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밥'은 파낼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우체국이 있다/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키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 >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몸 이름 바로알기 ②
안도현 씨의 시 <바닷가 우체국> 앞부분이다.

엽서,편지,우체통,여관방….

지금은 여간해 찾아보기 어려운,추억 속의 낱말이 돼 가는 이런 소품들을 통해 아련한 소통의 그리움을 자아내 널리 알려진 시이다.

그런데 여기엔 아쉽게도 옥에 티가 있다.

시인이며 <우리말 지르잡기> <작가들이 결딴낸 우리말> 등의 저자 권오운 씨가 그것을 집어냈다.

"안도현은 그의 시에서 '귓밥을 팠다'고 노래했다.

'귓밥'은 '귓불'과 같은 말이다.

'귓바퀴의 아래쪽에 붙어 있는 살'이 '귓불'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팠다'고 했으니까 '귓불'이 아니라 '귀지'를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귓구멍 속에 낀 때'인 '귀지'를 일부 지방에서 더러 '귓밥'으로 쓰고 있다. "

권오운 씨의 지적대로 '귓밥'은 '귓불'과 같은 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귀'라고 할 때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귓바퀴'이다('귓바퀴'는 정확히 말하면 '겉귀의 드러난 가장자리 부분'을 말한다).

이 귓바퀴의 아래쪽에 붙어 있는,도톰하게 늘어져 있는 살을 '귓불'이라 한다.

사람들이 이를 '귓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아마도 이는 비슷하게 말랑말랑한,뺨의 한복판을 가리키는 '볼'을 연상해 쓰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귓불'은 물론 '귀+불'의 구성이다.

이때의 '불'은 고어에서는 '부+ㅀ'로 쓰였는데 두둑하면서도 늘어진 살을 나타내기도 하고 '불알'의 준말로 쓰이기도 한다.

국립국어원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귓불의 관련 방언에는 '귀불알,구이불알' 따위가 있다.

'귓불'을 '귓방울'로 쓰기도 하는데 이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은 '귓불의 잘못'으로 풀고 있다.

'귓불'을 '귓볼'이나 '귓방울'로 잘못 알기 십상인데 비해,같은 말 '귓밥'은 '귀지'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귓구멍 속에 낀 때'를 가리키는 말은 '귀지'일 뿐이다.

이를 또 '귀에지'로 쓰기도 하는데 이 역시 <표준국어대사전>은 '귀지'의 잘못이라 못 박았다.

그러니 귀지는 '파거나 후비는' 것이고,귓불이나 귓밥은 '두둑하다,두툼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럼 그 귀지를 파내는 기구,즉 나무나 쇠붙이로 숟가락 모양으로 가늘고 작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귀지개,귀개,귀후비개,귀쑤시개,귀파개,귀이개.'

조금씩 형태를 달리 해 여러 가지로 쓰이지만 굳이 표준어를 고르라면 '귀이개' 하나뿐이다.

사전에서는 귀지개나 귀개는 귀이개의 잘못,귀후비개와 귀쑤시개는 귀이개의 방언으로 정리하고 있다.

귀파개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잘못이든,방언이든,사전에 아예 나오지 않든 귀지를 파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귀이개'일 뿐이다.

비슷한 형태의 여러 말을 버리고 굳이 '귀이개' 하나만을 표준으로 삼은 것은 이 말의 뿌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귀이개'의 구성은 '귀+이+개'인데 우선 '-개'는 날개,덮개,마개,지우개,이쑤시개 등에서처럼 '간단한 도구'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다.

'이'는 '틈이나 구멍 속을 긁어내거나 도려내다'란 뜻인 '우비다'의 옛말 '우의다'가 변한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