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한국의 라면, 일본의 라멘
"가난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눈물 젖은 빵이 아니라 눈물 젖은 라면으로 화제가 됐던 이 말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1986년 고교 2학년으로 서울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육상에서 금메달 3개를 따면서 일약 신데렐라로 떠오른 임춘애 선수 얘기다.

실은 초등학교 때 운동하다 라면을 간식으로 먹었다고 한 말이 부풀려져 눈물의 인간승리로 와전된 것으로 뒤에 밝혀지긴 했지만.

어쨌든 값싸면서도 맛 좋고 칼로리도 높아 서민들의 한 끼 식사로 훌륭한 이 라면이 얼마 전(8월25일) 탄생 50년의 생일을 맞았다는 소식이 일부 신문에 보도됐다.

라면을 워낙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 떠올리는 라면은 봉지라면이든 컵라면이든 그것은 모두 인스턴트 라면이다.

지금의 이 인스턴트 라면이 태어난 곳은 일본이다.

대만인 출신으로 일본 닛신식품 창업자인 안도 모모후쿠가 추운 겨울날 라면집 앞에 줄을 서 기다리는 서민들을 보고 집에서도 편리하게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닛신식품은 라면 판매 50주년을 맞아 8월23일부터 일본 각 지역에서 라면의 원조 격인 '치킨라멘' 탄생 당시의 제조 공정을 공개하는 기념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인스턴트 라면이 나오기 전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원래 라면은 돼지 닭 등의 뼈를 고아 만든 육수에 각종 스프를 넣고 중화면을 말아 만든 것이었다.

지금도 일본의 라면 요리는 면발이 우리네 것처럼 기름에 튀긴 게 아니라 생면 그대로를 써서 만드는 게 대부분이다.

이 인스턴트 라면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63년 삼양식품에 의해서이다.

삼양라면 측 자료에 따르면 해마다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인 당시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라면을 이 땅에 선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초기에는 이름도 생소했던 '라면'을 사람들이 마치 비단(羅)이나 솜(綿)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는지 잘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건 한국은 지금 한 해 라면 소비량(2006년 기준)이 국민 1인당 75개로 압도적인 세계 1위를 차지할 만큼 라면 애호국이 됐다.

라면의 어원은 중국의 납면(拉麵)에서 왔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수타면의 원리와 같이 밀가루를 반죽한 것에서 두 줄,네 줄,여덟 줄,열여섯 줄 식으로 늘려 빼는 방식을 중국에서 납면이라 했다.

이 말의 중국 발음이 '라미엔'이고 일본에서는 이를 '라멘'으로 읽었다.

우리 사전에서는 라면을 '국수를 증기로 익히고 기름에 튀겨서 말린 즉석식품'으로 풀이하는데,일본의 '라멘'에서 넘어온 말이며 이는 다시 중국의 '라미엔'(拉麵)이 그 어원임을 덧붙이고 있다.

어쨌거나 우리의 라면은 일본에서 들여온 상품이고 그 말의 배경도 당연히 일본말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는 이 말의 정체는 사실 기형적인 것이다.

'라'는 일본의 '라멘'에서 앞 글자를 따오고 '면'만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의 구성으로만 보면 소라색(空色)이니 곤색(紺色)이니 마호병(魔法甁) 같은 불구의 말하고 다를 게 없는 것이다(이들은 각각 하늘색,진남색,보온병 등으로 이미 바뀌었거나 바꿔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라면'은 사전에 당당히 올라 있고 우리말에서 뿌리를 완전히 내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순우리말인 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정도다.

이에 비해 서민들이 즐겨 찾는 또 다른 음식인 '우동'은 거센 순화의 도전을 받았다.

뒤늦게 들어온 라면이 완전히 우리말화해서 사전에 자리를 잡은 데 비해 훨씬 이전부터 우리말 속에서 쓰인 우동이 여전히 순화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아마도 그것은 우동이란 말이 일본에서 들어온,일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왜색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