의 기간 동안의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의 평균이 그림 2의 그것보다 더 높은 것을 보이는 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혁신이나 경쟁은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히 발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동인이 경쟁과 기술혁신이라는 동인,즉 창조적 파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제시문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1970년 후반의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이 1947~73년의 그것보다 높게 나와야 하는데 반대로 나온 것이다.
이는 물론 과거 발전의 정도가 현재보다 더 미흡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계층별 부의 분배가 심화된 것의 또다른 방증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1947년도보다 1973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살게 되었지만,1974~2004년도에는 잘 사는 사람만 더 잘 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하위 층은 2004년에도 1973년도 정도의 소득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최상위층은 계속해서 더욱 더 높은 소득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 3을 통해서 학생들은 시간당 생산량이 1970년대 후반부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지만,시간당 실질임금은 1950년도부터 보여 오는 증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읽어내야 한다.
즉 시간당 생산량과 시간당 실질임금간에 보이는 잉여량이 점점 증가하고 있고,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림 1,2의 분석 내용과 연결하여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시간당 생산량은 제시문 (나)의 입장처럼 경쟁과 기술혁신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분배의 문제에 있어서는 갈수록 더 불평등해지고 있다는 점,발전 혹은 진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제시문 (라)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시문 (라)에 대한 분석을 단락 1에서 보여주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입장을 정하는 것인데,만약 제시문 (나)의 입장을 취한다면,시간당 생산량의 증가를 들면서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음을 근거로 삼아 분배의 문제만 해결하면 자본주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음을 주장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제시문 (다)의 입장에 대한 비판을 겸해주면 좋을 것이다.
즉 제시문 (다)의 입장을 취한다면,분배의 문제가 해결되겠지만,전체 세계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즉 제시문 (다)처럼 발전의 종료지점을 설정하면 전체 세계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분배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발생될 수 밖에 없게 되므로 따라서 경쟁과 기술혁신을 통한 세계의 발전이 우선이고 분배 문제의 해결을 차선을 삼아서 해결하자고 주장하면 된다.
분배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는 롤스의 정의론을 들면 될 것이다.
반면 제시문 (다)의 입장을 취한 학생이라면,세계의 양적인 발전보다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면 될 것이다.
즉 세계가 끊임없이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전한다는 것은 부분적인 사실임을 밝혀 제시문 (나)를 비판해야 한다.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전하는 것은 양적인 부분만을 의미하지 모든 사람들이 발전 혹은 행복해진다는 주장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정확한 방향과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세계관 역사관에서는 언제나 희생자를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현상 역시 최상위층이 더 잘살기 위한 창조적 파괴가 최하위층의 경제적 궁핍을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하위층의 희생을 통해 세계가 발전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를 선한 세계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종료지점을 설정하거나 폐쇄적인 역사관을 취해 발전을 제한해서도 안되겠지만,진보와 발전의 방향을 명확히 설정하자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더디가더라도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가자는 대안을 내놓아도 될 것이다.
속도와 경쟁을 강조하고 물질적인 풍요만을 강조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마무리 지어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제 3〕에서는 (나)와 (다)의 입장에 근거해 (라)를 해석하시오라고 제시했다고 해서 해석에서만 멈추지 말고,제시문의 논리를 확장시켜서 글을 전개해야 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용준 S · 논술 선임연구원 leroy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