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개혁의 바람'…경쟁·성과보상 체계 잇단 도입
[기획] 잘하는 이에게 당근… 못하는 이에겐 채찍을…
#1. 서울대는 지난달 25일 인사위원회를 열어 정교수 승진 및 정년보장 심사 대상자 81명 중 47명(58%)만 승진시켰다고 밝혔다.

81명 대상자 중 32명이 심사받기를 포기했다.

나머지 49명 중 2명은 승진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심사 결과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이에 따라 서울대의 정교수 승진율은 2006년 72.8%에서 지난해 63.9%,올해 53.8%로 큰 폭으로 감소했다.

#2. 중앙대에 지난 5월 새 이사장으로 취임한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은 교수들에게 '성과주의에 기반한 연봉제'를 도입하겠다고 지난 8월27일 밝혔다.

중앙대 교수들은 지금도 연봉제로 보수를 받고 있지만 연차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기 때문에 호봉제(근무 연수에 따라 임금이 늘어나는 체계)나 다름없었다.

대학가에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한번 교수로 임용되면 퇴직할 때까지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는 시절은 갔다.

지금까지처럼 논문을 쓰지 않고 강의를 엉성하게 하더라도 중간평가를 받지 않거나 형식적인 중간평가에서 두루뭉술 넘어가는 모습은 앞으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온정주의식 학사행정은 사라지고 있다.

경쟁 시스템을 만들고, 더 잘하는 이에게 당근을, 못하는 이에게 채찍을 주는 성과 보상 체계가 가동되고 있다.

⊙ KAIST·서울대·중앙대 등 잇달아 개혁 추진

가장 먼저 개혁을 시도한 곳은 KAIST다.

서남표 KAIST 총장은 2006년 7월 취임하자마자 "세계 1등 대학이 되겠다"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체질 자체를 싹 바꿔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지금껏 대학 개혁 의지를 보인 총장은 많았지만 모두 구성원의 반대에 못 이겨 용두사미로 끝나곤 했다.

서 총장은 달랐다.

그는 "똑똑한 학생들을 받아 일류 인재로 키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범죄"라며 가만히만 있으면 정년이 보장되던 교수들에게 "뻔한 연구를 하려면 나가라"고 경고한 뒤 테뉴어(tenure·정년보장) 심사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영어로 수업하는 비중도 확 늘렸다.

글로벌 시대,어차피 다른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료를 공유하려면 영어를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불만이 있거나 개혁에 따라오지 않는 교수들에게는 간단히 말했다.

"당신은 지금 잘못된 자리에 있다(You're in the wrong place)."

변화의 대상은 교수만이 아니었다.

KAIST는 설립 이후 쭉 '학비 무료' 원칙을 갖고 있었지만 서 총장은 "공부 안 하는 학생들에게는 공짜 수업을 해줄 수 없다"며 "일정 기준을 넘기지 못하면 등록금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철저한 경쟁의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서 총장이 이 같은 개혁에 성공한 데는 성장기 이후 거의 평생을 미국에서 보낸 이유가 크다.

학연 지연 등 얽매일 '因緣'이 없었기에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는 평가다.

일단 KAIST가 개혁에 성공하자 서울대가 뒤를 따랐다.

국립대인 서울대 교수는 시간강사(앞으로는 조교수로 통합)-조교수를 거쳐 부교수가 되면 공무원 신분이 되고 정교수가 되면 자동으로 만 65세 정년을 보장받았다.

서울대는 지난 3월 개교 62년 만에 처음으로 정교수 승진 심사 신청자 39명 중 10명(25.6%)를 무더기로 탈락시켰다.

심사 통과하기가 어려워지고 자칫하면 '탈락 교수'의 불명예를 안게 된다는 것은 교수들에게 강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달 심사에서 81명 대상자 중 32명이 심사를 스스로 포기(유보)한 것은 이 같은 불안감 때문이다.

두 번째 심사에서 탈락 혹은 유보된 교수들의 비율은 42%에 이른다.

서울대는 이번에 실시한 정년보장 심사부터 위원에 외부인사를 2명 포함시켰다.

김명환 서울대 교무처장(자연대 수리과학부 교수)은 "외국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분들로 심사 객관성을 위해 참여시켰다"고 설명했다.

서울대는 이와 함께 원하는 교수를 찾아 '콕 찍어' 영입을 시도하고, 정교수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도 테뉴어를 줄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도입을 위해 태스크포스를 만들기로 했다.

성과주의 인사를 확실히 하겠다는 뜻이다.

중앙대 역시 조직을 자극하기 위해 우수 교수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하는 '상시 외부채용 시스템'을 운영키로 했다.

학내 구조조정도 조만간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박 이사장은 또 "기존 총장 선출 방식인 직선제를 임명제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민주적'이라는 이유로 도입된 총장 직선제가 학과 간 형평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개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는 지난달 27일 700여명의 중앙대 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백화점식 학문 단위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며 "선택과 집중 원칙에 따라 선별 지원하고 외부 컨설팅을 통해 합리적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

⊙ 대학의 역할 바뀐 것이 원인

그동안 한국 대학의 경쟁력은 국가 경쟁력,기업 경쟁력에 비해 턱없이 떨어졌다.

대학은 '상아탑'이라거나 '지성의 공간'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지만 이때의 지성은 '知'성이라기 보다는 '志'성에 가까웠다.

학문적 탐구보다는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지사적인 의미가 강했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대학이 차지했던 역할에 기인한다.

특히 19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보다는 이념적인 내용들을 담은 '커리'를 읽고 토론하며 술을 마시고 거리에서 투쟁하는 대학생이 '옳다'는 평가를 받았다.

거리에서 큰 데모라도 벌어질 때면 교수도 학생도 휴강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현장'에 밀착해야 하며 책더미 속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다고 믿었다.

시절이 달라지면서 대학과 대학생에 요구되는 역할도 변했다.

더 잘 가르치고,더 좋은 연구를 더 많이 내놓는 교수가 필요해졌다.

학생들 역시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서 학문적, 실무적 역량을 키워야만 된다.

지금 학생들이 밀착해야 할 '현장'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업의 사무실과 연구소다.

누군가는 대학가에 낭만이 사라졌다고 한탄한다.

반면 대학이 본연의 위치로 돌아왔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이상은 한국경제신문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