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모찌의 추억
얼마 전 2009학년도 수시 2학기 모집 요강이 발표됐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실상 수능의 계절로 접어든다.

예나 지금이나 입시 때면 수험생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가벼운 '선물'이 있다.

엿이나 사탕 종류가 대표적인데 요즘엔 여기에도 아이디어 상품이 넘친다고 한다.

가령 잘 풀라고 휴지를 준다거나 잘 찍으라는 의미에서 포크를 건네기도 하고,건투를 빈다는 뜻에서 권투장갑을 마련하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여전히 인기 있는 것은 역시 먹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커피 홍차 사탕 엿 초콜릿 같은 단 음식인데 모찌떡도 빠지지 않는다.

이 모찌떡은 사람에 따라 그냥 모찌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찹쌀모찌 또는 앙꼬모찌라 부르기도 한다.

어떻게 불리든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물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흔한 모찌는 대사전이면 모를까 웬만한 중소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일본말이기 때문이다.

모찌는 본래 일본에서 떡(餠)을 이르던 말이다.

일본의 글자인 히라가나로 적으면 'もち'로 우리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모치'이지만 모찌로 굳어져 쓰인다.

물론 대사전에도 '모찌'로 다루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순화의 대상이었다.

1995년 당시 문화체육부는 광복 50돌을 계기로 일제 강점기 이래 국민의 언어생활 속에 침투해 국민 의식과 언어습관을 굴절시켜온 일본어투 생활용어를 순화한 말 702개 단어를 고시했다.

이때 '모찌'는 '떡'으로,모찌떡은 '찹쌀떡'으로 순화됐다.

그런데 모찌이든,모찌떡이든,찹쌀모찌든,앙꼬모찌든 우리가 머리에 떠올리는 것과 일본에서 모찌라고 부르는 그 떡은 실제론 다른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찹쌀로 만든 둥그런 떡 속에 단팥으로 소를 넣은 것을 생각하지만 일본에서의 모찌는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우리네 인절미 같은 떡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찌라는 말의 어원과 관련이 있다. 일본어에서 모찌는 본래 '소지(所持)하다'라는 뜻이다.

일설에는 일본에서 옛날 신사에 갈 때 간식용으로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찹쌀떡을 갖고 다녔는데,이로부터 그 찹쌀떡을 모찌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홍진희,<양파와 다마네기>,창조인,1999년)

찹쌀떡으로서의 '모찌'가 아닌,이 '소지하다'란 뜻으로 쓰인 '모찌'가 우리에게 넘어온 말도 있다.

바로 '가방모찌'가 그것이다.

일본에서 가방모찌는 '상사의 가방을 들고 수행함, 또는 그 직책을 맡은 사람' 즉 비서를 뜻한다.

또는 '상사에게 아첨하며 쫓아다니는 사람을 비웃는 말'로도 쓰인다.

이 말이 우리말에 들어와서도 역시 '윗사람을 수행하면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자리잡았다.

한마디로 하면 '따까리'인 셈이다.

일부에서는 이 '따까리'를 오히려 일본말인 줄 알고 쓰지 말아야 할 말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따까리는 다만 속어일 뿐 엄연한 순우리말이고 표준어이므로 가려 쓰면 될 것이지,못 쓸 말은 아니다. (일본말에 '따까리(たかり)'가 있지만 이는 남을 협박해 금품을 빼앗는 사람, 즉 등쳐먹는 사람을 이르는 것으로 다른 말이다. )

어쨌든 '모찌(떡)'를 기준으로 보면 모찌떡은 역전앞과 같은 겹말임을 알 수 있다.

모찌이든 모찌떡이든,찹쌀모찌이든 어차피 우리말이 아니고 우리에겐 떡이나 찹쌀떡이란 훌륭한 말이 있으므로 이를 쓰면 된다.

앙꼬모찌는 당연히 앙꼬가 든 모찌이므로 이 역시 찹쌀떡이라 하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 찹쌀떡은 '고물을 묻혀 시루에 찐 것과 둥글게 만들어 속에 단팥으로 소를 넣은 것' 등으로 두루 쓰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찹쌀을 쪄서 떡메로 친 다음 네모나게 썰어 고물을 묻힌 떡을 특히 인절미라 부른다.

70년대 교복세대나 예비고사 세대까지만 해도 친숙한 말이었던 모찌는 시대가 바뀌면서 지금은 찹쌀떡으로 많이 대체된 것 같다.

아직은 그 세력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의 경쟁' 속에서 이미 찹쌀떡에 자리를 내줬다고 봐도 될 것이다.

좋은 우리말이 있으면 의식적으로 외래어라 해서 쓰지 말 것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언중의 선택에 따라 말이 살아 오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라 할 만하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