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Issue] 그루지야, 꺼지지 않는 분쟁 '불씨'…美·러 新냉전 재연?
러시아군의 철수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17일 니콜라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철군 약속을 하고 이틀이나 지난 뒤 시작됐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은 철군이 시작되기 전까지 러시아의 늑장 철군에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 왔었다.

로이터통신은 러시아군 소속의 장갑차와 탱크 등 군용차량들이 19일 오후 그루지야 중부 전략 요충지인 고리시를 떠나 러시아 영토인 북오세티야로 향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아나톨리 노고비친 러시아군 부참모장(중장)은 이날 "남오세티야 평화유지군을 지원했던 러시아 병력이 철수를 계속하고 있고 철군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이날 밤 "평화합의안에 따라 추가 안전 조치를 이행할 500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러시아군이 늦어도 22일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다.

러시아-그루지야 사태는 지난 7일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이끄는 그루지야가 독립을 요구하는 남오세티야 자치주를 공습하면서 시작됐다.

친러시아 성향의 남오세티야를 완전 점령하려던 사카슈빌리 대통령의 시도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무산됐다.

러시아군이 그루지야의 휴전 제의를 무시하고 수도 인근까지 진격하며 강공을 퍼붓자 러시아의 진짜 침공 목적은 눈엣가시인 그루지야의 친미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란 분석도 제기됐다.

실제 옛 소련권 국가들의 친미·친서방화는 그동안 러시아를 자극해왔다.

특히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NATO 가입을 추진해왔다.

서방 측이 지난 2월 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독립을 인정한 것이 그루지야 사태의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가 독립을 주장하는 남오세티야를 위해 군사작전을 펼친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사태 초기 가만히 있던 미국이 그루지야에 대한 지원에 나서면서 사태는 미국과 러시아의 충돌 우려로까지 번졌다.

게다가 미국은 지난 14일 폴란드와 MD 기지 협상에 합의함으로써 러시아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동안 미국은 이란 등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체코와 폴란드에 MD 기지 건설을 추진해왔으며, 러시아는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강력 반발해왔다.

일단 러시아와 그루지야 양측 모두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러시아가 철군을 시작함에 따라 그루지야 사태는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조만간 평화협정안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 러, 발틱함대 핵무장 검토 등 긴장 여전

그루지야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번 사태로 표면화된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관계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특히 러시아는 미국의 유럽 MD체계 구축에 맞서 냉전 후 처음으로 발틱함대 핵탄두 무장까지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17일 모스크바의 한 고위군 소식통이 "유럽에 MD망을 설치하려는 미국의 결심에 맞서 군은 워싱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모든 계획을 검토 중"이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이미 '신냉전' 시대가 시작됐다는 주장도 나온다.

옛 소련 외무장관으로서 1980년대 후반 미국-소련 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했던 에드아루드 셰바르드나제 그루지야 전 대통령(80)은 17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 인터뷰에서 "미국이 MD 체제에 집착하는 한 러시아는 지금 같은 강경조치를 계속 취할 것"이라며 "미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냉전 상황에 놓여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 때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의 그루지야 공격은 1939년 옛 소련의 핀란드 침공과 비슷하다"고 비난하면서 "러시아는 옛 소련 영토를 다시 복원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루지야 사태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 간 공방이 격화되는 상황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러시아의 완전한 철군을 요구하는 새 결의안 선택에 러시아가 강력 반발하고 있다.

프랑스의 제의로 유엔 안보리는 19일 그루지야의 영토를 원래대로 돌리는 것을 국제사회가 지지하는 결의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이번 무력 분쟁을 통해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공화국이 그루지야에 편입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명확해졌다고 주장하며 기존 국경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NATO도 '잠재적 회원국'인 그루지야에 대한 전폭적 지지 의사를 밝히며 러시아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다.

NATO는 19일 브뤼셀에서 열린 긴급 NATO 외무장관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무력 분쟁 이전 상태로 러시아군이 물러서지 않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NATO와 러시아가 '통상적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구체적으로 통상적 비즈니스가 무엇인지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소식통들은 NATO와 러시아의 관계가 사실상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 주변국들도 긴장 고조

이번 그루지야 사태를 맞아 인접국들도 긴장하고 있다.

친서방 노선을 걸어온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다음 침공 대상국이 자국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그루지야처럼 NATO 가입을 추진해왔으며 전체 인구 4600만명 중 800만명이 러시아인이어서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우크라이나인들은 걱정하고 있다.

또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러시아의 흑해함대에 임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임대 기간이 끝나는 2017년 이후 흑해함대가 떠나주길 바라고 있으나 러시아는 그럴 의향이 없다며 양국의 갈등은 고조되고 있다.

자원 부국인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그루지야 사태로 유럽으로 에너지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다.

중앙아 최대 산유국인 카자흐스탄은 '바쿠(아제르바이잔 수도)-트빌리시(그루지야 수도)-세이한(터키의 항구도시)'을 연결하는 BTC 송유관을 이용해 원유를 유럽에 수출하려 추진해왔으나 이번 그루지야 사태로 BTC 송유관 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앙아 최대 천연가스 생산국인 투르크메니스탄도 자국과 아제르바이잔을 연결하는 카스피해 횡단 가스관 건설을 진행해 왔으나 이 또한 그루지야 사태 발발 이후 건설이 차질을 빚고 있다.

서기열 한국경제신문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