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

☞ 10월10일자 한국경제신문 A39면

시속 200㎞로 달리던 차가 사고가 나는 것을 보곤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은 도로가 너무 평평하고 직선으로 설계돼 그런 것이니 도로를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하게 만들면 사고는 절대 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면 어떨까.

또한 '차를 만들 때 아예 100㎞ 이상은 속도가 나지 않도록 하면 사고가 안 난다'고 주장하면 어떨까.

그러나 운전자로 하여금 규정 속도를 준수하도록 조치하면서 도로에 속도측정기를 설치하고 경찰관을 배치해 사고도 없애고 목적지까지 빨리 잘 갈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나은가.

그리고 차를 만들 때 필요하면 잠깐 120㎞로 달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아예 100㎞ 이상 속력이 안 나게 만드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은가.

차사고가 아예 안 나도록 하려면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를 타는 길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시속 200㎞는커녕 100㎞를 넘어본 일이 없는 나라에서 30~40㎞로 달리고 있는 차의 속도를 60~70㎞까지 올리기 위해 길을 닦고 있는데 사고 가능성을 언급하며 설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한계가 있다.

최근 미국발 금융위기의 국면에서 신자유주의 모형, 그리고 금융자본주의와 투자은행 모형 등이 한꺼번에 몰매를 맞고 있다.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에 종속된 금융체제를 탈피하자느니 "평소에 까불더니 꼴 좋다"는 식의 감정어린 비판마저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금번 위기는 역시 도로보다는 운전자의 과실이 매우 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주택담보대출을 증권으로 유동화시켜 파는 업무는 상업은행업과 투자은행업 간의 합작품이다.

담보대출이 이뤄지고 이를 증권으로 유동화시켜 팔면 자금이 회수되니 다시 대출을 줄 수 있고 또 유동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한 사이클이 돌 때마다 수수료 수입이 짭짤하게 발생하다 보니 이 기법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한 나머지 부적격 대상(서브프라임 등급)에까지 대출이 주어질 정도가 된 것이다.

세계 수준의 운전자이니 잘 할 것이라 믿었는데 대형사고를 낸 셈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의 경우 사태가 터지기 전 유동화업무가 워낙 짭짤하다 보니 커다란 담보대출회사를 하나 인수해 담보대출과 유동화 부문을 수직계열화했던 일이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담당 임원이 이를 반대하자 오닐 회장은 그를 해임시켰다.

투자은행들이 대출자산 유동화 업무에 얼마나 심하게 집착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예다.

일은 터졌다. 글로벌 금융체제 아래서 미국이 재채기를 하니 한국 경제는 독감에 걸리고 있다.

미국의 지위는 특별하다.

전 세계가 사용하는 달러를 발행하는 발권력을 가진 나라다.

미국은 남미 외채위기,동남아 외환위기의 해결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스로가 사고를 당했다.

이제는 다른 국가들도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합심해 위기 극복에 힘을 쏟을 때다.

그러나 사고가 난 것을 보며 도로와 자동차 설계가 미국과 비슷해서 잘못됐으니 다 바꾸자는 식으로 모형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성급하다.

지금 우리 정부는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도로들을 최대한 평평하고 반듯하게 만들려고 많은 플랜을 제시하고 있다.

도로는 되도록 평평하고 반듯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를 좋은 차가 다니도록 하되 속도계와 교통경찰을 적절하게 잘 배치해야 한다.

구부러진 도로에서는 속도도 안 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고가 생길 수 있다.

처음에 미국을 비웃다가 자국 주가가 폭락하고 시장이 불안해지는 것을 보며 당황해한다는 남미 지도자들의 소식을 접하며 사고가 나자 도로와 차의 설계부터 문제삼는 성급한 시각을 펼치는 이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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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왜 자동차 선진국이 되지 못했을까

해설

윤창현 교수가 칼럼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제를 요약한다면?

한마디로 미국에서 대형 은행들이 도산하고 주식가격이 폭락하는 금융위기가 터졌지만 미국의 앞선 금융 제도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제도를 잘못 운영한 때문이지 제도 자체의 결함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필자는 자산유동화기법, 파생금융기법 등 미국의 앞선 금융기법은 여전히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를 자동차 도로에 비유해 이번 금융위기는 자동차를 운전한 운전자의 잘못 때문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필자의 지적처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칫 운전자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사고를 자동차의 결함 때문으로 판단할 경우 유용한 자동차를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적지 않다.

자동차의 내연 기관을 가장 먼저 개발한 국가는 영국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동차 강국은 독일이다.

영국이 자동차 강국이 되지 못한 것은 자동차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위험한 도구라고 주장하는 당시 영국 마차 사업자들의 로비에 넘어가 영국 정부가 붉은 깃발법이라는 자동차 운행 규제 법을 만든 게 큰 원인이다.

1765년 제임스 와트에 의해 증기기관차가 개발되고 1839년 앤더슨에 의해 전기 자동차가 개발된 후 마차산업이 쇠퇴하자 1865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최초의 자동차 법규인 '적기조례(붉은 깃발법,Red Flag Act)'를 선포하게 된다.

그 내용은 ①1대의 자동차에 3인의 운전수를 태운다.

그 중 한명은 낮에는 붉은 깃발,밤에는 붉은 등을 가지고 55m 앞을 달리면서 자동차가 온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②최고 속도를 농촌에서는 시속 6.4㎞ 이하로 하고,시가지에서는 시속 3.2㎞ 이하로 한다.

③밤에는 촛불이나 가스불을 달고 운행해야 한다는 등으로 되어 있었다.

당연히 영국의 자동차 기술자는 빠른 속도를 내는 자동차를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영국보다 100년이나 늦은 1823년 다임러와 벤츠가 가솔린 엔진을 개발한 독일에서는 자동차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이 같은 규제를 하지 않았다.

독일의 기술자들은 빨리 달리면서 안전한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독일은 지금도 속도 제한을 하지 않는 아우토반이라는 고속도로를 두고 있다.

영국은 1896년 붉은 깃발법을 폐지했으나 독일 프랑스 등 다른 국가들의 자동차 산업이 이미 본 궤도에 오른 후였다.

이처럼 새로운 발명품이나 산업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영국이 붉은 깃발법 대신 신호등이나 자동차 전용도로를 만드는 대책을 내놓았다면 오늘날 세계 최강의 자동차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